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73강(요8:1-7)(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3. 26. 19:32

요한복음 강해 제73(8:1-7)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62(주일오후)

 

베다니와 예루살렘 사이(8:1-2)

 

베다니와 예루살렘 사이에는 감람 산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성전에서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 후 예수님은 감람 산을 넘어서 베다니의 숙소로 돌아가고 있습니다(8:1). 그 이유는 대표적인 소비도시인 예루살렘에서 잠을 자기에는 방값이 너무 비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다니에서 일박을 한 다음날 새벽 일찍 다시 예루살렘으로 떠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두 도시 사이의 거리에 대해서 사도 요한은 가깝기가 한 오리쯤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1:18). 그 정도 거리라면 걸어서 30분 남짓일 것입니다. 보통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상경하는 순례객들은 요단 강변 길을 타고서 남행을 합니다. 그리고 사해 북쪽에 있는 요단 강을 건너서 여리고로 들어옵니다.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통하는 협곡을 따라서 서남진을 하게 되면 먼저 만나는 근교도시가 베다니입니다. 그곳이 바로 가난한 여행객들의 숙소가 있는 곳입니다. 순례자들은 그곳에서 숙식을 해결한 다음날 새벽 일찍 감람 산을 넘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볼일을 보고 나서 어두워지기 전에 다시 감람 산을 넘어서 베다니의 숙소로 돌아와야만 합니다. 예수님 일행에게 있어서도 그 일은 익숙합니다. 그들은 주로 베다니의 나사로의 집에서 숙식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나사로와 나사렛 예수는 거의 동년배로 보입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11:11)라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사로의 막내 여동생인 마리아와 사도 요한도 동무 사이로 보입니다. 사도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서 유달리 베다니의 마리아의 행적을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그녀가 자신의 옥합을 깨고서 예수님에게 향유를 붓고 있는 대목을 사도 요한만이 대서특필하고 있을 정도입니다(11:2, 12:1-3). 예수님이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린 곳도 베다니입니다(11:1, 43-44).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40일 후에 승천하신 장소도 베다니입니다(24:50-53).

 

율법 적용에 있어서의 문제점(8:3-5)

 

율법의 적용은 공정해야만 합니다(1:16, 25:15). 예를 들면, 간음을 하고 있는 자를 율법으로 다스릴 때에는 당사자 두 사람을 모두 체포하여 공정하게 재판을 해야만 합니다(20:10). 돌로 때려 죽일 때에도 간부와 음부를 모두 처형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음행 중에 잡힌 여자만을 예수님 앞에 끌고 왔습니다(8:3). 행위 당사자 중의 한 사람인 간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습니다. 그와 같이 율법을 편파적으로 적용하고 있는 자들이 유대교의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정치적인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편파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취지나 율법의 원리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을 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들 종교생활의 한계이며 유대교의 비극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기 위한 율법은 선민이거나 이방인이거나 구별과 차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 아래에서는 공평합니다. 구원과 영생을 얻는 방법에 대해서도 차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선민우월주의에 깊이 물들어 있습니다. 선민만이 구원의 대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진노의 자식들이라고 예단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을 대속하기 위하여 제사를 드려야만 하는 제사장 나라 이스라엘이 본분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19:5-6). 그들은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조차 금기시하고 있습니다. 변방 갈릴리의 선지자 요나를 하나님께서 앗수르의 대도시 니느웨로 보낼 때에도 그는 그 사명을 감당하지 아니하려고 도망을 쳤습니다(1:3). 그것이 삐뚤어진 선민들의 사고방식입니다. 지금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터무니 없이 율법을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음부만을 데리고 와서 모세의 율법조항대로 판결을 하고 처벌을 명하라고 합니다(8:3-5). 예수님이 그들의 문제점을 꿰뚫고 있습니다. 그래서 몸을 굽혀서 바야흐로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적기 시작하고 있습니다(8:6).

 

율법은 누구를 비추는 거울인가?(8:6-7)

 

  율법에 비추어보면 무엇이 죄인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3:20). 율법조항에 자신의 행위를 비추어보면, 금방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게 됩니다(8:7).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 율법이라는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본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의 잘못된 행위만을 발견하여 그 율법이라는 거울에 비추어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땅에다 글을 적고 있습니다(8:6) 간음 중인 여인을 잡아서 끌고 온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행위를 율법에 비추어보고 있는 중입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8:7). 그 글자들이 살아서 유대인들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입니다. 율법이 살아서 그 빛을 발하자 그 앞에 설 수 있는 의로운 자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 증명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8: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