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64강(요7:1-5)(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3. 21. 10:16

요한복음 강해 제64(7:1-5)

작성자; 손진길 목사(로토루아순복음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524()

 

갈릴리와 유대

 

지정학적으로 보게 되면, 갈릴리는 변방이고 유대는 중앙입니다. 종교적으로 보더라도 그러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유대 땅이 유대교의 중심이고 갈릴리는 변방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공생애를 보게 되면 대부분의 사역과 활동의 무대가 갈릴리입니다. 그 이유는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가 있는 예루살렘에서는 예수님을 핍박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 율법을 어기고 예루살렘 성전을 모독했으며 야훼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소위 참람죄를 범했다고 주장하면서 예수님을 잡아서 죽이려고 했습니다(7:1). 그래서 예수님은 36개월 공생애 기간 중 대부분의 사역을 갈릴리를 중심으로 변방지역에서 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전통적인 유대교의 중심지는 여전히 예루살렘 성전을 가지고 있는 유대 땅이었지만 새로운 만민구원사상이 복음으로 널리 전파되고 있었던 지역은 그 변방인 갈릴리 지방입니다. 이른 바, “변방에서 새로운 사상이 움트고 있다는 속언(俗言, 세상사람들의 말)과 맞아 떨어지고 있습니다.

비근한 예로서는, 1868년 일본의 명치유신(明治維新)의 발생이 그러합니다. 에도(훗날의 동경)를 중심으로 하는 무신정권(武臣政權) 막부(幕府)의 세력이 동진하고 있는 서구의 침탈을 막아내지 못하고 휘청거리자 틈을 보고 있던 변방세력들이 이름뿐인 천황(天皇)을 옹립하고서 혁명에 성공한 것입니다. 당시 일본 열도의 서남 끝에 위치하고 있었던 죠슈(長州), 샤쯔마(薩摩) 등 네 개의 지방정권인 번()이 명치유신을 주도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오랫동안 중앙 막부의 눈을 피하여 은밀하게  부번강병’(富藩强兵) 정책을 성공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변방에 위치한 그들은 젊은 인재들의 밀항을 묵인함으로써 서구의 선진문물을 손쉽게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일이 예수님 당시에 변방 갈릴리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중앙의 통제에서 벗어난 예수님의 복음사역이 대부분 갈릴리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유대 땅의 백성들보다 예수님의 복음을 더 많이 들었으며 더 많은 갈릴리의 병자들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는 장면도 변방사람들이 더 많이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파라고 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아니하고 갈릴리에서 많은 백성들에게 물세례를 주면서 만민구원의 복음을 널리 전파할 수가 있었습니다(4:2). 바야흐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응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야훼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9:1-2). 이제 남은 문제는 유대교의 총본산인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과감하게 종교개혁을 전개하는 일입니다. 그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재창조의 시계가 쉴새 없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마지막 초막절과 유월절 사이

 

예수님의 공생애는 네 번의 유월절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첫해 유월절에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청결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은 유대교지도자들의 눈밖에 나기 시작했습니다. 은밀하게 찾아온 니고데모를 만난 이후 유대 땅을 벗어났습니다. 사마리아와 갈릴리를 돌아다니면서 천국복음을 전했습니다. 두 번째 유월절에도 예루살렘으로 들어갔지만 베데스다 못 가에서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고친 사건으로 그만 요주의 인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별다른 사역이 없이 유대 땅을 떠났습니다. 세 번째 유월절에는 아예 예루살렘으로 가지도 아니했습니다. 계속 갈릴리를 중심으로 변방과 가까운 이방 땅으로 떠돌면서 복음을 전할 뿐입니다.

바야흐로 마지막 유월절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님이 최후를 맞이하는 제단은 갈릴리가 아니고 예루살렘에 있습니다. 6개월 전부터 은밀하게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 시점이 유대인의 마지막 절기인 초막절이 가까운 때입니다. 참고로, 초막절은 유대인의 달력으로는 715일부터 22일까지입니다. 우리의 달력으로는 10월 중순입니다. 그 기간 동안에 모세는 광야에서 백성들과 함께 성막(聖幕, the holy tabernacle)을 지었습니다(23:34-36, 36:5-7). 그 때처럼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서 새로운 성전을 지으려고 합니다. 그 성전은 돌로 짓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몸으로 짓고자 합니다(2:19-22). 그러한 의도가 마지막 초막절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 실천이 다음해 4월의 유월절기간에 이루어집니다. 어린양이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맞이합니다(1:29). 그 십자가를 쳐다보는 자마다 누구나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며 영생을 얻게 되는 새로운 시대가 다가오고 있습니다(3:14-15).

 

친형제들의 불신앙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는 남편 요셉과의 사이에 아들과 딸을 많이 낳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의 친동생들입니다. 그 가운데 아들들의 이름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 등 네 명입니다(6:3). 그들 네 명 남동생들의 아버지는 정확하게 목수 요셉입니다. 목수 요셉이 다윗의 자손이므로 예수님의 남동생들은 당연히 다윗 왕의 혈통을 잇고 있습니다(1:20). 왕손으로서 그들의 자부심은 대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남동생들이 보기에 큰형인 예수는 아버지 요셉의 친아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혈통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형의 지혜는 너무나 뛰어났습니다(2:47). 그리고 형 예수는 성령의 능력으로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아들이라는 은밀한 이야기를 그들은 일찍이 부모로부터 듣게 되었습니다(1:18). 그러나 동생들은 그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 목수 요셉이 일찍 세상을 여의자 장자인 예수가 대를 이어서 목수일을 했습니다. 많은 동생들과 모친을 부양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이 30이 되자 그만 출가를 하고 말았습니다. 집안의 힘든 일은 그 때부터 남동생들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산골 나사렛에서 목수일을 하게 되는 동생들은 형 예수가 원망스러웠습니다. 더구나 다윗의 자손도 아닌 형이 세간에서는 다윗의 뒤를 잇는 메시아라고 불려지고 있습니다(1:41, 45, 49, 3:2, 4:25-26). 남동생들이 생각하기에는 그것은 일종의 속임수입니다(7:5). 그러한 형이 이 년 동안 단 두 번 예루살렘을 다녀왔을 뿐 그 다음부터는 계속 갈릴리 변방을 떠돌면서 변죽만 울리는 종교개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생들이 형 예수의 등을 떠다밀고 있습니다. 형이 진짜 메시아라면 용감하게 수도 예루살렘으로 진출하여 로마의 세력을 물리치고 동족을 구원하라는 것입니다(7:3). 그 옛날 모세처럼, 그리고 조상이신 다윗 왕처럼 한번 하나님의 능력을 발휘해보라는 주장입니다(7:4). 그러한 결단과 위업이 없으면 그만 다윗의 자손인 메시아의 흉내를 계속하지 말라는 주문인 것입니다. 혈통으로 따지자면 형 예수가 아니라 목수 요셉의 피를 직접 이어받고 있는 남동생 야고보나 유다가 더 메시아가 될 소지가 크다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11:1-5). 그런데 형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서 허무하게 골고다 십자가에서 죽고 나자 동생들은 그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자신들이 형을 너무 일찍 죽도록 만든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형이 했던 말들을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형이 건설하려고 했던 하나님의 나라가 자신들이 꿈꾸고 있는 그 옛날 다윗의 제국의 부활이 아닌 것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너무나 이상적인 평화공존의 나라를 건설할 것이라고 외치던 평화주의자 형을 유대교지도자들과 로마제국은 왜 반역자로 처형을 한 것일까요? 유대교가 주장하는 노예해방과 선민의 나라가 아니라 형 예수는 선민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는 하나님의 직접 통치의 나라를 주장했는데 그것은 인류의 역사 가운데 과연 성취가 가능한 것일까요?”

동생들은 자신들의 잘못 때문에 선량한 형을 그만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후회가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형이 건설하려고 했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아쉬움도 남아 있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때에 무덤 속에서 형이 부활을 하였다는 놀라운 소식이 갈릴리로 전해졌습니다. 그 후 형이 40일간 이 땅에 머무는 사이에 동생들은 모친을 모시고 아예 갈릴리와 예루살렘의 모든 집회에 참석을 하였습니다. 이제부터는 형 예수를 주님으로 모시고 살기로 동생들이 결심을 한 것입니다. 그들은 다윗의 혈통이라는 자부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신분으로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초대교회에 있어서 예수님의 동생이라고 하여 그 어떤 특권을 주장하지도 아니했습니다. 오로지 생전에 형을 불신했던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고서 다윗의 제국 대신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한 기록이 사도행전에 나타나고 있습니다(1:14, 15:13-22). 그리고 그들의 저술이 야고보서와 유다서입니다(1:1,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