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52강(요6:11-15)(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3. 16. 08:21

요한복음 강해 제52(6:11-15)

작성자; 손진길 목사(로토루아순복음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515()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6:11)

 

예수님께서 떡을 가지시고 하늘을 우러러 무엇을 아버지 하나님에게 기쁨으로 기도하셨을까요? 왜 그것을 사도 요한은 축복의 말씀인 축사라고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축사’(祝辭)는 경사스러운 날에 축하를 해주는 말씀입니다. 흔히 졸업식장에서 학위를 받는 자들을 위해서 관련 단체장들이 참석을 하여서 축사를 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졸업식 후에는 소정의 과정을 이수하기 위하여 그 동안 열심히 노력했던 졸업생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축하의 잔치를 열어주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사도 요한은 오병이어’(五餠二魚,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의 기적에 대하여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한 마디로 예수님의 축사와 더불어 아버지 하나님께서 회중들에게 베풀어 주신 일종의 천국잔치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들 이만 명 가량이나 되는 백성들은 하루 종일 식사를 할 생각도 하지 아니한 채 예수님으로부터 천국의 복음의 메시지를 듣고 그 복음의 말씀이 능력으로 역사하여 이제는 마음의 평안을 회복하고 몸의 병까지 치유를 받게 된 자들입니다. 그들은 사도 요한의 기록에 따르면, 이제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로서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지게 된 자들로 볼 수가 있습니다(1:12-13). 그러므로 축하를 받아야 마땅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축사가 있고 하나님의 베푸심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들을 자녀로 맞이 하시는 축하의 잔치자리를 마련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돌아온 탕자를 맞이하고 다시 아들로 대접하는 천국의 잔치자리를 미리 보는 듯 합니다(3:29, 15:23-24).

그렇다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 땅에 가져오고 있는 예수님의 기도의 내용이 무엇이었는가를 조금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첫째, 그들 백성들이 열심히 천국의 복음을 듣고 치유를 받았다는 사실을 아버지 하나님께 먼저 보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이제는 그들에게 식사가 필요하다는 기도입니다. 하늘 곳간을 열어서라도 먹이시고 천국의 잔치를 베풀어 달라는 부탁의 기도입니다. 그것은 굉장히 능력이 있는 기도이며 축사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의 의중과 일치되는 보고이며 요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일치가 되고 있다는 증거로서 이 땅에 현실적으로 베풀어지고 있는 것이 소위 오병이어의 기적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이 원하는 대로 떡과 물고기를 흡족하게 주고 있는 것일까요?(6:11) 그것도 얼마나 많이 주었는지 먹고도 남고 있습니다. 떡의 경우에는 먹고 남은 조각을 모은 것이 열두 바구니나 되었다고 후술하고 있을 정도입니다(6:13). 참고로 모세가 기록한 출애굽기의 기록을 참고해보면, 광야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일 새벽에 하나님께서 만나를 이슬처럼 내려주셨습니다(16:14-21). 그들 백성 한 사람이 거둘 수 있는 만나의 양은 식구 한 사람당 2리터에 해당하는 한 오멜씩입니다. 욕심을 내어서 더 많이 거두어보아야 다음 날 먹을 수가 없습니다. 하루가 지나면 바로 부패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 오멜은 하루의 정확한 녹말의 섭취량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배가 약간 부를 정도이지 원하는 대로 마음껏 먹고 부스러기를 남길 정도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오병이어의 기적의 현장에서는 왜 떡을 원하는 대로 많이 주시고 부스러기가 그렇게 많이 남도록 역사를 하신 것일까요? 그것도 떡의 부스러기만이 언급이 되어 있고 물고기의 먹고 남은 조각 이야기는 아예 생략이 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기본적으로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피조세계를 무척 사랑하시는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므로 자원의 낭비를 원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렇지만 여기 오병이어의 기적의 자리에서는 하늘의 곳간을 활짝 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만큼 하나님의 기쁨이 크시고 천국의 자녀가 된 그들을 이 땅에서도 배부르게 먹이시기를 원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 기쁨은 그 자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부스러기는 마치 아브라함이나 이삭의 우물물과 같이 지역사람과 이방인들에게도 큰 복으로 나누어질 것입니다(12:2-3, 26:18-22, 28, 7:28). 그리고 모세시대에 만나의 항아리만이 증거궤에 보관이 되고 메추라기는 생략이 되고 있습니다(16:32-34) 여기서는 떡 부스러기만이 바구니에 모아지고 물고기는 생략이 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주식(主食, main dish)과 부식(副食, side dish)의 차이로 보입니다. 먹거리의 대표를 주식으로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목숨을 유지할 수 있는 그것이 먼저 중요한 것이지 식탁을 풍성하게 하거나 생활의 여유를 말하고 있는 부식류는 그 다음의 문제임을 말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관심사가 우선 주식의 풍족한 제공에 먼저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계문제에 대한 조치가 더 우선이고 풍성하며 그러한 생계문제를 해결해달라는 성도의 기도는 더 적극적으로 응답이 되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6:15)

 

예수님이 약 이만 명의 군중들에게 설교도 하시고 병도 고쳐주신 장소는 큰 잔디밭입니다(6:10). 그 잔디밭은 배산임수’(背山臨水, 뒤로는 산이 둘러있고 앞에는 물이 있는 장소)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수많은 사람들에게 말씀하기 쉽도록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서 제자들과 함께 앉아 있습니다(6:3). 그런데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자 군중들이 술렁이기 시작을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만 임금으로 모시게 되면 자신들의 먹고 사는 문제가 완전히 해결이 된다는 기대에 부풀고 있습니다(6:15a). 그 사실을 눈치채시고 예수님이 즉시 뒷산으로 피신을 하고 있습니다(6:15b). 비록 먹고 사는 문제가 절실한 것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영적인 양식으로 정확하게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하나님의 영을 그 코에 불어 넣자 사람이 생령이 되었습니다(2:7). 그러므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육체를 위한 양식과 영혼을 위한 양식이 모두 필요합니다. 그런데 세상사람들은 오로지 육체를 위한 양식에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백 년 안팎의 짧은 인생을 이 세상에서 보내게 되는 인간의 삶의 목적은 구원과 영생의 획득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우선순위가 영생의 획득이 가장 먼저이고 그 다음이 목숨유지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생각은 정반대입니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의 해결이 급선무입니다. 구원과 영생은 받으면 좋고 안 받아도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1:11, 5:40). 이 세상에서 한 평생 잘 먹고 살다가 가면 그만이지 죽은 다음의 일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악한 영들이 세상사람들의 생각을 그렇게 이끌고 있습니다(2:2, 6:12).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악한 영들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그들의 요구대로 세상적인 문제의 해결에만 전념하는 임금으로 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사도 바울의 용어를 빌리면, 그것은 초등학문에 사로잡히고 있는 것입니다(4:3, 9, 2:8, 20). 성숙한 신앙인이 되고 보면, 예수님을 자신의 생활문제의 해결사로만 생각하고 일일이 청탁을 했던 일들이 부끄럽게 여겨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가르치심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제자를 양성하는 일에 전념을 한다면 나머지 자신의 일들을 주님께서 해결하여 더하여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 결론적으로, 성도들의 가장 우선적 관심사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깨달아서 자신의 생각을 바꾸고 살아가는 방법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사도처럼 사는 삶입니다(28:18-20, 3:29-30). 구체적으로, 전도를 하고 그리스도의 제자를 양성하는 인생입니다(4:19, 21:15-19). 따라서 어떠한 세상적인 가치나 권력의 작용도 그것에 우선할 수가 없다고 하겠습니다(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