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57강(요6:37-40)(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3. 18. 20:47

요한복음 강해 제57(6:37-40)

작성자; 손진길 목사(로토루아순복음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518()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6:37a)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3:16a). 그러므로 사람으로 태어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3:16b-17). 그런데 많은 세상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아니합니다(1:11). 일부만이 예수님께 나아옵니다(1:12).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얻게 되는 자를 예수님은 본문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6:37a). 그리고 하나님의 뜻으로 내게 붙여준 자를 결코 내어쫓지 않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6:37b). 왜 그와 같은 이상한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몇 가지 이유와 사연을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목자장이 되시는 예수님 역시 목양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모두 목양의 대상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예수님을 목자로 영접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아주 일부만이 예수님에게 나아오며 목자로 따르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비유를 하자면 예수님이 양육을 하고 치리(治理, 하나님 말씀의 이치에 맞게 다스리는 것)를 할 수 있는 양으로서 자신의 우리에 들어온 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내 어린양또는 내 양이라는 용어를 나중에 사용하고 있습니다(21:15-17). 둘째, 예수님의 양의 우리에 양을 넣어주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6:37). 그러므로 양을 찾아서 자기 우리에 넣겠다고 목자가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렇게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면, 노아의 방주로 나아오는 동물들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쌍쌍이 방주로 나아오도록 조치를 하고 있습니다(7:9, 15-16). 노아의 가족이 그 많은 동물들을 구원의 방주에 태우고자 일일이 뛰어다닌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라는 표현도 나타나고 있습니다(1:13). 따라서, 예수님의 우리에 이미 들어온 자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도하여 한 사람도 낙오하지 아니하게 그 우리에 넣어 주었다고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일단 예수님의 양이 되면 그 때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믿음이 성장을 하게 될 것입니다(1:12). 셋째, 양들이 처음부터 목자의 말을 잘 듣지를 아니합니다. 염소만큼은 아니지만 양들도 상당히 호기심이 많고 자기들끼리 대장을 정하여서 이리저리 몰려다니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잠시라도 목자가 자리를 비우게 되면 어느 사이엔가 우리를 벗어납니다. 자기들 중에 가장 재미나는 구경거리나 놀이를 소개해주는 자를 인솔자로 삼아서 줄줄이 울타리를 뚫고서 우리를 벗어나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자와 양들 사이에는 신경전이 일어나고 긴장감이 조성이 됩니다. 그럴 때는 문제가 되고 있는 양의 우두머리를 양의 우리에서 끌어내버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아니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러한 양마저 양육하고 치리를 잘 하도록 하나님 아버지가 의도적으로 자신의 양의 우리에 전입을 시킨 것이기 때문입니다. 넷째,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주시는 양을 모두 맡아서 목양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스스로 양의 우리에서 빼내어 가는 양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하지 아니하겠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양으로 표현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의 백성들입니다. 그들의 양육을 일부 그리스도와 그 제자들에게 위탁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위탁의 때와 기한은 알지를 못합니다(1:7). 언제까지 맡기실지 또는 언제 전출을 해나가실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구적인 나의 양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 아버지의 양이며 그 분의 뜻에 따라서 오고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내 뜻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할 뿐입니다(6:38). 그렇다면 목자에게 맡기신 진짜 사명은 무엇일까요? 그 다음 단락에서 예수님이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6:38-40)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명입니다. 그 사명을 예수님은 가장 알기 쉽게 한 구절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내게 주신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6:39).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6:40); 첫째,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 마지막 날에 예수님이 그들을 다시 살리는 것입니다. 잘 살펴보면, 두 가지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맞습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은 생전에 자신의 우리에 하나님이 넣어 주는 양들에게 영생을 주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백성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 뜻은 이미 요한복음 제3장에서 다음과 같이 선포가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 그렇다면 영생을 얻게 하는 그 방법이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행보와 직결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본질적으로 구원과 영생을 주는 복음으로 풀이하여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은 대속의 삶을 살아가는 야훼 하나님의 종이 헌신과 희생을 할 때에 효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믿었습니다(52:13-53:12, 24:44-48). 이사야의 예언 그대로 자신을 십자가 대속의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 결과 제자들에게 오순절 성령님의 강림이 있게 되었습니다(24:49, 1:8, 2:1-4).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도 성령 안에서 제자들에게 영원히 말씀으로 임재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14:16-19). 아들과 함께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과 함께 제자들에게 거처를 함께 하는 놀라운 새 시대가 전개되고 있습니다(14:20, 23). 그것이 이 땅에서 맛보는 구원과 영생의 길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마지막 날에 성도들을 다시 살리는 역사가 남아 있습니다. 죽음의 잠을 자고 있는 성도들을 무덤 속까지 찾아 오시겠다고 예수님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5:28). 그것이 진리라는 사실을 베다니 나사로의 집에서 실제로 보여주기도 합니다(11:43-44). 모두 살려서 심판대 앞에 세우고 있습니다(5:29). 그런데 심판의 권한을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위임을 받고 있습니다(5:22). 따라서 생명책에 기록이 되어 있는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기 때문에 이미 구원과 영생을 확보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인도로 심판대를 그대로 통과할 것입니다. 그 대목을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5:24). 결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의 성취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되고 부활하여 승천하게 되는 미래가 열리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 창조주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를 동시에 찬양하면서 거처를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5:12, 1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