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68강(요7:19-24)(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3. 24. 00:41

요한복음 강해 제68(7:19-24)

작성자; 손진길 목사(로토루아순복음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528()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7:19)

 

  예수님이 초막절에 예루살렘성전에서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습니다(7:14). 말씀풀이의 내용이 모세의 율법에 관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7:19ab)라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말끝에 한 가지 이상한 말씀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7:19c).  그 말을 들은 성전 내의 경건한 유대인들은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7:20). 그들은 금시초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추론할 수 있게 됩니다. 그들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예수님의 강론을 들은 경건한 유대인들은 두 해 전 유월절에 베데스다 연못 가에서 만난 유대인들과 다른 성향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5:2, 10, 16, 18). 두 해 전에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모세의 율법을 어겼기 때문에 처벌을 하고자 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했으며 하나님을 자신의 친 아버지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5:18). 그런데 예수님은 두 해가 다 되어가는 시점에서 그 때의 유대인들의 공론은 잘못된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호소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로 말미암아 이상히 여기는도다.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행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느니라.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7:21-24). 예수님의 말씀은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첫째, 모세의 율법에 함께 규정되어 있지만 안식일보다 할례가 더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7:22). 둘째, 할례보다도 더 중요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시사하고 있습니다(7:23). 셋째, 외모보다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7:24).

 

안식일보다 할례가 중요한 이유(7:22)

 

  모세의 율법에서 안식일과 할례를 모두 규정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명하고 있습니다(17:10). 그리고 모세는 안식일을 엄격하게 지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기록하고 있습니다(16:23, 30, 35:2-3). 두 가지의 기록이 모두 모세의 오경인 율법서에 실려 있다고 하더라도 그 명령에는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명령하고 있는 안식일 규정보다는 그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명령하고 있는 할례가 더 우선입니다. 그 이유는 조상의 조상에게 먼저 말씀하신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현대국가에서는 나중에 만든 법이 옛날 법에 우선합니다. 그것을 신법(新法)우선주의라고 흔히 말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은 먼저 선포된 것이 우선입니다. 변개함이 없이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이 반영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가장 중요한 지시사항을 이미 창세기에서 대부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것이 워낙 중요하기 때문에 모든 백성들이 쉽게 이해하고 오래 기억할 수 있도록 여러 믿음의 조상들이 등장하는 재미있는 이야기 형식으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창세기는 성경전체의 서론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의 대의와 취지를 선언하고 있는 부문입니다. 따라서 창세기에 실려있는 할례의 규정이 출애굽기에 실려있는 안식일 규정보다 우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할례보다 중요한 하나님의 뜻은 생명을 살리는 것(7:23)

 

그런데 할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모세는 그것을 마음에 할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의 유언과 같은 기록 신명기에서 두 차례나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10:16, 30:6). 육체에 할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할례를 하라고 하는 뜻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고 있는 아브라함의 일생을 살펴보면 그 의미를 헤아릴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백세에 적자 이삭을 얻게 됩니다. 그의 아내 사라가 구십 세입니다. 그녀는 늙었으며 생리가 끊어진 지 오래되는 여자입니다. 더구나 그 때까지 자녀생산을 한 적이 없는 불임여성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들 부부 사이에 이삭이라고 하는 아들을 얻도록 역사를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삭은 과연 누구의 아들일까요? 육체적으로 본다면 아브라함 부부의 합방으로 탄생한 아들이 맞습니다. 그렇지만 그들 노부부를 아들생산이 가능하도록 회춘을 시켜주고 또한 불임여성 사라를 가임(可姙)여성으로 치료해주신 분은 야훼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삭은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하기에 앞서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태어난 하나님의 약속의 아들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결코 잊어버려서는 아니 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사실을 잊어버리지 아니하도록 남자가 생식기에 표시를 합니다. 그것이 육체적인 표시인 할례입니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표시를 볼 때마다 그 마음 속에 내가 가진 모든 것, 나의 후사까지 모두 하나님께서 좌우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그것이 마음에 할례를 하라!는 말씀의 의미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그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바치라고 하나님께서 명령을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린다는 심정으로 그렇게 시행을 하고자 합니다. 바로 그 때에 하나님이 사자를 보내어서 말리고 있습니다. 이삭의 생명을 살리신 것입니다. 그 대신에 숫양을 제물로 바치도록 하나님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22:13). 그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어린 양이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있습니다. 대속의 제물이 되고 있습니다. 여호와 이레의 축복은 유월절 어린 양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실 때에도 그대로 적용이 되고 있습니다(22:14, 1:29). 죽을 운명의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대속의 제물로 보내고 있습니다(3:14-17).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의 모든 뜻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도에서부터 비롯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뜻이 모든 율법과 규례의 대강령인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의 말씀을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인들에게 일찍이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3:4).

 

외모보다 중요한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7:24)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만 살리고자 하시는 것일까요? 선민 이스라엘은 야곱의 자손인 자신들만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메시아가 이 세상에 오시면 로마가 물러가고 다윗의 제국이 재건이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생명을 살리라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그들을 제사장나라,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았습니다(19:5-6). 그랬더니 그들은 자신들만의 구원을 생각하면서 종교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에게는 구원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고 장차 메시아가 오시면 그들은 이스라엘의 종이 될 운명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한 유대교의 사상은 철저하게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생각과 반대입니다. 세상만물과 만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고 계시는데 자칭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하고 있는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의 구원을 바라고 있습니다. 만민구원을 부르짖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을 동일하게 사랑하고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이 유대인 사회에서 실종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처형하고자 획책하고 있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진면목인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익히 알고 계시는 예수님께서 그 점을 마지막 유월절을 꼭 6개월 남겨놓은 시점에 예루살렘성전에서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리둥절하였지만 반년 후에 유월절을 지나게 되면 그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깨달을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