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72강(요7:45-52)(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3. 25. 20:48

요한복음 강해 제72(7:45-52)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62(주일새벽)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7:45)

 

유대교의 최고기관은 예루살렘에 있는 산헤드린 공회입니다. 예수님 당시 비록 유대인들의 나라가 망하고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산헤드린 공회가 여전히 종교적인 힘을 유다의 백성들에게 미치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도 로마제국의 승인을 얻어서 계속 존속하고 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70명 남짓한 장로들로 구성이 되고 있는데 다수파가 사두개인들이고 소수파가 바리새인들로 보입니다. 사두개인들은 모세의 오경만을 믿고 있으며 외세와 협력하여 자신들의 종교적인 기득권을 유지하는데 신경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반면에 소수파인 바리새인들은 히브리 정경 39권을 모두 믿고 있으며 오랜 세월 말씀을 연구하여 주석을 만들고 그들의 해석을 교리화하여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경건하고 신령한 랍비들입니다. 그리고 율법의 준수에 있어서도 백성들의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일주일에 이틀을 금식합니다(18:12). 선민사상이 투철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가장 의로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10:3). 그러하기에 평소 백성들에게 자신들을 본받으라고 외치고 있는 자들입니다(23:15). 그들은 많은 유대인 젊은이들에게 히브리 사상과 히브리 성경을 가르치고 있습니다(22:3). 젊은 랍비들을 많이 양산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특출한 제자가 훗날 산헤드린 공회원이 되고 유대교리의 파수꾼의 역할을 담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공동의 적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 자가 바로 나사렛 예수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첫해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청결소동을 벌인 바가 있습니다(2:14-16). 그 때 대제사장의 눈밖에 났습니다. 또 다음해 유월절 안식일 날에는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치고 자신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노동을 시켰습니다(5:8-10). 그래서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지키고 율법을 준수하라고 그토록 강조하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격돌하게 되었습니다(5:18). 그리고 나서 두 해 만에 예수님이 초막절에 예루살렘 성전에 나타났습니다(7:14). 놀라운 히브리 성경말씀에 대한 풀이를 하고 있습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이 그 참신하면서도 경이로운 설명에 놀라서 수군거리고 있습니다(7:15).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일 것만 같다는 여론이 조심스럽게 나타나고 있습니다(7:31). 성전 내에서 그와 같은 논의가 일어나자 성전을 책임지고 있는 대제사장이 긴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다 백성들에게 성경선생으로서 존경을 받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권위마저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처럼 이해가 일치되어 신속하게 예수를 체포하고자 아랫사람들을 파견하고 있습니다(7:32). 그 결과 정탐을 마친 체포조가 빈손으로 돌아와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에게 보고를 하고 있습니다(7:45).

 

당국자들과 바리새인들(7:48)

 

  산헤드린 공회를 장악하고 있는 다수파가 각 부서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유대교의 치리를 담당하고 있는 당국자들입니다. 그들은 사두개인들이며 서기관인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교권을 휘두르고 있습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교권보다는 히브리 사상과 율법의 연구에 더 매진을 하고 있는 학자들입니다. 그리고 유대교의 교리와 율법, 전통적인 유대교 사상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선생들입니다. 만약에 유대교의 교권과 목자권을 분리한다고 하면 전자는 사두개인들로 구성되는 당국자들이 장악하고 있고 후자는 바리새인들이 쥐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모처럼 이해관계가 일치하여 나사렛 예수를 잡아오라고 아랫사람들을 보냈더니 그들이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전혀 엉뚱한 보고를 늘어놓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7:46). 기가 막힌 노릇입니다. 도대체 예수의 설법이 어떠하였기에 아랫사람들이 현혹이 되고 있는 것일까요? 그래서 이론에 밝은 바리새인들이 먼저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도 미혹되었느냐?”(7:47).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7:48-49). 공회원인 바리새인들, 곧 높은 신분의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주장을 혹세무민하는 사상으로 치부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이단의 사상이라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유대교의 중심세력인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 사이에서도 나사렛 예수에게 동조하고 있는 자가 있는지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체포조 가운데에서도 예수일행에게 동조하고 있는 자가 있는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태의 진전을 지켜보고 있는 바리새인 원로 가운데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이 있습니다. 그들이야 말로 산헤드린 공회에 숨어서 예수를 지지하고 있는 일파라고 볼 수 있습니다(3:1-10, 19:38-41). 비록 은신하고는 있지만 이제는 예수를 위해서 무언가 한 마디를 해야만 할 때입니다. 그래서 니고데모가 한 마디하고 있습니다;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7:51). 중죄에 해당하는 자를 심판할 때에는 반드시 두세 사람의 증인이 필요합니다(19:15). 그것도 고의와 과실을 모두 따지는 신중한 재판입니다(19:4-6). 그렇게 율법은 신중하고도 공정한 심판을 요구하고 있습니다(19:16-20). 니고데모의 주장은 섣부른 공회원들의 주장을 잠재우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를 통해서 보게 되는 바리새인의 두 분파(7:50-52)

 

바리새인 가운데에는 니고데모나 아리마대 요셉처럼 예수님에게 호의적인 랍비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적대적입니다. 그렇게 바리새인의 의견이 갈라지고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 역시 구성원들의 출신성분과 세계관의 차이에 의하여 영향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다윗 왕조가 망하고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그곳에서 포로생활을 70년이나 하게 됩니다. 신 바벨론 제국을 무너뜨린 바샤 왕조의 고레스 황제는 유대인들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귀향하기를 원하는 자들에게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조치를 해주었습니다(1:1-4). 비록 솔로몬 성전의 4분의 1규모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 수 있도록 재정적으로도 도와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역사를 섭리하시는 만군의 하나님에게 잘 보여서 신흥 페르시아 제국의 번영과 고레스 왕가의 안녕을 도모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대표적인 기복신앙입니다. 그들 왕가가 하나님 신앙을 가지기를 원한 것이 아니고 오로지 복을 받기 위해서 사찰만을 건설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유대인들 가운데 10퍼센트도 되지 아니하는 30만 명 이내의 수만이 유대 땅으로 되돌아 왔습니다(2:64-65, 8:1-20, 7:66-67).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자유스러운 대 제국 페르시아에서 그대로 살기를 원한 것입니다. 페르시아 제국이 유대인들을 전혀 차별하지 아니했다는 사실은 아닥사스다 황제가 유대인 에스라를 율법학자로 우대하고 느헤미아를 측근으로 크게 신임했다는 사실에서 잘 엿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하수에로 황제가 유대인 처녀 에스더를 왕비 가운데 하나로 삼고 종처남이 되는 모르드개를 중신으로 삼게 됩니다. 그렇게 자신의 능력이 출중하면 출신성분에 상관없이 크게 쓰임을 받을 수 있는 다민족의 열린 제국이 바로 페르시아였던 것입니다. 그 뒤를 잇게 되는 헬라제국과 로마제국 역시 다민족 국가입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역사적으로 교포의 삶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경건한 유대인들이 매년 유월절이 되면 장기간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학문하기를 좋아하는 자제들을 예루살렘의 바리새인 큰 스승들에게 보내어서 공부를 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하여 제국의 많은 이방인들에게 자신들의 유대교 유일신 사상을 전파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유대 본토에 거주하고 있는 선민들은 생각이 달랐습니다. 그들만이 유대교의 정통성을 지니고 자신들만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신령한 복을 독점하기를 원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교포들의 생각을 반영하여 유대교를 일부 개방하자는 힐렐학파가 바리새인들 가운데 등장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본토출신 바리새인 큰 스승인 가말리엘과 같은 노장파는 생각이 다릅니다. 그것은 유대교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유대교의 전통수호에 더 철저를 기합니다. 그들이 샴마이학파입니다. 개혁을 반대하고 개방에 대해서는 절대 반대입니다. 그러한 가말리엘의 수제자가 사울입니다(8:1, 22:3). 그는 교포출신이지만 스승 가말리엘을 너무나 존경했으며 그의 학풍을 그대로 물려 받기에 실로 열심이 지나친 자였습니다. 그렇지만 니고데모나 아리마대 요셉과 같은 소장파의 생각은 다릅니다. 그들은 너무나 고리타분한 유대교에 대하여 개방과 개혁을 주장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한 그들의 눈에 실로 엄청난 충격을 몰고 오는 선지자 나사렛 예수가 들어온 것입니다(1:24, 3:1-3, 19:38). 그들이 성공하지를 못하고 있는 유대교의 개혁과 개방이 어쩌면 나사렛 예수를 통해서 이루어질지도 몰랐던 것입니다. 전통적인 선민만의 구원에 매어 달리는 것이 아니라 실로 과감하게 그리고 혁신적으로 만민구원을 부르짖고 있는 선지자가 예수인 것입니다. 그 영향력 아래에 훗날 많은 경건한 교포 유대인들이 제자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스테반 등 일곱 명의 헬라파 유대인 집사들이 그들입니다(6:1-7). 그리고 안디옥 출신 의사 누가, 구브로(오늘 날의 키프러스) 섬 출신 바나바와 소아시아(오늘 날의 터어키) 길리기아 성의 다소출신 사울이 또한 그들입니다(4:36-37, 22:3).

 

아랫사람의 견해와 윗사람의 입장(7:45-47)

 

 산헤드린 공회에 있어서도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입장이 다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윗사람은 공회원들입니다. 그들은 지켜야만 할 유대교의 권력이 큽니다. 전통에만 충실하면 백성들의 존경을 받으며 유대교의 교권을 마음대로 행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안티 엘리트가 등장하는 것을 적극 반대하고 있습니다. 가능하면 없는 죄목이라도 붙여서 처단을 해버리고 싶어 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을 실무적으로 돕고 있는 아랫사람들의 입장은 다릅니다. 그들은 위로부터 많은 돈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자들도 아닙니다. 그저 관리와 하속(下屬, 아래에 속한 사람)에 지나지 못합니다. 그들의 형편이 로마의 속국이 되어 있는 처지이기에 별로 개선이 되어 있지를 못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메시아가 나타나서 로마를 물리치고 다윗의 제국을 재건해주기를 진심으로 원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대제사장이나 산헤드린 공회원들이야 어차피 로마황제가 그들의 지위를 보장해주고 있으니 독립에 대한 염원이 그리 크지 아니한 것입니다. 일부 바리새인 개혁주의자들이 종교적으로 오히려 헬라세계와 로마제국에 영향을 미치려고 노력을 하고는 있으나 그것은 너무나 미온적인 움직임으로 보입니다. 그러한 산헤드린의 아랫사람들 눈에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선보이고 있는 자칭 메시아 예수가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은근히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호의적입니다;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7:46). 이제는 산헤드린의 윗사람들이 아랫사람들의 동요를 억제시켜야 할 단계입니다. 그래서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7:47-49)라고 강변하면서 자체 단속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루속히 예수를 체포하여 분란의 씨앗을 없애버리려고 뜻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 때에는 산헤드린 공회 내의 아랫사람들뿐만 아니라 돈을 주고서라도 로마의 병정들을 동원하여 그들을 앞장세워서 예수를 체포해오려고 계획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대목을 사도 요한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1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