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66강(요7:10-15)(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3. 22. 14:34

요한복음 강해 제66(7:10-15)

작성자; 손진길 목사(로토루아순복음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526(주일새벽)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7:11)

 

사도 요한이 당시 예수님의 행적에 대하여 유대인들의 관심이 뜨겁다는 사실을 한 마디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7:11).  여기서 말하고 있는 명절은 초막절입니다. 그 때는 태양력으로 10월 중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지난 4월 유월절에는 계속 갈릴리 지방에 머무르시고 예루살렘에 들르지를 아니했습니다. 따라서 명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으로 몰려 들었던 전국 각지의 유대인들과 해외의 유대인 교포들이 예수님의 행적에 대하여 더 궁금하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 유대인들은 크게 두 무리로 갈라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좋아하는 무리와 싫어하는 무리입니다. 오늘 날의 속어로 표현하자면, 소위 ‘fan’‘anti-fan’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대제사장과 유대교 권력을 쥐고 있는 사두개 인들이 예수님을 싫어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힘의 근거가 되고 있는 예루살렘성전의 권위를 예수님이 폄하했기 때문입니다; 헤롯 왕가에서 지난 46년 긴 세월 동안 증축을 해오고 있는 성전에 대하여 예수님이 말하기를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2:19)고 호언장담을 한 것입니다. 그 때는 성전 안에서 장사를 하고 있던 사람들을 예수님이 쫓아낸 직후였습니다. 그리고 성지(聖地) 예루살렘에서 감히 안식일 규례를 어기고 있는 자들이 바로 예수님과 그 제자들입니다. 당시 산헤드린 공회는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해서는 아니 된다고 안식일 규례를 엄격하게 백성들에게 적용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밀밭 사이에서 이삭을 잘라서 먹고 있는 것입니다(2:23-24). 한 술 더 떠서 그들의 스승인 예수님은 아예 병자를 고치는 의료행위를 하고 병이 나은 자에게 누워있던 자리를 들고 가라고 안식일에 일을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5:8-10). 그러므로 유대교의 권력자들은 나사렛 예수파를 아주 싫어했습니다.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인기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세력이 변방 갈릴리에서 커져가고 있는 것도 못마땅했습니다. 그래서 만약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오는 날에는 기회를 보아 그를 잡아서 처형하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는 시점입니다(7:1). 그러한 예루살렘의 분위기를 아시고서 예수님이 아주 은밀하게 마지막 초막절 절기가 시작이 되자 비로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고 있는 것입니다(7:10). 예수님은 자신을 좋아하는 예루살렘 백성들이 유대교 권력자들의 비위를 거슬리지 아니하기 위하여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까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7:13).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일행에 대하여 백성들을 미혹하는 자라고 흑색선전을 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사도 요한이 기록하고 있습니다(7:12).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7:14)

 

예수님은 명절에 예루살렘에 들르게 되면 성전에서 가르치시기를 좋아했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하는 경건한 유대인들이 절기가 되면 주로 성전에 몰려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2:41, 45-47, 2:13-14, 2:5) . 둘째, 성전이 바로 예수님의 아버지의 집이었기 때문입니다(2:46, 49). 예수님은 지방에 계실 때에는 주로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6:59). 히브리 경전인 두루마리를 펴 놓고서 읽으시면서 그 뜻을 복음으로 풀이하여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전했던 것입니다(9:35, 4:16-17). 그러한 방식은 그 후 사도들과 제자들에 의해서도 계속이 되었습니다(17:1-4). 그들은 유대 땅과 로마세계에 두루 다니면서 유대인들의 회당을 발견하면 안식일에 그곳에 들러서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효과적인 전도의 방식입니다.

당시 성전이나 회당에서 히브리 경전을 읽고 그 뜻을 풀이하여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사람들이 랍비들입니다. 그들은 경전을 수백 년 동안 연구하면서 나름대로 주석집을 만들었습니다. 그 주석집과 히브리 사상을 열심히 공부하여서 랍비의 자격을 취득한 자들입니다. 그러한 랍비들을 길러내기 위하여 바리새인들의 스승들이 존재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집에 학교를 열어서 후진들을 길러내고 있습니다. 당시 가장 유명한 유대교 랍비가 큰 스승인 가말리엘입니다. 그는 바리새인이지만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가 율법의 전문가가 필요하여 특별히 공회원으로 영입을 했습니다(5:34).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과 유대교의 사상과 학문을 공부하고자 전국은 물론 멀리 교포사회에서도 젊은이들이 몰려들었습니다(22:3). 그 외에도 유명한 랍비들이 예루살렘에서 생도학교를 열고 있는 시절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랍비의 경지를 넘어서는 자로서 하나님이 직접 기름을 부으신 선지자라고 칭송하고 있는 자는 세례 요한과 나사렛 예수입니다. 그들에 대하여 랍비들은 정식으로 히브리 경전을 공부한 적이 없는 무식한 자라고 비방을 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선전술은 백성들에게 먹혀 들고 있습니다. 그 동안 불행하게도 세례 요한은 갈릴리의 분봉 왕 헤롯 안디바의 심기를 건드려서 그만 참형이 되고 말았습니다(6:27). 이제 나사렛 출신 선지자 예수만이 유대교 지도자들의 눈에 가시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일년 이상 변방 갈릴리에서만 활동을 하고 있던 예수가 오래간만에 예루살렘에 다시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초막절 기간 중간에 성전에 들어와서 다시 히브리 경전을 읽고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해석은 기존 랍비들의 주석에 의존한 풀이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말미암아 그 본래의 뜻이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씀의 풀이가 생명력을 얻고 있습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이 깜짝 놀라서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7:15). 그 말은 히브리 글자를 아느냐 하는 정도의 반응이 아닙니다. 어려운 경전의 뜻을 알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실로 10년이상 오랜 세월 위대한 랍비 스승에게서 배우지 아니하면 그 뜻을 깨달을 수가 없는데 그러한 공부를 한 적이 없는 시골출신 선지자 예수가 히브리 경전의 뜻에 통달을 하고 있으니 그것이 놀랍다는 의미입니다. 그와 같은 현상을 훗날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와 요한의 경우에서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4:13). 그것은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고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며 그 성경말씀의 뜻을 체계적으로 풀어서 알기 쉽게 백성들에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날에도 성령님은 동일하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