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바 사바 사바하(손진길 소설)

사바 사바 사바하15(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2. 4. 1. 03:11

사바 사바 사바하15(손진길 소설)

 

서기 1997년말에 정종수가 검사생활을 완전히 접고 서울에서 고향인 경주로 내려온다. 그는 변호사 사무실을 시내중심지에 열고 경주시민들과 함께 울고 웃는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정종수 변호사는 경주에서 크게 돈을 벌려고 생각하지는 아니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고향에서 인심을 얻어서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고자 속으로 결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종수는 장차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는 경우 다음과 같이 몇가지 점에서 자신에게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첫째로, 정종수는 경주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경주에서 한식당을 경영하고 있는 정한모 부부에게 입양되어 경주에서 국민학교까지 다닌 사람이다. 그러므로 국민학교 시절의 친구 가운데 경주에 남아 있는 자들의 도움을 받을 수가 있다. 그리고 부모님을 알고 있는 친지들 가운데 경주에서 살고 있는 분들의 도움도 받을 수가 있다.

둘째로, 1980년부터 1985년까지 6년간 정종수가 경주지청에서 검사로 일했다. 그러므로 자신을 알고 있는 지인들이 상당히 많은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 시절에 그는 경주 유지 집안의 딸인 이세경과 결혼을 했다. 따라서 처가 집안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내가 계속 경주의 여중에서 교사로 근무했기에 아내를 알고 있는 경주사람들의 도움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셋째로, 변호사라고 하는 직업이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직종이다. 따라서 정종수 변호사는 최대한 경주시민들의 편의를 보아주고자 작심하고 있다. 그것이 표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넷째로, 경주라고 하는 지역은 아주 보수적이며 역사적인 도시이다. 1962년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실시되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경주는 경북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였다. 대구 다음이 바로 경주이다. 따라서 대구에 자리잡고 있는 경상북도청을 옮긴다고 한다면 제일의 후보지가 경주시가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경상도라고 하는 영남지방을 일컫는 말도 본래 경주와 상주의 머리글자를 따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와 같은 사실을 말하면서 경주사람들은 언제나 천년 신라의 고도인 서라벌 경주가 당연히 경상도의 중심이라고 하는 강한 자부심을 여전히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경주의 특성 때문에 신라왕국을 시작한 신라6촌의 후손들이 경주에 많이 살고 있으며 그들의 영향력이 정치판에서 강하다. 구체적으로 경주 이씨, 최씨, 손씨, 정씨, 배씨, 설씨 등이 그들이다. 그 가운데 다행스럽게도 정종수의 경주 정씨가 들어 있다. 그러므로 정종수 변호사가 경주에서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는 경우 일가들의 지지를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다섯째로, 정종수는 부모님이 오랜 세월 한식당을 성공적으로 경영하여 재산을 좀 모으고 있다. 그는 집안의 독자이다. 그러므로 선거운동을 위하여 부모님의 재정적인 지원을 받을 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아내가 1985년에 부친의 별세로 친정의 많은 재산을 상속했다. 그녀가 고향 경주에서 남편 정종수가 출마하여 국회의원이 되어 서울 여의도로 입성하기를 바라면서 재정지원을 약속하고 있다. 참으로 든든한 후원자인 셈이다.  

그와 같은 다섯가지의 장점을 정종수 변호사가 평소에 인식하고 있으며 때로는 경주에서 친구들에게 은근히 말하고 있다. 따라서 실제로 훗날에 정당공천을 희망할 때에 정종수가 그 내용을 자세하게 기록하기도 한다.

그런데 정종수 변호사가 경주에서 민심을 얻기 위하여 내밀하게 활동하고 있을 때에 정치적으로 깨닫게 되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정종수 자신보다 만약 죽마고우인 우창윤이 경주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한다고 하면 더 승산이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두가지이다; 하나는, 우창윤은 고향인 경주에서 국민학교 뿐만 아니라 중고등학교까지 다닌 인물이다. 따라서 학연이 넓은 것이다. 또 하나는, 경주사람들이 우창윤이야 말로 경주가 낳은 대단히 뛰어난 인물이라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가 경주에서도 2류라고 여겨지고 있는 종합고등학교에서 곧바로 서울대 법대에 합격한 엄청난 천재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사실을 인지하게 된 정종수가 서울 부모님 집에 간 걸음에 친구인 우창윤을 만나서 몇 번이나 은근히 물어보고 있다; “창윤아, 너는 고향인 경주에서 한번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생각이 없니? 네가 그런 생각이 있다고 하면 내가 적극 지지해줄 수가 있다… “.

그때마다 한결같이 우창윤이 다음과 같이 확실하게 자신의 결심을 밝히고 있다; “말은 고맙지만 나는 사양한다. 왜냐하면, 나는 국제변호사와 세무변호사로서 크게 성공하여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정치에는 아예 관심이 없다! 그렇지만 종수 네가 출마한다면 나도 고향사람들에게 지지를 호소할 수는 있다“.  

한편, 정종수는 변호사로 경주에서 일하면서 되도록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생각을 읽고자 노력하고 있다. 민심을 알아야 훗날 표를 모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입장에서 그는 19932월 하순부터 19982월 하순까지의 김영삼 정권에 대하여 그 성공과 실패를 예리하게 분석하고 있다.

정종수의 생각이 다음과 같다; “김영삼 대통령이 군부의 사조직인 하나회를 해체하고 고위공직자의 재산을 등록시키며 금융실명제를 추진하는 등 민주주의 기반조성에 있어서는 크게 진일보하고 있다. 하지만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199712월에 맞이하고 있는 외환위기와 소위 IMF사태가 그것이다”;

게다가 경주사람인 정종수가 느끼고 있는 측면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김영삼 정권이 인재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매우 협소하다는 것이다. 그는 철저하게 지역적인 기반을 부산과 경남에 한정하고 있다. 대구와 경북을 홀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TK를 외면하고 있는 PK정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IMF사태가 집권말기에 터져버렸기 때문에 김영삼 정권이 야당인 김대중 정권으로 교체가 되고 만다. 따라서 19982월 하순부터는 김대중 대통령의 집권이 시작된다. 그런데 경주의 변호사이며 장차 국회의원에 입후보하려는 정종수가 보기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치세가 경상도 중의 경상도인 경주사람들에게는 매우 부정적이다.

그 합리적인 이유가 다음과 같다;

첫째, 고위직에 호남인재를 너무 많이 등용하고 있다. 김대중은 4번이나 한국에서 대통령선거를 치루고 드디어 당선된 인물이다. 따라서 출신지역인 호남인들에게 엄청난 재정적인 빚을 지고 있다;

그 때문에 대통령이 임명할 수 있는 고위직 3천개의 대부분을 호남인으로 채우고 있다. 게다가 공직자의 승진 및 보직인사에 있어서도 호남인 우대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그만큼 호남 이외의 출신들은 불이익을 받고 있는 것이다.

둘째, IMF사태를 해결하는 방법의 부작용이 심각하다. 한국의 주요 금융과 재벌들의 주식을 국제펀드에 넘겨서 외국인들이 실제 소유주가 되고 있다. 그리고 고금리 차관을 들여와서 국민들에게 카드 빚을 엄청나게 지우고 있다.

그것이 일시적인 경제위기의 탈출일 수는 있지만 결국에는 한국의 경제가 완전히 외국펀드에 종속되는 불행을 초래한다. 요컨대, 한국이 자본선진국의 경제식민지가 되는 시발점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한 심각한 후유증을 남기는 방향으로 김대중 정권이 나아가자 정종수는 고향에서 야당에 가입하여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20004월에 실시가 되는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정종수 변호사는 제1야당인 한나라당 후보심사에서 2등을 하게 된다;

이제 조금만 노력하면 다음 번 총선에서는 한나라당의 국회의원 후보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정종수는 20044월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그의 소원대로 제1야당인 한나라당의 후보가 되고 경주 출신 국회의원으로 당선이 된다.

그가 여의도에 입성하자 경주에서 크게 멀지 아니한 포항 영일군 출신 5선 의원이며 당의 원로인 이상득으로부터 축하의 화분까지 받게 된다. 이상득 다선의원은 정종수가 한나라당 후보가 되는데 도움을 준 인물이다.

왜냐하면, 정종수가 2004년초에 공천서류를 중앙당에 제출하였을 때에 그가 사무총장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상득 의원의 동생인 이명박이 당시 서울시장이다. 물론 2004년 당시의 한국대통령은 김대중의 뒤를 잇고 있는 경남 김해 출신인 노무현이다.

정종수가 17대 국회의원으로 재직하고 있는 20044월부터 20084월 사이에 그의 주변에서 큰 변화가 3가지나 발생한다; 첫째, 이상득 5선의원이 20064월부터 국회부의장이 되고 있다. 둘째, 이명박 서울시장이 2007년말 대통령선거에서 당선이 된다. 이상득 국회부의장의 동생인 이명박이 2008225일부터 대통령 임기를 시작하고 있다;

셋째, 그에 따라 이상득 부의장의 권고로 초선의원인 정종수가 감히 20084월에 실시되는 총선에 여당의 국회의원 입후보자를 심사하는데 있어서 실무책임자 2인 가운데 한사람이 되고 있다. 그것은 엄청난 출세로 보이지만 사실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그 당시 초선의원에 불과한 정종수는 그 칼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며 그 칼을 잘못 휘두르게 되면 자신이 그 칼날에 베이게 된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저 자신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주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과 그 형인 이상득 부회장의 신임이 고마웠을 따름이다.  

그러나 그 결과가 참혹하다. 보통 5명 정도가 국회의원 입후보를 하겠다고 서류를 제출하면 그것을 엄격하게 심사하여 한사람의 후보자를 가려내게 된다. 그 명단을 실무선에서 당수에게 올리게 된다. 그 결과 나머지 4명은 당의 후보에서 탈락하게 된다. 그들 탈락자들의 원성이 자자하다.

그 결과 공천심사에 있어서 실무책임자로 참여한 의원은 다음 번 총선에서 적들이 많이 생겨 엄청 불리하게 된다. 그 영향이 곧바로 직격탄이 되어 정종수에게 밀어닥치고 있다. 그는 18대 국회의원에 여당의 후보로 출마하지만 후보 탈락자들이 만든 친박연대의 집중포화를 받고서 그만 국회의원선거에서 낙선하고 마는 것이다.

참으로 정종수의 정치인생에 있어서는 불행한 일이다. 그는 정치적인 권력을 얻기 위하여 사바사바를 하고 줄기찬 노력을 경주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과 이상득 부의장을 너무 일찍 만나 그들의 손발 노릇을 하다가 그만 재선에 실패하고 만 것이다.

그러한 뼈아픈 경험을 하고 있는 정종수 변호사는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가 개인적인 친분관계의 형성으로 얼마든지 정치적으로 출세할 수가 있다고 믿고 있는데 그것은 그의 순진무구한 사고방식으로서 그저 사바사바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것은 단지 세속적인 이익관계로 뭉친 끼리끼리 문화의 산물인 사바사바일 뿐 결코 그 다음 단계의 깨달음인 만사가 원만하게 성취가 되는 높은 정신적인 수준의 사바하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사바하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정신적인 구원이 가능한데 그것을 훗날 정종수는 어떻게 얻고서 마음의 평안을 회복하게 되는 것일까?...

국회의원 선거는 한국에서 4년마다 있게 된다. 그러므로 한번 낙선하게 되면 다음 4년후를 기다리게 된다. 그때 다시 정당의 공천을 얻고자 얼마나 거리에서 헤매게 되는지 모른다. 공천탈락이 거듭되면 결국에는 4년마다 도지는 심각한 마음의 병을 얻게 된다;

그만큼 정치는 일종의 마약과 같은 것이다. 정종수가 그 불치의 병을 어떻게 정신적으로 치유하게 되는 것인지 사실은 그것이 궁금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