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바 사바 사바하(손진길 소설)

사바 사바 사바하7(손진길 소설) 3. 이촌향도, 많은 사람들이 지방에서 서울로 몰려들다.

손진길 2022. 3. 25. 14:48

사바 사바 사바하7(손진길 소설)

 

3. 이촌향도, 많은 사람들이 지방에서 서울로 몰려들다.

 

정종수의 집이 서울 종로구에 자리를 잡고 있다. 정종수의 부모님은 서울에 이사를 할 때에 벌써 서울대 본부가 있는 종로구에서 살기로 작정한 것이다. 맹모삼천’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들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 그것도 공부를 엄청 잘하는 아들을 위하여 서울대가 있는 인근에서 살기로 하고 한식당도 그곳 가까이에서 구했다;

그 덕택에 우창윤은 기요한 동창회장의 집을 나와 모친을 모시고 그 집의 큰 방 하나를 빌려서 살게 된다. 그리고 김법승도 정종수의 집에 기거하면서 같은 종로구에 있는 재수학원에 시험을 보고 합격하여 ‘서울대 특별반’에서 공부하게 된다.

다만 송원길은 보름간 그 집에서 지내다가 서울대 교양과정부가 자리잡고 있는 공릉동의 하숙집을 구하여 이사를 한다. 아무래도 거리가 가까운 것이 공부하기에 더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지만 정종수의 경우에는 어차피 1년만 교양과정부가 있는 공릉동에서 수업하고 그 다음에는 종로구에 있는 서울법대로 돌아올 것이기에 집에서 그냥 통학을 하고자 한다. 하지만 서울에서 다시 만난 4총사는 그 마음이 한없이 기쁘다.

철없던 꼬마시절 ‘사바 사바 사바하’를 함께 외치며 새로운 미래를 꿈꾸었는데 그것이 서울에서 1970년대에 실현이 되고 있는 것만 같아서 그들의 마음이 행복한 것이다. 그렇게 서울에서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고 있는 1970년대는 한국의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살기 좋은 시절임이 틀림없다;

한편, 서울에서의 우창윤의 생활이 참으로 바빴으며 지금도 바쁘다. 그는 고등학교 3학년이 시작되기 전에 벌써 기요한 동창회장의 뜻에 따라 경주에서 서울로 올라와서 기회장의 집에서 지내고 있다. 그 집은 종로구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우창윤이 등록하여 다니고 있는 종로의 재수학원에서 가깝다.

우창윤은 재수학원의 ‘서울대 특별반’에서 일년간 공부하는 동안에 하루에 한시간 씩 기요한 회장의 딸인 기한나 양을 가르치고 있다. 당시 중3인 한나는 고3인 우창윤이 공부를 가르친 첫번째 제자인 셈이다;

1970 1월에 우창윤은 서울법대에 합격했다. 그해 3월초에 종로구에 있는 서울 문리대 운동장에서 입학식을 가지고 나서는 변방 공릉동에 있는 교양과정부에서 1년간 수업에 임했다. 매일 종로에서 공릉동까지 만원버스를 타고 다닌 것이다.

그러면서도 매일 1시간 씩 기한나를 가르치면서 기회장 집에서 지냈다. 고맙게도 기회장이 넉넉하게 용돈까지 챙겨주고 있다. 그만큼 건설업을 경영하고 있는 기요한 회장은 생활이 넉넉한 편이다.

사실 기요한 동창회장과 동갑내기 아내인 성에스더는 경주의 그 종합고등학교 출신이다. 그들은 불국사 가까이 있는 외동에서 열차 통학을 하면서 경주의 종합고등학교를 다닌 것이다. 두 사람은 부친이 기 장로와 성 목사였으며 같은 교회에 다니고 있었기에 어릴 때부터 무척 친한 사이이다.

두 사람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성에스더는 농협에 취직하여 고향에 남았다. 그러나 청운의 꿈을 가진 기요한은 일찍 군대를 다녀오고 서울에서 건설회사에 취직하여 열심히 일했다. 그는 건설업의 노하우를 얼른 익힌 다음에 작은 건설업체를 만들어 직접 경영에 뛰어 들었다.

한국의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는 건설업의 황금시대이다. 전후 복구사업이 계속되었으며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사업이 산업공단 및 고속도로 건설과 함께 진행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요한 사장은 젊은 나이에 성에스더와 결혼하고 두사람은 건설분야에서 큰 성공을 거둔 것이다. 그 다음 그들은 자신들의 고향과 모교를 위하여 의미 있는 투자를 하기를 원했는데 그것이 우창윤과 같은 출중한 인재를 잘 키우는 그러한 장학사업이었다;

우창윤에게 서울의 재수학원에서 공부하도록 계속 재정지원을 하면서 그 대가로 자신들의 딸 기한나의 공부를 도와주도록 조치한 것이다. 그 일이 우창윤이 서울 법대생이 되고서도 계속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그는 5월부터 엄청 바빠지고 있다.

왜냐하면, 우창윤이 모친을 서울에 모실 요량으로 돈을 더 벌고자 결심하고 자신이 다녔던 재수학원을 찾아가서 과외반을 부탁하였기 때문이다. 학원에서는 대 환영이다. 서울법대에 우수하게 진학한 선배가 직접 과목을 맡아서 가르친다고 하니 그것이 재수생들에게 인기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창윤이 대학에서 공부를 하면서 매일 1시간씩 한나양을 가르치고 또한 하루 2시간을 학원에서 강사생활을 하고 있다. 인기강사이기에 돈을 많이 받고 있다. 따라서 자신감이 생긴 우창윤이 서울 종로구에서 한식당을 경영하고 있는 정종수의 부모님을 찾아가서 개인적으로 부탁을 한 것이다.

정종수의 양부모인 정한모 내외는 어릴 때부터 아들과 절친이며 효자인 우창윤을 참으로 좋게 보고 있다. 따라서 기꺼이 큰 방 하나를 내어준다. 그 결과 우창윤이 경주에서 모친을 모시고 와서 서울에서 함께 살게 된다.

물론 기회장의 집을 나왔지만 그 집 딸 기한나의 공부지도는 계속하고 있다. 그런데 우창윤이 대학교 3학년이 되자 기한나가 여고 3학년이다. 우창윤이 지난 4년간 그녀를 잘 가르쳤기에 1973 1월에 이화여대 영문과에 기한나가 합격을 하게 된다;

그러자 기회장 부부가 우창윤의 공을 치하하면서 두둑하게 용돈을 챙겨준다. 우창윤이 집에 와서 돈봉투를 열어보니 만원권이 아니라 10만원권 수표를 가득 채워준 것이다. 어떻게 작은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거금을 준 것일까?... ;

그렇게 크게 호의를 베풀어 주었기에 우창윤은 비록 한나를 가르치는 일이 끝났지만 기회장의 집을 명절 때마다 방문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기회장은 마치 우창윤의 부친처럼 그렇게 그를 기꺼워하면서 반기고 있다. 그것이 장차 우창윤의 미래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될지 그때는 아직 정확하게 알지를 못했다…

한편, 정종수는 서울 법대에 다니면서 진작부터 사법고시 준비를 하고 있다. 그는 재수를 하여 입학하였기에 마음이 바쁜 것이다. 일년간 늦었기에 빠른 고시합격으로 그것을 메꾸고자 작심한 것이다;

 그런데 같은 집에 살고 있는 우창윤은 과외를 많이 하고 있기에 고시준비가 늦은 편이다.

그리고 서울대 교양과정부를 가까운 공릉동에서 하숙을 하면서 편하게 다니고 있는 송원길은 여름방학에 고향 경주로 내려가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성적이 좋지 못하여 두 과목이나 ‘F학점’을 맞았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런 것일까?...

그 이유는 한마디로, 대구의 명문 사립고등학교에서 그것도 서울대 특별반에서 죽어라고 3년간 공부만 하다가 그 목표를 막상 이루고 나니 갑자기 허망한 상실감이 찾아온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 것일까?...

사실 긴 안목에서 바라볼 때, 인생의 목표라고 하는 것이 명문대학 합격에 있는 것이 아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천천히 인생의 목표를 성취해 나가야 한다.

그런데 그만 송원길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동안 서울대 합격이 절대적인 가치가 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것이 달성되고 나니 인생의 목표가 사라진 자리에 일종의 허무감이 크게 자리를 잡고 만 것이다.

19713월초에 동숭동 문리대 운동장에 모여서 입학식을 했는데 그 자리에 서서 3천명 신입생들의 면면들을 보니 별로 특별해 보이지가 않는다. 그리고 입학식도 별로 거창해 보이지 않는다. 그 자리에 서기 위하여 지난 3년간 죽도록 공부만 한 자신이 한심하게 보인다.

그렇게 생각이 되자 그때부터 송원길이 그만 휘청거리고 만다. 기독교학교인 고등학교를 졸업하였기에 마치 청교도와 같이 엄격하게 자신을 관리하던 송원길이 그 제동장치가 벗겨져 버리자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친구들을 사귀면서 슬슬 공부와 멀어지게 된다.

인생의 목적을 잃어버린 그가 할 수 있는 일들이 그런 것들인가 보다. 그 결과 한학기를 마치고 보니 과락이 두과목이나 발생한다. 그것은 당연한 결과인데 하숙집에서는 그만 고향에 내려가지 못하고 덩그러니 혼자 남게 되는 우스꽝스러운 존재가 되고 만 것이다;

보충수업을 듣고 있는 여름 두 달 동안에 송원길이 교양과정부 캠퍼스에서 혼자 깊은 사색에 빠진다. 그는 불굴의 의지로 다시 일어나서 달리고자 한다. 그래서 긴 안목에서 하나의 뚜렷한 목표를 세운다. 그것이 바로 나는 4년간 대학생활을 통하여 평생 살아갈 인생의 가치관, 세계관, 인생관의 기초를 확실하게 마련할 것이다라는 것이다;

그때부터 송원길은 바쁘다. 공대에서도 학점을 놓치지 아니할 정도로 공부하고 있지만 기독학생회 활동에 열심이고 교양과목으로 제공하고 있는 사회과학의 여러 과목의 개론강의에도 빠짐없이 수강하고 있다.

그와 같이 4년을 지내는 동안에 그의 사고의 폭이 넓어지고 성경말씀에 기초한 확실한 신앙관이 자리를 잡게 된다. 그리고 그가 섭렵한 사회과학의 여러 과목들이 그의 인생을 공대생이 아니라 다른 길로 훗날 인도하는 길잡이가 되고 만다.

한편, 1972 1월말이 되자 낭보가 날아든다. 김법승이 마침내 서울대학에 합격한 것이다. 이번에는 철학과가 아니라 종교학과이다. 우창윤, 정종수, 송원길이 모두 모여 김법승의 합격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드디어 골목길에서 함께 뛰놀던 경주의 4꼬마가 전부 서울대학생이 된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 옛날 그 도사의 예언이 제법 맞아 들어가는 것 같기도 하다. 그 도사가 어떻게 그들 4꼬마가 하나같이 경주 남산의 보석인 것을 알아챌 수가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꼬마시절의 ‘사바 사바 사바하’의 주문처럼 알 수가 없는 일종의 마법과 같은 일이다. 그때 그 도사는 ‘천수경과 법화경’을 운운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일까? 그 점을 깊이 생각하고 있는 인물이 4사람 가운데 특히 김법승이다;

그는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를 한번 알아보고자 한다. 그래서 종교학과에 출석하는 대학생활 중에 ‘불교’의 경전에 관하여 나름대로 공부를 하고 있다. 그것이 과연 김법승의 장래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