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61강(요6:60-63)(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3. 21. 00:27

요한복음 강해 제61(6:60-63)

작성자; 손진길 목사(로토루아순복음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5 21()

 

이 말씀은 어렵도다(6:60)

 

  예수님의 설교와 가르침은 어렵습니다. 특히 생명의 떡 이야기가 그러합니다. 사람들이 식인종이 아닌데 어떻게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의식을 거쳐야 영생을 얻을 수가 있으며 자신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수가 있다고 예수님이 당당하게 외치고 있으니 기가 막힌 노릇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하신 때는 AD 28년경입니다. 지금 사도 요한은 대략 60년의 세월이 지나서 그 때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백성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세월이 많이 지났지만 그 때 그 자리에서의 백성들의 반응을 생각해보면 사도 요한도 새삼 곤혹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가장 젊잖은 표현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어렵도다”(6:60). 만약 상황을 재구성하여 당시 백성들의 반응을 추론해보자면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이며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대꾸할 가치조차 없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말씀을 선포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 저의가 궁금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일반백성들만 어리둥절했던 것이 아닙니다. 두 해째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있는 제자들 역시 그 말씀이 이해가 되지를 못하여 서로 의견을 교환하느라고 수군거렸습니다(6:61a). 보충설명이 없이 그냥 지나가면 그 말씀이 항상 목에 걸려 있을 것만 같습니다(6:61b). 그래서 예수님이 새로운 설명에 나서고 있습니다.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6:62)

 

그 새로운 설명이 바로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을 사람들이 보아야 비로서 그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6:62). 그러한 보충설명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알아듣기 힘든 이야기를 반어체(反語體, 되묻는 형식 또는 뒤집어서 말하는 방식)로 말하고 있으니 도대체 예수님의 의도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의 말을 듣고 무조건 하나님 아버지의 의도와 능력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아들을 속죄의 제물로 삼아서라도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창조주의 뜻을 믿지 아니하면 영생을 얻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피와 살을 가지고 이 세상에 보내신 유월절 어린 양이기 때문에 세상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제물로 바쳐질 것입니다. 그리하면 마치 번제단에서 제물로 바쳐진 양의 살과 고기를 백성들이 삶아서 나누어 먹고서 자신들이 구원을 받은 줄 알듯이 그러한 은혜가 주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당시 그곳에 모인 백성들은 예수님이 선지자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랍비인 줄은 알고 있지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는 미처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사실은 하늘에서 이 땅으로 내려온 독생자이며 창조주의 영광과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으로는 전혀 생각을 하지 아니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신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창조주의 권능을 가지고 있다고 믿지 못하는 한 상기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은 이해가 되기 어려운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믿음이 없으면 다음과 같은 질문과 의문은 당연한 것입니다; “어떻게 사람이 그냥 천국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 옛날 의인 에녹이나 선지자 엘리야에게 그러한 일이 발생했다고 히브리 성경에서 전하고는 있지만 그러한 일이 자신들의 시대에 눈앞에서 발생할 수 있다고는 도저히 생각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런 일이 발생할 확실이 제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사람이 살고 있는 지표면이라고 하는 것이 두꺼운 용암을 겨우 덮고 있는 편편한 흙과 바위에 불과합니다. 그 비율을 살펴보자면, 지구 중심에서 6,360km까지가 전부 용암지대입니다. 반면에 그 바깥쪽 10km 정도만이 땅입니다. 그 땅도 안전하지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두꺼운 판들이 서로 겨우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 뚜껑과 같은 판들이 조금 사이가 벌어지거나 움직여버리면 용암은 그냥 지표면으로 분출이 되고 맙니다. 실제로, 인류의 긴 역사로 따져보면 용암분출이 없었던 지역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당대에는 그러한 지진이나 용암의 분출이 자신이 살고 있는 땅에는 없을 것이라고 스스로 믿고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믿다가 보니까 어느 사이엔가 그러한 일이 발생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하나의 상식이 생겨있는 것입니다. 일단 그렇게 사회의 통념이 형성이 되어버리고 나면 이제는 지진이 발생하고 화산폭발이 있게 된다고 주장을 하는 자가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지금 예수님은 장차 자신이 승천하는 장면을 보여주면 어찌하겠느냐고 제자들에게 반문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존재임을 항상 명심하고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만 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영적인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의 진리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유한한 인간에게, 특히 상당한 개념의 제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말로써 전하고 있으니 능히 그러할 것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6:63a)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이 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떡 이야기가 그러하고 니고데모에게 설명한 바 있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이야기가 다 그러한 것입니다. 이제는 백성들과 제자들에게 살리는 것은 영이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6:63). 그 뜻을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사도 요한은 하나님이 영이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3:24). 둘째, 그 영이신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십니다. 셋째, 그러므로 세상은 영이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창조가 된 것입니다. 넷째, 유한한 존재인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구원입니다. 다섯째,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는 인간을 재창조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여섯째, 그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믿음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일곱째, 그래서 일반사람과 똑같이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죽고 무덤에서 부활함으로써 새로운 영생의 몸을 입고서 승천하여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곁으로 가는 기적과 같은 인생살이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논리의 전개는 한 가지 사실로 귀결이 되고 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영으로 창조가 되었다. 그 영적인 창조의 능력이 사람에게 영생을 부여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 능력으로 임하면 죽어 있는 인간을 다시 살린다는 뜻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6:63b)

 

  예수님이 지금까지 하늘의 일을 이야기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말을 알아 듣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 왔을 때에도 예수님은 똑 같이 말씀을 했습니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3:12). 땅에서 살고 있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입니다. 그 이유는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는지는 몰라도 당장은 보이는 육체가 그 생명력을 잃고서 시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3:20-21). 그런데 예수님은 끝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백성들에게 전하고 있는 말씀이 영원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은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창조의 역사를 가지고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