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84강(요9:1-7)(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4. 2. 05:17

요한복음 강해 제84(9:1-7)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612()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9:2)

 

세상에 태어나서 철이 들고 보면, 이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도대체 평등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신분의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능력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 불평등함은 태어날 때부터 불치의 질병을 가지고 있거나 장애자인 경우에는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생존자체를 위협받게 됩니다. 그래서 창조주에게 질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내가 장애자로 태어나야만 하는 것입니까? 얼마나 많은 세월을 불편한 신체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것입니까? 그 질문을 장애자를 대신하여 제자들이 스승 예수님에게 하고 있습니다(9:2).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서 구원사역을 하고 있는 예수님에게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뜻밖의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9:3).

날 때부터 맹인인 그 자가 불편한 가운데 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수행하고 있다는 내용의 답변입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아니하는 답변입니다. 특히 인과응보의 법칙이 철칙으로 여겨지고 있었던 고대 유대사회에 있어서 더욱 그러합니다. 당시 선하고 의로운 일을 행한 자는 부귀와 형통을 누리고 악하고 불법을 행한 자는 실패와 좌절을 맛본다고 하는 사상이 지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날 때부터 맹인인 자는 자신의 죄가 아니면 부모의 죄를 업보로 짊어지고 있는 자라야 옳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이 아니라고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소경을 통하여 하나님이 이 세상에 주고 있는 메시지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 내용이 소위 거지 나사로와 부자와의 우화”(16:19-31)에서 밝혀지고 있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말이 없지만 그 존재로 인하여 선지자의 책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부자에게는 사회에서 소외된 자를 돌보아주어야만 하는 거룩한 책무가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10:42). 부자에게 주어진 재산의 복은 한 평생 혼자서만 영화를 누리고 잘 살라고 준 것이 결코 아닙니다. 문간의 지체부자유한 거지를 돌보아 주는데 사용하여야만 하는 몫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뜻의 실천여부를 따져서 천국에서 논공행상이 있게 될 것입니다.

 

낮에 하는 일과 밤에 하는 일(9:4)

 

창세기 제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첫째 날에 빛을 창조하셨습니다(1:3-4). 어두움의 세상이 빛으로 밝아졌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창조가 끝나게 되면 새로운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그 이유는 생물들의 삶에 있어서 빛과 어두움이 모두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활동할 수 있는 시간대와 쉴 수 있는 시간대의 구분이 필요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경우에는 빛이 있는 낮 시간에 활동을 하고 빛이 사라진 밤시간에 휴식을 취하며 잠을 잡니다(1:5). 그와 같은 생의 리듬을 빗대어서 예수님이 묘한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다”(9:4-5). 여기서의 은 아직 인생을 살고 있는 동안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죽고 나면 아무런 일도 이 세상에서 행할 수가 없으므로 그것은 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아 생전에 하나님의 일을 부지런히 하라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그리하면 천국에서 상급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날 때부터 소경인 자는 어찌되는 것입니까? 낮에도 빛 가운데 세상을 볼 수가 없으니 일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항상 캄캄함 속에서 지내오고 있는 운명입니다. 그러한 자에게 예수님이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눈을 감고 있을지라도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세상을 열리게 해주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원하는 자에게는 새로운 육신의 눈을 창조해주고 있습니다. 그 창조의 과정이 꽤 야단스럽습니다;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9:6-7). 여기서 진흙을 이겨 그의 맹인의 눈에 발랐다는 대목이 예사롭지가 아니합니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창조의 과정과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2:7). 다음으로 그 소경은 가파른 길을 조심스럽게 내려가 실로암못에서 눈을 씻고 돌아와야만 합니다(9:7).

예수님에게 보냄을 받은 자가 운명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빛을 보지 못하더니 이제는 빛 가운데서 사는 삶이 전개가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육신적으로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변화를 받은 자의 삶입니다. 그와 같은 새로운 삶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시작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선택하여 예수님에게 보냄을 받은 자가 인생 가운데 얻게 되는 은혜입니다. 동시에 그 대목은 다시 눈이 밝아져서 세상으로 보냄을 받게 되는 과정을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참고로, 설혹 새로운 육신의 눈을 창조함 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 영혼 속에 생명의 빛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비추어 오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진리가 예수님의 말씀 속에 다음과 같이 고스란히 들어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9:5). 결론적으로, 그 심령 속에 예수님의 말씀의 빛을 가진 자는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