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54강(요6:22-27)(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3. 17. 04:57

요한복음 강해 제54(6:22-27)

작성자; 손진길 목사(로토루아순복음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516()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6:25)

 

갈릴리 호수 동편 잔디밭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던 예수님이 다음날 그곳에 아니 계신다고 하는 사실이 백성들에게 알려졌습니다. 어제까지 백성들이 본 것은 잔디밭 가까운 호수 가에 배가 한 척 정박해 있는 것이었습니다(6:22a). 그 배에는 예수님의 제자들만이 타고서 가버나움으로 이동을 했습니다(6:22b). 그러므로 예수님은 분명히 배를 타시지도 아니하셨고 현지 산에 그냥 남아 계신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바리새인과 같은 랍비들은 일주일에 이틀을 금식을 하고 기도에 열심을 보이고 있었습니다(5:33, 18:11-12). 비록 외식적인 기도라고 하여 그리고 죄인들과의 차별성을 강조하고 있는 기도라고 하여 예수님의 질책을 받은 바가 있다고 하더라도 히브리 성경의 선생인 바리새인들은 그 모습이 경건해 보이고 엄숙했습니다. 그리고 금식과 기도에도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겉보기에는 거룩해 보였습니다(6:16, 9:14). 그러한 바리새인 랍비들을 자주 보고 있었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예수님도 그러하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밤새 금식을 하시면서 산에서 기도를 하신 것으로 여기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백성들의 상식적인 판단과 예상을 뛰어넘는 일이 바로 그 다음날 발생을 하고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고 있었던 현장 가까운 호수에는 분명히 한 척의 배만이 정박해 있었습니다(6:22).  그 배를 타고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저녁에 북쪽으로 이동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산으로 피신을 하신 후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하신 행적이 전혀 없습니다. 설혹 호수 가에 내려오셨다고 하더라도 인근에서 다른 배를 구해서 타신 흔적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수님이 현지에서 사라지고 아니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 이튿날 백성들이 발견한 사실입니다(6:24a).

백성들의 눈 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예수님을 백성들이 찾고 있습니다. 특히 호수 서쪽 신도시 디베랴에서 배를 타고서 동편 잔디밭에 와서 집회에 참석을 했던 부자들이 더 열심입니다(6:23). 그들 부자들이 특히 하늘 곳간을 여시는 예수님의 기적에 대하여 관심이 더 많습니다. 그들이 먼저 배를 타고서 일단 북쪽 가버나움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찾아갔습니다(6:24). 예수님이 현지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기에 그 단서라도 발견하기 위하여 가버나움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찾아 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발견한 것입니다(6:25a).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바리새인 랍비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는 전혀 인식을 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적인 생각으로 그냥 의아해서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6:25b).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실들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통상적인 바리새인 랍비들과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 분은 호수 위를 걸어서 건너갈 수 있는 능력자입니다. 둘째, 자신들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예수님을 찾아 나서게 되면 그 의도를 간파하시고 예수님은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져버립니다. 그 종적을 발견할 수가 없게 됩니다. 셋째, 제자들이 있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다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 뜻을 풀이하자면, 장차 제자들을 통하여 그 스승이신 예수님을 발견할 수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 가운데 그 모습을 보이고 있는 예수님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백성들에게 유한한 목숨을 유지할 수 있는 양식을 주고자 이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구원을 주시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6:26)

 

    갈릴리 호수 동편에는 가난한 백성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이 육로를 통하여 가버나움으로 예수님을 찾아온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 대신에 신도시 디베랴 사람들이 배를 타고서 가버나움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찾아 갔다가 그곳에서 기이하게도 예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6:23-25). 그들 부자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연출했던 에수님의 그 능력에 관심이 집중이 되고 있습니다. 그 점을 예수님이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6:26). 표적을 정확하게 보았더라면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임을 알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능력을 행하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나다나엘이나 니고데모처럼 고백하는 것이 옳습니다(1:49, 3:2).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창조주 앞에 똑 바로 서서 자기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어야 마땅합니다. 구체적으로, 자신을 이 세상에 보내어서 부자로 살게 하고 계시는 창조주께서 앞으로 자신의 인생 가운데 어떠한 삶을 살기를 원하고 계시는지를 먼저 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노력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그들의 관심은 먹을 양식을 기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는 랍비 예수님의 그 초능력에만 집중이 되고 있습니다. 그 능력을 배울 수만 있다면 더 큰 부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권력도 얻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임금이 되기 싫다면 그 능력을 배워서 자신들이 권력을 장악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사도들로부터 하나님의 능력을 돈으로 사고 싶어했던 사마리아의 마술사 시몬의 행적을 미리 보는 것과 같습니다(8:17-24). 그러한 의도로 접근하고 있는 그들을 예수님이 불쌍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영원한 양식을 얻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6:27). 영생을 얻게 하는 양식을 예수님이 주실 수 있다고 정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구원과 영생을 백성들에게 주기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가 이 세상에 파송한 독생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오로지 구원과 영생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을 찾아가야 할 것입니다. 다른 지엽적인 문제나 속세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접근하는 것은 지적을 당할 때에 심히 부끄럽게 됩니다. 그러할지라도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영원한 양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진심으로 일러주시는 예수님을 본문에서 만날 수가 있습니다. 참으로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