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63강(요6:66-71)(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3. 21. 10:14

요한복음 강해 제63(6:66-71)

작성자; 손진길 목사(로토루아순복음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523()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6:68)

 

예수님이 자신의 살과 피를 받아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영생을 받을 수 없다고 말씀을 하시자 사람들은 시험에 들었습니다(6:53-61). 그 말씀은 자신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나아오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기를 원하신다는 뜻과 예수님 자신이 그 뜻을 이 땅에서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공생애를 살 것이며 또한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물이 되고 보혈을 흘려주겠다는 뜻으로 해석이 가능합니다(6:38-40). 그렇지만 대부분의 백성들이 예수님을 단지 목수 요셉의 아들로만 알고 있는 가버나움 회당에서 그 말이 설득력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6:42, 59). 그래서 많은 백성들, 심지어 상당수의 제자들까지 예수님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버렸습니다(6:66). 모두 떠나가고 드디어 열두 제자만이 예수님 곁에 남게 되었을 때 예수님이 그들에게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6:67). 나서기를 좋아하는 시몬 베드로가 제일 먼저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6:68-69). 베드로의 대답으로 미루어볼 때,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던 열두 명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만 끝까지 따르게 되면 무엇인가 신성한 살과 피를 얻을 수가 있고 마침내 구원과 영생에 이르게 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 열두 명을 택하여서 사도로 삼게 됩니다(6:70a, 9:1-6, 6:7-13, 10:1-23).

그렇지만 그들 열두 명의 제자들에게 아직 마지막 시험이 남아 있습니다. 마지막 두 가지의 시험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자기 자신의 목숨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을 더 사랑하는가? 둘째, 자신의 야망의 성취보다 백성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를 더 소원하는가? 첫 번째의 시험을 통과한 제자는 아무도 없습니다(14:27-30). 두 번째의 시험문제에 합격하지 못한 사람은 가룟 유다입니다(6:70b-71).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라(6:70)

 

사도 요한의 스승이신 예수님은 AD 30년경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무덤에서 3일만에 부활하신 후 40일만에 베다니에서 승천하셨습니다(24:50-51). 그리고 나서 60년 정도의 세월이 흐르고 나서 지금 사도 요한이 그 때의 일을 기억하면서 이 글을 적고 있습니다. 그는 가룟 유다가 스승님을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에 팔아 넘겼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과거지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자신의 기억을 되살려보니까 스승이신 예수님이 당시에 벌써 그 사실을 예지하고 계셨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표현이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6:64),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6:70), 또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13:21),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13:26) 등으로 여러 차례 요한의 복음서에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두 가지의 의문이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첫째, 왜 예수님은 뻔히 아시고서도 장차 자신을 배신할 자를 제자로 거두었을까요?둘째, “왜 다른 제자들에게 가룟 유다가 바로 나를 팔아먹을 자라고 직접 그 이름을 거론하지 아니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만약 자신의 목숨보다 영생이나 만민구원의 길을 더 선호하고 있는 자만을 하나님이 구원하고자 결심하셨다고 한다면, 이 땅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자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사도 바울의 설명을 따르면, 한 사람도 없습니다(3:9-20). 그러므로 그것은 만민구원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생각이 아닙니다. 천하만물과 사람을 모두 창조하신 하나님의 광대한 사고방식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선민 이스라엘만을 구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자신의 창조주가 누구이신지를 전혀 모르고서 인생을 살고 있는 불쌍한 자들을 모두 구원하여주고 싶어하십니다.   구체적으로 장차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누릴 수가 있는지를 가르쳐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 일을 선지자들에게 맡겨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공하지를 못했습니다. 그 결과 제사장나라의 백성들은 계속 영적으로 타락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세상나라들보다 못한 악행의 나라가 되고 말았을 때에 멸망이 찾아 왔습니다(왕하21:10-16, 25:1-12). 그 때가 예수님 오시기 전 약 600년전입니다.

이제 마지막 구원의 기회를 한번 더 크게 베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낸 것입니다(3:16-17). 그것이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듣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자에게는 유대인이거나 이방인이거나 상관 없이 그리고 불신자이거나 배신자이거나 상관이 없이 모두에게 똑같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마지막 한번의 기회가 더 제공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끝으로,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게도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가 나를 팔 자라고 직접 언급하지 아니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단지 너희 중 하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의 뜻을 가룟 유다가 알아채고서 자신의 나쁜 의도를 반성해야만 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만찬의 자리에서 떡 한 조각을 떼어서 그에게 건너줄 때까지 가룟 유다는 전혀 반성의 빛을 보이지 아니하고 있습니다(13:25-30). 자신에게 야망성취의 기회를 주겠다고 하는 대제사장 및 유대교 지도자들의 제의를 더 선호하게 되는 가룟 유다입니다(26:14-16, 47-50). 장차 스승을 배신하게 되는 그는 그 보응으로 유대교 지도자들로부터 오히려 배신을 당하게 되고 드디어 천추의 한을 남기고 자신의 생을 자살로 마감하고 있습니다(27: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