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마르다
(1) 마르다는 베다니에 살고 있었으며 마리아의 언니이다. 그녀의 이름(Martha)은 “여주인”이라는 뜻이다. 젊은 처녀가 왜 ‘여주인’으로 불리고 있었을까? 그것은 그녀가 일찍부터 민박집을 경영하는 여주인 역할을 했기때문으로 보인다. 마르다의 집은 예루살렘 동편 외곽이며 요단 강으로 통하는 길목이었기에 여행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하였다. 그리고 부모님이 일찍 타계하였기에 맏딸인 마르다가 부모님을 대신하여 그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마르다는 먹고사는 일에 그리고 손님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일에 늘 바빴다. 그런데 그녀의 여동생인 마리아는 평소에 언니를 잘 돕다가도 예수님일행만 당도하면 그들의 이야기를 듣느라고 부억에는 들어오지도 아니했다. 하루는 마르다가 예수님께 부탁했다. “마리아를 좀 부억으로 보내어 주십시오”(눅10:38-40). 그렇지만 보기좋게 거절당했다. 부활과 영생의 말씀을 듣고 중생의 삶을 사는 것이 먹고사는 일상사로 분주한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뒤따랐다(눅10:41-42). 마르다는 그 말씀에 당장은 동의할 수가 없었다.
(2) 마르다의 생각에 큰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첫 번째 변화는 오라비 나사로의 사건과 관련되어 나타났다. 나사로가 큰 병에 걸려서 위독했을 때 마르다는 요단 강 건너편에 계시는 예수님께 인편으로 급히 도움을 청했다(요11:3). 그러나 예수님이 여러 날후에 나타나셨다. 나사로가 무덤속으로 들어간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요11:17). 마르다는 그 때 손님 접대일을 제쳐두고 동네 어귀로 뛰어나가 예수님께 부탁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아니하였겠나이다. 이제라도 하나님께 무엇이든지 부탁해주십시오”(요11:21-22). 마르다가 원한 것은 당장 살려달라는 것이 아니라 종말의 때에 하나님 나라에서 부활 영생할 수 있도록 복빌어 달라는 것이었다(요11:24). 예수님께서는 이와같은 미래형 믿음을 보시고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의 오라비가 죽었지만 이제 다시 사는 모습을 보여주겠다. 이것을 보고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는 부활과 영생의 신앙을 현재형 믿음으로 당장 가지기 바란다”(요11:25-26). 그래도 마르다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요11:27)라고 여전히 미래형으로 하나님 아들의 권능에 대한 고백을 되풀이했다. 이것은 베드로의 현재형 신앙고백과 다른 것이었다(마16:16). 그렇지만 막상 오라비가 무덤속에서 다시살아 제 발로 걸어나왔을 때 마르다의 생각도 현재형으로 변하기 시작했다(요11:43-44). 그리고 현재형 믿음가운데 마르다의 집에서는 축제와 잔치가 있었다(요12:1-2, 막2:19-20). 요컨대, 오빠 나사로의 되살아남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직접 보여주신 계시와 가르치심은 일찌기 사도 베드로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계시적 가르침과 동일한 성격의 것이었다(요11:25-26, 마16:18).
(3) 두 번째 변화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하게 됨에따라 나타났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게 되었을 때 갈릴리에서 오신 예수님의 친지들을 모시고서 골고다 현장까지 예루살렘의 성도들과 함께 동행한 것으로 보인다(막15:41). 일찌기 예수님께 자신의 향유를 부어 그 분의 장례준비를 미리한 바 있는 동생 마리아에게 베다니 집안일을 맡겨두고서 마르다가 직접 예루살렘으로 나선 것으로 추정된다. 마르다의 이와같은 변화를 눈치채기라도 하셨는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다니를 중시하셨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직전에 갈릴리에서 베다니에 들리셨으며 베다니앞에서 승천하셨다(눅24:50-51). 이 때문에 마르다의 부활 신앙은 완전히 현재형으로 자리를 잡았다. 부활과 영생은 믿음안에서 ‘이미’(already) 이루어진 것이었다. 다만 자신에게 남은 삶이 있기에 육체적 종말을 고하는 그 때에 실제적으로 적용되어질 따름이다. 살아 생전에는 육체적으로 ‘아직’(not yet)이지만 그것이 큰 장애가 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마르다는 열 일을 제쳐두고 예루살렘초대교회에 동참했다. 그 후 베다니 자신의 집에 ‘가정교회’(house church)를 세운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마르다 형제의 활동상이 기록으로 남아있지는 아니한다. 그 이유는 마르다와 같은 본토 유대인 출신 그것도 여성 제자들의 활약이 주로 요단강 강변길을 따라 이루어진데 비해서 누가, 마가, 바나바, 실라, 바울 등과 같은 헬라파 유대인출신 기독교인들의 활약이 지중해 해변길을 따라서 이루어졌으며 그것이 이방선교에 있어 더욱 두드러졌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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