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58강(요6:41-47)(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3. 18. 20:49

요한복음 강해 제58(6:41-47)

작성자; 손진길 목사(로토루아순복음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518()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6:41-42)

 

예수님은 자신의 신성(神性,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에 대하여 한 마디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6:51). 영생이라는 것은 항상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나누어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진실로 신성을 소유하고 있는 자입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어서 성령이 임재했던 왕이나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 등이 많이 있어왔지만 그 신성을 일반백성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는 자는 결코 없었습니다. 신성의 대표적인 특징인 영생을 감히 백성들에게 나누어줄 수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창조주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1:31-34, 3:34-36). 결코 그것은 보통사람과 똑같은 피와 살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나사렛 예수의 입장에서는 가당치도 아니한 헛소리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늘 날에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예수님 당시에 그것도 고향 가까운 갈릴리 지역에서야 오죽이나 했겠습니까? 그래서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자신의 신성에 대하여 언급을 하자 유대인들이 의심의 눈초리로 서로 수군거리고 있습니다;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6:41). 유대인들의 반응은 실로 당연한 것입니다. 의심의 여지가 없이 예수 그리스도는 완벽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갈릴리에서 그들과 함께 성장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이 영생의 존재인 살아있는 떡이 될 수가 있으며 또 그 영생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가 있다는 것입니까? 유대교사상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신성과 인간의 인성(人性)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될 수도 없으며 인간이 하나님이 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성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에 대하여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아 한시적으로 머물 따름입니다”. 성령의 은혜가 임하였다고 하더라도 당사자가 그 성령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임재하거나 떠나가는 것은 모두 야훼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께서 좌지우지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결코 터럭 하나 만질 수도 없으며 성령에게 명령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그 성령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줄 수는 도저히 없는 것입니다. 유구한 유대교의 역사 가운데 그러한 일이 발생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창조주 야훼 하나님만이 가능하신 일을 일개 나사렛 시골출신 선지자 예수가 행할 수가 있다고 말하고 있으니 신성모독에 해당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 사건이 예루살렘에서 발생을 했다고 한다면 유대인들이 산헤드린 공회에 당장 보고를 하고 나사렛 예수는 십중팔구 종교재판에 회부가 될 것입니다(5:18).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예수님의 홈 그라운드인 갈릴리의 가버나움 회당에서 벌어진 일이므로 한 바탕의 논란에 그치고 있습니다(6:59). 단지 의심을 품게 된 상당수의 백성들과 제자들이 예수를 더 이상 따르지 아니하고 각자 집으로 떠나갔을 따름입니다(6:66).

예수님이 완벽하게 사람의 특징인 인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고향사람들이 너무나 잘 증거를 하고 있습니다;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6:42). 마침 유월절 기간인지라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갈릴리 북쪽의 대도시 가버나움에 자리를 잡고 있는 큰 회당에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참석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6:4, 17, 24, 59). 또한 그 가운데에는 예수님의 동네 친구도 있었던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그들의 증언에 의하여 가버나움 회당에서는 나사렛 출신 선지자 예수가 확실한 사람인 것이 증명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의 특별한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지 아니한 그들로서는 예수에게서 신성이 아니라 인성만을 발견할 수 있을 뿐입니다(1:26-45, 4:28-30). 지금은 예수님의 공생애 두 번째 해입니다. 한 해 전인 첫 번째 해에도 고향마을을 방문했다가 예수님은 자신의 신성의 능력을 별로 발휘할 수가 없었습니다(4:44, 13:54-58). 그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의 신성을 믿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믿지 아니하면 예수님의 신성의 능력, 곧 하나님의 기적이 전개될 수가 없습니다. 단지 백성들의 불신앙을 징계하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만이 임할 뿐입니다(11:23-24).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하는 것은 베드로와 같은 신앙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간단한 신앙고백이면 됩니다(16:16). 그리할 때에 비로소 예수님의 신성이 그 땅에 능력으로 임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강림과 내주 역사하심이 신앙고백을 하는 성도들에게 있게 될 것입니다(2:1-4).        
       

불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신성(6:43-46)

 

  이사야 선지자가 미래의 예루살렘 성에 관하여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54:11-17). 그 가운데 이사야는 특별히 네 모든 자녀는 야훼의 교훈을 받을 것이니 네 자녀에게는 큰 평안이 있을 것이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54:13). 그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님이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의 깨달음을 얻은 자들이 자신에게 나아올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6:45). 구체적으로, 히브리 성경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고 있으며 그러한 깨달음을 얻은 자들은 하나님에게 이끌리어 반드시 자신에게 나아오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6:44a, 45). 그리하면 예수님은 자신에게 오는 자에게 두 가지를 주겠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하나님 아버지를 볼 수 있게 해준다는 것입니다(6:46). 둘째는 마지막 날에 다시 살려주는 것입니다(6:44b). 그것은 부활과 영생을 주겠다는 말입니다. 따지고 보면, 살아 생전에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 신성입니다. 그리고 죽은 다음에 부활과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 또한 신성입니다. 생전에 하나님 아버지를 볼 수가 있고, 죽더라도 다시 살아나서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이 완전한 신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오는 자는 그러한 완전한 신성을 얻을 수가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히브리 성경말씀의 공부를 통하여 메시아의 오심을 알게 되고 하나님께 간구함으로 장차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오게 되는 자들은 불완전하지만 여전히 상당한 신성을 얻게 된 자들입니다. 그와 같은 신성의 발전을 염두에 두고서 성도의 삶을 살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성도들은 불완전한 신성에서 완전한 신성으로 발전되어 나가는 자들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단계론적 인식을 가지고 바라보면, 칭의(justification), 성화(sanctification), 영화(glorification)의 의미가 바로 불완전한 신성에서 완전한 신성의 획득으로 나아가는 단계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사족을 더하자면, 구약시대에 활동을 했던 성령의 사람들은 나름대로 신성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그것은 불완전한 것이었으며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게 되면 비로서 완전한 신성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도 여기서 시사를 받을 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11:13-16,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