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거지 나사로
(1) 거지 나사로는 예수님의 비유, “부자와 나사로”(눅16:19-31) 이야기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이다. 나사로가 맡은 역할은 “헌데를 앓으며 한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연명하다가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눅16:20-22). 그러므로 나사로는 이 땅에서 지체장애자요 병자이며 거지로 살 수 밖에 없는 자이다. 그런데 그가 죽어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품으로 돌아갔다(눅16:23).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나사로는 이 땅에서 별로 한 일이 없다. 남에게 베풀거나 끼친 유익이 전혀 없다. 그 인생이 너무 무의미하다. 그런데 어찌하여 예수님이 그를 아브라함이 있는 천국에 들어갔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일까?(눅13:28).
(2) 거지 나사로의 인생을 평가하시는 하나님의 시각은 무엇일까? 그 시각은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는 “여호와의 종”의 모습 가운데 담겨져 있다(사53:2-8).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거지 나사로는 두 가지 큰 유익을 부자에게 끼치고 있다. 첫째는 부자에게 이 땅에서 부자가 누리고 있는 복과 거지 나사로가 당하고 있는 비천함과를 대조해보라고 그 기회를 제공하고 있었다. 공의의 하나님이 부자에게 넘치는 복을 주고 나사로에게는 욥의 경우보다(욥2:7-9) 더 심한 비참함을 주시고 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스스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복과 저주를 주시는 하나님의 기준은 무엇일까? 나는 부자의 복을 받고 계속 누릴만한 자격이 있는 것인가? 스스로 자문해보도록 거지 나사로는 오늘도 우리들의 대문앞에 자리잡고서 무언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유익은 거지 나사로가 짊어지고 있는 저주와 비참함이 바로 부자가 누리고 있는 축복과 풍요로움의 반대급부인 것을 깨닫기만 한다면 함께 살고 함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이른바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은” 세상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창1:31).
(3) 예수님이 말씀하신 수많은 비유 가운데 의사 누가는 왜 거지 나사로 이야기를 독점적으로 선택하여 그의 복음서에 실고 있는 것일까? 누가는 헬라파 유대인으로서 외국에서 헬라 철학과 학문을 많이 공부하였으며 의사 공부까지 하여 과학적인 분석에도 일가견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초대 교회시절 예수님의 행적과 사도들의 활약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헬라 세계와 로마 제국의 유력 인사들에게 알려주는 역할까지 수행할 수 있었다(눅1:1-4, 행1:1-5). 이 과정에서 그가 중시하였던 예수 그리스도의 사상은 “거지 나사로와 부자와의 이야기”속에 함축되어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 하면, 거지 나사로와 부자와의 대조적인 삶의 모습 가운데에는 묘하게도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공의와 사랑이 알기쉽게 공평과 구원이라는 모습으로 담겨져있었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고난받는 종 거지 나사로이지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인정하고 그 품에 거두어들일만한 축복받은 인생이었다. 그 반면에 이 땅에서 호의호식했던 부자는 죽어서 불구덩이에 던져질 수 밖에 없는 저주스러운 인생살이였던 것이다. 한 마디로, 영과 육의 대비가 뚜렷하며 그 사이에 균형 감각이 탁월한 비유였다. 부자가 호의호식하는 만큼 나사로가 헐벗고 굶주렸으며 부자가 건강한 만큼 나사로가 종기를 앓았으며 부자가 유람을 즐기는 만큼 나사로는 대문앞에서 계속 누워있어야만 했었다. 이와 같은 상호의존관계가 있슴을 인정할 때 복음적인 삶, 창조적인 삶, 플러스섬(plus sum)적인 삶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4) 그렇지만 부자에게도 아직 희망은 있었다. 그는 거지 나사로를 멀리 쫓아보내지 아니하고 그래도 대문앞에 그대로 두었던 것이다. 따라서 대문을 출입하면서 무엇인가 경고도 받고 양심의 찔림도 받았던 것이다. 그가 조금만 더 영적으로 민감했거나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구원의 기회가 일찍 찾아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거지 나사로의 일생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가르치심은 무엇보다도 대문밖의 거지 나사로와 같은 소위 ‘소외받은 자’들을 관심영역밖으로 밀어내지 말고 함께 공존공영하는 방법을 모색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거지 나사로가 바로 그 신세를 갚아야만 하는 여호와의 종으로서의 모습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눈물겹게 다가올 때를 기대해보라는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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