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76강(요8:17-20)(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3. 28. 07:04

요한복음 강해 제76(8:17-20)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65()

 

하나님이 예수님의 아버지이며 예수님의 증거자가 되고 있다는 사실은 장차 어떻게 알 수 있게 되는가?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두 가지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이신 독생자가 창조주의 영광을 가지고 이 세상에 왔는데 그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과 인성이 함께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둘째,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바로 이 세상, 곧 만민과 만물을 구원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성육신, 공생애, 대속의 십자가 죽음, 무덤 속 부활, 승천, 보혜사 성령님의 강림, 그리고 재림의 약속 등이 있습니다. 여기서 본문의 질문과 관련이 되는 대목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 가르치심이 진리라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사건이 바로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님의 강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창조주 하나님이시기에 죽어서 무덤 속에 안장이 되어 있는 그의 아들을 다시 그 전능하신 창조의 능력으로 부활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들 예수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복음을 전한 것이기에 그 공로로 승천을 시켜서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 오른 쪽에 좌정하게 합니다. 그곳은 모든 피조물의 찬송을 받는 영광스러운 자리입니다(5:13). 동시에 예수님의 구원사업을 계승하기 위하여 진리의 성령님이 이 세상에 오시는 것입니다. 이제 보혜사 성령님이 성도들의 심령 속에 내주하시고 예수님의 말씀과 생애가 진리임을 증거해줄 것입니다. 그리하면 생명의 빛이 계속 성도들의 삶을 영생으로 인도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성도들이 구원과 영생을 맛볼 수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어두움의 세력이 빛을 이길 수가 없으며(1:5) 둘째, 죽음의 세력이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주시는 영원한 생명의 힘을 이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5:28-29). 사도 요한의 복음서 전체를 통하여 그렇게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유대인들이 당장 예수님에게 자신의 말이 진리라는 사실을 입증하라고 강박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쩔 수 없이 다음과 같은 추상적인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 율법에는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 기록되었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느니라. 이에 그들이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함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8:17-20). 예수님의 답변의 요지는 창조주 하나님이 그의 아버지로서 자신과 함께 거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아버지와 보이는 아들이 시공간을 같이하여 함께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영적인 신성과 육적인 인성을 예수 그리스도가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성경인 히브리 정경을 살펴보면, 창조주가 인간인 선지자를 아들로 삼아서 평생 동안 동행을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사람으로 기름을 부으면 성령이 강림하여 한시적으로 그 능력을 행했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창조주를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으며 자신이 아버지께로부터 이 세상에 왔다고 큰 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시도 떨어지지 아니하고 아버지가 영적으로 아들과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창조주가 함께하고 있으므로 자신은 복음이 진리임을 증거하기 위하여 별도의 사람을 증인으로 내세울 필요조차 없다고 강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유대인들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저 미치광이의 말로 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이상한 말을 근거로 하여 나사렛 예수를 체포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대사건이 예루살렘 동쪽 오리 길에 있는 베다니에서 발생을 하게 됩니다. 나사렛 예수가 무덤 속에 들어간 지 나흘이나 되는 사람을 무덤에서 되살려내게 됩니다(11:17, 43-44). 이상한 이야기가 아니고 영적인 생명의 능력이 함께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미치광이가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고 있는 메시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메시아가 로마를 물리치고 다윗의 제국을 다시 세우는 선민들의 바람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민구원을 위하여 가이사(로마의 황제)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드리면 된다”(22:21)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처구니가 없게도 정종분리’(政宗分離, 정치와 종교의 분리)의 원칙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대대로 신정국가(神政國家)에서 살아온 백성들입니다. 비록 그들의 나라가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없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다스림을 율법적으로 느끼면서 그 준수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로마황제의 명령보다 율법의 준수가 우선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선민의 나라를 회복하지 아니하고 선민과 이방인이 모두 평화를 누리는 꿈 같은 하나님의 나라를 설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쟁을 반대하면서 로마황제의 통치를 용인하고 있습니다. 도저히 그냥 둘 수가 없습니다. 백성들이 그러한 궤변에 동조하기 전에 격리를 시키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장차 그러한 수순으로 상황이 전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까지 그리고 부활과 승천이 이루어질 때까지 예수님의 말씀은 여전히 현실감이 없으며 애매할 수밖에 없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