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세례 요한
(1) 세례 요한의 출생은 특이했다. 우선 그 가문부터가 심상하지 아니하다. 정통 레위 집안이었다. 옛날 다윗 왕조를 지탱하고 예루살렘 성전 제사를 책임지고 있었던 바로 그 가문이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나라가 완전히 사라지고 이웃 에돔 출신인 헤롯 왕가와 로마 총독이 그들을 다스리고 있었던 BC 1세기에도 그 가문의 후손인 제사장 사가랴와 그의 부인 엘리사벳(눅1:5, 초대 대제사장 아론의 직계 후손)은 여전히 백성들의 영적 지도자이었으며 하나님 보시기에 의인들이었다(눅1:6). 하나님은 이들에게 다시 한 가지 책무를 부여하고 계셨다. 그것은 다윗의 자손인 메시아가 그 땅에 나타나는 날 백성들에게 그를 소개하고 또한 보좌하는 역할이었던 것이다(눅1:67-79). 이와같이 중차대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능력의 아들을 제사장 사가랴 부부에게 태어나도록 하나님이 조치하시었다. 따라서 그 아들은 그 때까지 자식을 생산하지 못하고 쓸쓸하게 노년을 맞이하고 있었던 사가랴 부부에게(눅1:7,18)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적으로 수태되었다(눅1:24). 그리고 그 아들에게는 출생에 대한 예언과 더불어(눅1:13c, 19) 그 이름의 내정(눅1:13d, 60), 성령충만의 약속(눅1:15), 다시오는 엘리야로서의 임무(눅1:17, 마17:10) 등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미 부여되고 있었다.
(2) 세례 요한은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과 역할을 온전히 수행한 사람이었다. 그의 사명은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하는 선지자의 사명”이었다(눅1:16). 그런데 그의 선지자 사명은 두 가지 특이성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로, 구약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 이후 중간 시대 430년을 지나서 드디어 등장하는 신약 최초의 선지자이다. 둘째로, 선지자 사명이 태어나기 전부터 부여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다시 오는 엘리야”로서 메시아를 이 세상에 소개하는 길잡이 역할을 담당해야하기 때문이었다(눅1:17, 말4:5-6, 마17:10-13). 세례 요한은 이 역할에 충실했다. 길잡이가 주인의 영광을(요3:31) 가로채거나 자신이 우쭐거려서는 결코 안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어 전령의 임무를 완수하고서는 극적으로 사라지게 되는 “소리와 그림자” 역할에 만족했다(눅3:2-6, 16, 요3:28-30).
(3) 세례 요한은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가 요단강에서 예수에게 세례를 주었을 때 그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임을 알게 되었다(마3:14,17). 그렇지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다음 행적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요한은 예수의 행적을 계속 살펴봄으로써 그가 확실하게 메시아인지를 거듭 확인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는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자하는 신중한 선지자였다. 그는 메시아가 “성령과 불로써 세례를 주는 자”, 곧 능력있는 여호와의 종임을 잘 알고 있었다(마3:11-12). 그래서 그는 예수가 확실한 메시아이면 그를 통하여 구원의 성령과 심판의 불, 이 두 가지 하나님의 능력이 조만간 드러날 것임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요한의 기대와는 달리 예수는 당장 강력한 역사를 속시원하게 보여주고 있지 아니했다. 그러므로 요한은 실례를 무릅쓰고서 신중하게 예수에게 재차 질문했다(마11:3); “다시 강력한 심판주 메시아를 기다려야만 하는가? 아니면 당신 예수가 그 일을 이제부터 보여주실 것인가?”. 이와같은 요한의 질문속에는 애타게 그리스도의 때 보기를 간구하면서 자신 인생 모두를 걸고 있는 선지자다운 면모를 여실히 엿볼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마11:11a).
(4) 그러나 세례 요한은 동시에 천국에서 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게 되고 말았다(마11:11b). 예수님의 이 말씀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이 되어진다. 첫째는 세례 요한이 구약적인 선지자의 정신에 입각하여 분봉왕 헤롯의 잘못을 그 면전에서 질책하다가 옥에 갇히고 마침내 목베임을 당하게 된 경우를 염두에 둔 해석이다(마14:3-12). 사회적인 정의구현이 옳기는 하지만 상대의 개과천선이 근본적으로 이루어지지 아니하면 그 효과가 그리 크지 아니함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인 것이다. 둘째는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과 성령강림의 시대를 보지 못하고 죽었기에 그만 부활 신앙을 확실히 얻지 못하여 천국에서 극히 작은 자가 되고 말았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공생애 기간중 그리스도가 하신 일이 모두 중요하기는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인류 구원에의 공헌은 십자가 죽음과 그의 부활 승천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을 본 자가 성령의 능력을 받아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고자 나섰을 때 그 앞 길을 막을 자는 이 세상에서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선례 가운데 숨겨져 있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이미 보고서 믿음으로 간직하고 있는 자는 이 때를 보지 못하고 일찍 눈을 감았던 세례 요한보다 더 강력한 하나님의 일꾼일 수 밖에 없다. 또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가르침을 예수님이 이 말씀속에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같은 의미에서 세례 요한은 구약의 선지자와 신약의 예수님 제자 사이, 그 중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오심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그 삶으로 증언해주고 있는 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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