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71강(요7:37-44)(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3. 25. 20:46

요한복음 강해 제71(7:37-44)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61()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7:38)

 

예수님은 사마리아 수가 성의 여인을 우물가에서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세상에는 두 가지의 물이 있다고 가르쳐주었습니다(4:10-15); 한 가지는 야곱의 우물물입니다. 그 물은 매일 길어다 마셔야만 합니다. 그 이유는 물을 마셔도 시간이 지나면 또 목이 마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육체는 매일 음식을 먹듯이 물을 마셔야만 살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매일 마셔야만 하는 물은 아브라함의 우물물이나 이삭의 우물물이나 야곱의 우물물이나 모두 마찬가지입니다(21:25, 26:15-25, 4:6). 그리고 출애굽을 했던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하나님이 주시는 반석의 샘물을 마셔도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17:1-7, 4:12-13). 그래서 구원과 영생의 생수가 나타납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이 영원히 목이 마르지 아니하게 해줄 수 있는 생수의 근원에 대해서 수가 성의 여인에게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4:10, 14). 여기서 예수님이 여인에게 주실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생수는 이미 선지자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야훼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12:2-3).

이사야의 예언을 이미 알고 계시는 예수님이 여인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4:14). 여기서 그 속에서”(4:14b)라는 말의 뜻은 하나님의 보좌에서 흘러나온 생명수가 성령세례로 말미암아 성도들의 속사람 속에서 다시 흘러나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해석이 됩니다(47:112, 21:6-7, 22:1-2).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설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성도의 속사람 속에 성령님이 내주하심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성전이 마련되고 그곳에서부터 생수가 계속 흘러나오는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는 것입니다(고전6:19). 그 새로운 성전은 예루살렘 성전처럼 돌로 짓는 것이 아닙니다(2:18-20).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의 몸으로 짓는 것임을 사도 요한이 이미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2:21-22).

그런데 그러한 이야기를 왜 예수님이 초막절 명절 끝 날에 백성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일까요?(7:37-38)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초막절의 정식 행사는 7일동안 계속 되었지만(16:13, 23:39, 29:2) 8일째는 대규모의 성회로 지켜졌습니다. 그 날에는 초막절 행사 가운데 매일 제사장이 실로암이나 베데스다 연못에서 물을 떠다가 번제단 아래에 흐르게 하는 의식에 관하여 설명을 하고 구원의 샘물이 백성들에게 이제 주어졌음을 선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한 전례를 알고 계시는 예수님이 장차 성령님이 강림하시면 그 소원이 영원히 이루어질 것임을 백성들에게 복음으로 선포하고 있는 내용으로 풀이가 됩니다(7:39).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아니하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7:39)

 

  백성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설왕설래를 하고 있습니다(7:40-43). 그러한 이야기를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가 한 적이 있으니 같은 말을 하고 있는 예수가 선지자가 아니냐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백성들이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메시아가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이라는 미가 선지자의 예언을 랍비들이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5:2, 7:41-42).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백성들의 의구심을 풀어줄 수가 있을까요? 유일한 해결책은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써 성령님이 강림을 하시고 믿는 자들에게 내주하여 역사하시는 새로운 시대를 눈으로 보여주는 방법입니다. 진리의 성령께서 강림을 하셔서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입증해주어야만 백성들이 완전히 믿게 되는 것입니다(7:39). 이제 사도 요한의 복음서는 그 길을 향하여 전개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생애 마지막 부활절이 이르기 전에 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아직 백성들에게 들려주어야만 하는 이야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 때까지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가 아무리 애를 써도 예수님을 체포하여 처형을 할 수가 없습니다(7:44). 그리고 그들도 다소 여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백성들이 예수님의 정체에 대하여 설왕설래하면서 아직 그리스도로서 완전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7:43-44). 백성들이 예수님을 크게 신뢰하지 아니하고 있는 판국에 구태여 무력을 써서 잡아들일 필요가 없다고 현장에 출동한 산헤드린의 요원들이 판단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나사렛 예수를 동정하는 백성들이 많이 생기고 여론이 예수님에게 유리하게 작용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