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바 사바 사바하20(손진길 소설)
서기 2013년 봄이 되자 서울에 살고 있는 스님 김법승이 시드니에 살고 있는 죽마고우 송원길에게서 난데없이 설교문을 하나 받게 된다. 카톡을 통하여 전송하고 있는 그 내용이 범상하지 아니하여 자세하게 읽어본다;
당장 눈에 띄는 대목은 그 설교문의 제목이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는 것이다. 법승 스님은 서울대학교 문리대 종교학과에서 비교종교학을 공부한 적이 있다. 따라서 성경말씀에 대해서도 박식하다. 그런 관계로 그 말씀이 성경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제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다.
그 다음에 법승 스님의 관심을 끌고 있는 대목이 죽마고우 송원길의 신분이 목사라고 적히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자주 김법승과 카톡으로 통화를 하면서 자신의 신분을 목사라고 밝히지 아니하고 있다. 그런데 이제 그가 전송하고 있는 설교문의 첫머리를 보니 분명히 목사의 신분인 것이다;
그것을 읽으면서 김법승이 빙그레 웃고 있다. 그리고 혼잣말을 하고 있다; “그래, 내 친구 송원길이야 목사가 되어도 아주 괜찮은 인물이지. 그는 매사에 빈틈이 없고 철저하거든. 성경말씀에 대한 연구와 설교 역시 그러할 거야… “.
법승 스님이 헛웃음을 지으며 독백한다; “원길이는 내가 스님이니까 괜히 친구 사이에 불필요한 거리감을 느낄까 싶어서 스스로 목사라는 신분을 그동안 드러내지 아니했을 것이야. 나는 전혀 상관이 없는데... 나는 그 옛날 대학교에서 벌써 비교종교학을 재미나게 공부한 사람이거든… “;
그러한 생각을 하면서 김법승이 송원길의 글을 찬찬히 읽어본다. 그 결과 그는 그 글이 바로 ‘사바 사바 사바하’에 관한 송원길의 생각을 성경말씀의 풀이에 의하여 전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아니하게 깨닫게 된다.
그 설교문을 전송하면서 송원길이 덧붙이고 있다; “법승아, 네가 한번 읽어보고서 사바 사바 사바하의 세계에 대하여 나름대로 참고가 되겠다고 판단이 서면 이 글을 창윤이 형과 종수 형에게도 읽도록 전달해주면 고맙겠다. 훗날 더 좋은 내용의 글을 작성하게 되면 다시 보내어 주마. 안녕… “.
송원길의 부탁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김법승은 그의 글을 4총사들이 전부 공람할 수 있도록 조치를 하고 싶다;
그 정도로 김법승은 마음이 넓은 인물이다. 그는 종파를 따지지 아니할 뿐 아니라 진리추구의 삶에 있어서는 종교의 다름 까지 뛰어넘고자 하는 대담한 성격이다.
그야말로 서울대학교의 교훈인 “베리 타스 룩스 메아” 곧 ‘진리는 나의 빛’이라고 하는 생각이 확실한 사람이다. 진리를 학문적으로 탐구하는데 있어서 그가 일찍이 전공한 비교종교학은 굉장히 도움이 되는 학문이다. 그러한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는 통 큰 스님이 바로 법승이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나 2017년 여름이 되자 김법승이 또 하나의 설교문 그것도 요약본을 시드니에 살고 있는 송원길로부터 받고 있다. 그 내용이 “참된 안식에 들어가는 믿음의 비결’이다. 그것이야 말로 ‘사바하의 세계’에 들어가는 비결을 건드리고 있는 내용이다. 따라서 법승 스님이 죽마고우들에게 그것을 읽도록 전송한다.
이제, 송원길이 죽마고우 김법승에게 보낸 두 편의 글을 첨부하는 것으로 길지 아니한 소설 ‘사바 사바 사바하’를 끝내고자 한다. 끝까지 읽어준 분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다. 살롬!
제목;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11:11-14, 23-26, 시104:29-30)
작성자; 송원길 목사(두란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년 3월 19일(화) 설교일; 3월 31일(부활절 주일설교 원고입니다)
유대교인들 가운데 부활을 믿고 있는 종파와 믿지 아니하고 있는 종파가 있습니다. 부활을 믿고 있는 종파의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고 믿지 아니하고 있는 종파의 사람들이 사두개인들입니다(마22:23, 행23:8). 오늘은 그들 두 종파를 설명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의 이야기를 전개하고자 합니다. 먼저 유대교에 있어서 그들 두 종파의 역할이 다릅니다; 주로 백성들에게 히브리성경을 가르쳤던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그와 달리 사두개인들은 권력지향적이었으며 유대교의 교권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그들 두 종파가 정경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구약성경의 폭이 다릅니다; 바리새인들은 구약 39권을 모두 정경으로 삼았으며 모세오경은 물론 선지서와 성문서까지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오직 모세오경만을 정경으로 삼고서 율법생활에만 충실했습니다. 이제 두 종파가 유대인들의 부활사상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바리새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일단 음부의 세계에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부활하여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게 된다고 백성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을 그대로 믿고 있는 대표적인 사람이 오늘 본문 가운데 등장하고 있는 베다니의 마르다입니다. 그녀의 부활신앙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요11:24).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사상은 그것과 다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부활이며 생명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요11:25-26). 여기서 ‘영원’이라는 말의 뜻은 ‘‘from now on”이며 그것은 믿는 그 순간부터 영원이 시작됨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살아 생전에도 부활을 맛볼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마르다를 비롯하여 나사로의 초상집에 모여있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음부의 세계에서나 나중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당장 사람들이 생활하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발생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어떻게 지금 당장 부활이 가능하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믿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영적인 창조의 능력을 잠시 선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굴 속에 안장해놓은 나사로를 살려서 자기 발로 무덤에서 걸어 나오게 만든 놀라운 사건입니다(요11:39-44). 창조주의 생기를 다시 받은 나사로는 베다니의 자기 집에서 다시 새로운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둘째로, 인간이 생각하고 있는 죽음의 의미와 예수님이 생각하고 있는 죽음의 의미가 다릅니다. 인간은 육체를 기준으로 하여 죽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육체가 죽으면 생명이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몸이 죽더라도 그 사람을 창조주 하나님이 기억하고 있는 동안은 결코 죽은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생명책에 그 이름을 기록하고 그 생애를 기억하고 있으면 비록 무덤 속에 들어가 있더라도 아직 살아있는 자입니다. 다만 잠을 자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래서 잠자고 있는 나사로를 깨우기 위하여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베다니로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요11:11-15). 같은 맥락에서 칼 바르트가 그의 ‘로마서강해’ 제8장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네가 갇혀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너는 자유롭다. 너의 죄 인식 가운데서 너는 의롭다. 너의 죽음의 인식 가운데서 너는 살아 있다. 영이 너를 자유롭게 하고 의롭게 하며 살아 있게 한다. 그것은 영이 인식이기 때문이다(Der Geist ist die Erkenntnis)”. 영은 의식의 흐름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사람을 인식하고 기억하시면 그는 영적으로 살아있는 자입니다. 비록 좁은 시공간에 갇히고 죽음의 잠을 자고 있을지라도 영생의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고 다시 살려낼 수가 있는 존재입니다. 새 영을 불어 넣어서 새로운 창조를 행할 수 있는 하나님이 성도와 함께 동행하고 있는데 사람이 자신의 죽음을 운운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을 한참이나 과소평가하고 있는 불신앙입니다. 그 점을 일찍이 시편기자가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야훼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 야훼는 자신께서 행하시는 일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시리로다”(시104:29-31).
셋째로, 사두개인들은 모세오경만을 유대교의 정경으로 삼고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오경에 근거가 없으므로 부활신앙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주장은 모세오경의 뜻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고 있는 오류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 이유는 모세가 자신의 마지막 깨달음을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네 하나님 야훼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야훼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신30:20). 야훼 하나님이 바로 사람들의 생명이 됨을 정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 바로 ‘영생의 하나님’이심을 모세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기록인 창세기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적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야훼의 이름을 불렀으며”(창21:33). 영생하시는 하나님이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기 위하여 자신의 책에 그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세가 또한 출애굽기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출32:32). 그러므로 사두개인들이 믿든지 아니 믿든지 상관없이 모세오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영생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끝으로, 영생을 얻는 방법은 창조주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에녹의 휴거 또는 엘리야의 승천으로 구약에 나타나고 있습니다(창5:24, 왕하2:11). 신약으로 오게 되면 예수님께서 새로운 방법 하나를 소개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방법은 에녹의 휴거나 엘리야의 승천과 차이가 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육체가 살아 있는 그대로 휴거되거나 승천을 했습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에 그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그러하지를 못했습니다. 그 모두가 음부의 세계에서 육체가 소멸되어버리고 만 상태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들을 천국으로 인도할 수가 있을까요? 그들 가운데 믿음의 열조들도 있습니다(창49:31, 히11:13-16). 그들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서는 부활과 승천이 필요합니다. 이제 본문에서 예수님이 베다니의 마르다에게 그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아무리 설명을 해도 완전히 믿지를 못하는 자들이 제자들이며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써 확실하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금요일 오후에 운명하시고 무덤에서 3일만에 바로 주일날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요20:1-10). 주님의 날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매주일 기념을 하지만 특별히 오늘은 부활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 그대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으니 이제 저와 우리 성도님들도 예수님처럼 복음적인 인생을 살아서 ‘부활의 열매’가 되어야만 하겠습니다(고전15:23).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성도님들의 속사람 속에 성령의 전이 건설되자마자 그 속에 임마누엘로 좌정하고 계십니다(요14:17-18, 고전6:19). 또한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들과 함께 그 성전에 거하시고 계십니다(요14:20). 그러므로 3위1체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 안에 계시는데 우리가 이 세상에서도 부활과 영생을 기뻐하며 맛보지 아니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롬8:37-39). 아무쪼록 그러한 부활의 기쁨과 영생의 즐거움이 충만한 금년 부활절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감사합니다.
“참된 안식에 들어가는 믿음의 비결”(히4:11-13)
작성자; 송원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설교일; 주후 2017년 7월 9일(주일)
성경말씀;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1-13).
1. 서언;
(1) 히브리서의 저자는 본문에서 ‘저 안식’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히4:11a). 그것은 아직 우리 성도들이 누리고 있지를 못하고 있는 안식의 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2) 성도들은 사실 놀라운 영적인 축복을 벌써 누리고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유월절 어린양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스스로 속죄의 제사를 드리시고 그 귀한 피를 저희들에게 뿌려 주셨습니다. 그 사실을 믿고 눈물로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서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죄 사함과 칭의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죄인이 의인으로 변하였으므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성령님으로 보내어 주셔서 내주 역사하게 하십니다. 이제 성도들은 성령님을 모시고 복음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로 영적인 삶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안식의 복을 누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3) 그렇지만 히브리서의 저자는 본문에서 참된 안식이 성도들에게 멀다고 하는 의미에서 ‘저 안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히4:11a). 그것이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그 말씀의 의미를 파악하고 참된 안식을 얻을 수 있는 믿음의 비결을 얻는 것이 본문을 읽고 그 뜻을 묵상하는 목적입니다.
2. 성도들이 여전히 주님의 화평함과 거룩함의 본을 온전히 따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1) 성도들이 원수와 같은 인간들에 대하여 과연 예수님처럼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라고 중보의 기도를 하고 있을까요? 그들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하여 예수님처럼 스스로 산 제물이 되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를 못합니다.
(2)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그것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영적인 예배’라고 사도 바울이 설명하고 있는데(롬12:1) 그러한 삶을 살고 있지를 못합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러한 영적인 예배인생을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성도들의 삶의 모습에 대하여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져 있다”(히4:11b)고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양은 그럴 듯하게 거룩한 백성인 것 같은데 실제적인 삶의 내용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있는 예수님의 형상이 나타나고 있지를 않습니다. 그 결과 이 세상의 모든 환난과 시험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예수님의 평강과 안식에 들어가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요16:33).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 믿음의 비결은 예수님처럼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확실하게 다시 하는 것입니다.
(3) 그 점에 대하여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이 되셔서 성도들에게 어떠한 일을 행하시고 계시는지도 인식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과 창조주이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어떠한 능력의 소유자이신지를 다시 똑똑하게 인식을 하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성도의 인식이 새롭게 변화할 때에 비로서 사도 바울처럼 주님의 종으로 살아갈 수가 있게 되며(롬1:1) 참된 안식의 복을 누릴 수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롬8:31-39).
3.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1) 성도들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서 복음사역을 마치시고 지금은 부활 승천하여 천국에 들어가셔서 아버지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고 하는 인식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것이 잘못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도 요한의 증거와 같이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요1:1-14. 히4:12a).
(2)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주관하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육신하여 사람의 아들로 살아 보셨기에 인간에 대하여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날카로운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활력 곧 생명력으로 역사하십니다(히4:12b);
1)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마치 날카로운 수술용 ‘메스’(mes, a surgeon’s knife)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 메스로 주님께서는 성도들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분해하시고 필요한 수술까지 하십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시는지 하나씩 살펴봅니다;
2) 첫째, 성도의 혼(魂)을 먼저 진단하십니다. 성도의 지식이 하나님의 일꾼으로 사용이 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필요가 없는 세상의 잡동사니로 꽉 차 있는지를 살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기도로 동의만 한다면 그것들을 복음사역에 필요한 지식과 지성으로 채우시고 필요가 없는 세상적인 욕심에 물든 지식과 지성은 수술을 하실 것입니다.
3) 둘째, 성도의 예술적인 탁월성이나 감정의 흐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피조물을 돌보고 그 생명을 살리는 것으로 성도의 예술성과 감성이 발휘될 수가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성도들의 마음의 문을 주님께서 지금도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공의를 행하며 피조물을 살리는 인생을 살아가겠다고 결심을 하고서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주님께 드리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4) 셋째, 성도의 의지가 자신의 욕망을 이루고자 불타고 있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부탁하여 자신의 자유의지의 발휘마저 선하신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해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께서 일대 수술을 행하실 것입니다.
5) 넷째, 성도의 영성이 창조주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안테나의 기능을 잘 수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훼손이 되어 있으면 영적인 문제가 심각합니다. 그러므로 인자의 영성으로 영적인 삶을 살아본 경험이 있으신 주님에게 부탁을 드려야만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과 음성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안테나가 될 수 있도록 주파수 조절을 잘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때 신앙적인 양심이 살아나며 말씀에 대한 통찰력이 생길 것입니다.
6) 다섯째, 주님께서 성도들의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신다는 대목이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왜냐하면, 뼈와 살로 구성이 되어 있는 인간의 몸체 가운데 살보다는 뼈가 훨씬 중요하기 때문입니다(창2:21).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운동과 다이어트를 통하여 살을 많이 빼거나 조절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뼈에 대해서는 그것이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살이라고 하는 것은 흙과 같은 것이지만 뼈는 흙으로 먼저 필요한 모양을 만들고 그것을 오래 불에서 구워 낸 도자기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살은 목숨이 사라지면 빨리 흙으로 돌아가지만 도자기와 같은 뼈는 수천년을 견디기도 하는 것입니다.
7) 그와 같이 단단한 뼈가 살아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관절과 골수가 그 속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관절은 마치 자동차의 베어링(bearing)과 같습니다. 그 베어링에 윤활유와 같은 것이 골수에서 공급이 되면 기계적인 작동이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골수에는 두가지가 더 들어 있습니다; ①하나는 백혈구나 적혈구와 같은 자연 항생제입니다. 그것이 병원균을 죽이며 몸을 살리고 있습니다. ②또 하나는 중요한 신경계가 골수를 통과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신경을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8) 그러한 것들은 모두 자율신경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의지가 미치지 못하고 있는 그 내밀한 부분에 대하여 주님께서 진단하시고 필요한 모든 수술을 하시며 유지보수작업을 해주십니다. 그 덕분에 건강한 육체를 지니고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입니다. 그와 같은 주님의 보호하심과 역사하심을 철저하게 인식하게 되면 성도들은 다시금 주님을 나의 주인님이라고 고백하면서 그 종으로 살아가기를 결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4. 성령님의 능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칭의의 은혜를 받게 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성령님으로 임재시켜 주십니다. 따라서 성령님께서 성도들에게 임재하여 그 심령 속에 그리고 속사람 속에 내주하여 역사하십니다. 성도의 심령 속에 내주하고 계시기 때문에 마음속의 생각을 읽고 계십니다(히4:12c). 성도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먼저 간파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성도의 속사람 속에 내주하고 계시기 때문에 내심 은밀하게 감추고 있는 뜻까지 판단을 하십니다(히4:12d). 따라서 성도들이 성령님을 속이고 가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5. 창조주이신 여호와의 전능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므로 태초에 천지와 만물 그리고 사람까지 모두 창조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창조의 행위를 계속하십니다. 모든 피조물을 돌보시고 그 생명을 살리시며 필요한 창조를 계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피조세계를 돌보고 그 생명을 살리는데 있어서 사람들을 청지기로 사용하십니다(창1:26-27);
(1) 특히 사랑하는 성도들을 종으로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점검하시고 때가 되면 중간결산을 하십니다(히4:13b). 그와 같은 사실을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농부의 비유”(마21:33-46, 막12:1-12, 눅20:9-18)와 “달란트의 비유”(마25:14-30, 또는 ‘므나의 비유’ 눅19:11-27) 등으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주 그러한 사실을 잊어버리고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2) 더구나 사람들을 속일 수만 있다면 하나님의 눈도 피할 수가 있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원죄의 유전에 해당이 됩니다. 왜냐하면, 아담부부의 장남인 가인이 그와 같이 생각하고서 완전범죄를 도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창4:8-9). 그는 동생 아벨을 시기하여 살해합니다. 아무도 보지 아니하는 들판으로 불러내어 암살을 하고 그 시신을 땅에 묻어 버린 것입니다.
(3) 그러나 그의 범죄는 백일하에 드러나게 됩니다. 그 이유는 땅에 떨어진 동생 아벨의 무죄한 피가 자신의 억울함을 창조주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창4:10). 그리고 그 피를 받아 마시게 된 땅도 견딜 수가 없어서 창조주 여호와에게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창4:11). 따라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히4:13a).
6. 결론; 이제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함으로써 저 안식의 복을 누려야 할 때입니다;
(1)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에 의하여 어떻게 투시가 되고 감찰이 되고 있으며 그 인생의 결과에 의하여 어떠한 결산을 해야만 하는지를 알게 되면 자신의 인생이라고 하여 함부로 살아갈 수가 없게 됩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제자로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기를 원하고 있는 성도들은 자신이 주님의 종이라고 하는 사실을 언제나 명심해야만 합니다.
(2) 그러므로 시간을 정하여 전적으로 말씀의 묵상과 기도 가운데 자신의 주인이신 주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뜻을 들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온전히 예수님처럼 세상을 이기고 살아갈 수 있도록 자신과 자신의 환경을 모두 고쳐 달라고 간구를 해야만 합니다. 그리하여야 성도에 대한 수술이 가능해지고 환경의 변화가 나타날 것입니다. 아무쪼록 그러한 믿음생활로 참된 안식을 누리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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