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51강(요6:5-10)(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3. 16. 08:19

요한복음 강해 제51(6:5-10)

작성자; 손진길 목사(로토루아순복음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514()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6:6)

 

  갈릴리 호수 동쪽 잔디밭에 장정만 헤아려보아도 약 오천 명의 무리가 모여 있습니다(6:10). 그들은 온종일 나사렛 예수로부터 천국이 임하고 있다는 복음의 이야기를 들었으며 또한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9:11). 그 군중의 수는 남녀노소를 모두 계산해보면, 약 이만 명이 됩니다; “계산의 방법은 20세 이상 50세 미만인 남자 장정의 수가 5천 명이므로 20세 미만의 미성년자와 50세 이상 나이가 많은 노인의 수가 그만큼 또 있다고 보면, 남자의 합계가 약 일만 명이 됩니다. 그렇다면 여자의 수도 약 일만 명이 될 것입니다. 사람의 경우 남성과 여성의 비율은 거의 일대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계산을 해보면, 남녀노소 모두의 합계는 약 이만 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열심히 예수님의 이야기를 경청했는지를 의사 누가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날이 저물어 가매 열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들이니이다”(9:12). 그들은 날이 저물어 가는 것도, 배가 고픈 것도,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도 모두 잊어버리고 오로지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고침을 받기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천국의 모습을 미리 보는 듯합니다. 그렇게 천국의 이야기를 듣기를 좋아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기를 원하는 자들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좋아하십니다(12:1-2). 그래서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먹이고 입히시며 이 땅에서 제사장의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십니다(1:12-13, 19:5-6, 29:5-6).

 

그러한 사실을 깨닫는 것이 기적과 이적을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모세가 이미 신명기에서 말하고 있습니다(29:2-6).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아예 자신의 친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15:13-15).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분별하여 그 뜻에 맞게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고자 하는 자가 바로 예수님의 친구이며 그러한 자를 만들어내기 위하여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겠다고 하는 각오를 밝히고 있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들어 내기 위하여 독생자의 목숨까지 내어 놓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의 제자들이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표적으로 빌립에게 시험을 치르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에게 먹이겠느냐?”(6:5).

 

  한 마디로, 들판 한 가운데에서 떡을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만 명이나 되는 무리를 굶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들은 천국복음을 듣기를 좋아했던 무리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있는 백성에 해당합니다. 바로 그러한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에게 나타나고 있습니다(6:11). 필요하다면, 또 그와 같은 자들에게 하늘의 곳간이 열릴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미 말씀을 드린 대로, 그와 같은 이치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자신의 제자들이 알고 있는가를 예수님이 알고 싶어 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 사실을 시험을 통하여 깊이 인식하게 하는 것이 앞으로 엄청나게 중요해지기 때문입니다. 장차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님의 양을 치라고 제자들을 목자로 발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21:15-17). 예수님은 자신의 양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풍성하게 먹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10:10). 제자들도 목자가 되어 그렇게 사역해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목자들을 먹이고 입히며 돌보시겠다는 것입니다(6:11-13, 10:5-11). 그러한 사실을 미리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알게 해주고자 하고 계십니다. 효과적인 인식의 전환을 위해서 그것을 시험문제로 삼고 있습니다. 정답을 내지 못하고 틀린 경우에는 더 큰 깨달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왜 자신의 생각이 틀렸는지를 확인하게 되는 귀중한 시간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6:7)

 

빌립은 예수님이 벳새다에서 직접 선발한 제자입니다(1:43-44).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자마자 가나에 가서 자신의 친구 나다나엘을 권하여 주님에게 데려온 사람입니다(1:45-46). 이미 전도자로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 탁월한 모습을 보인 빌립입니다(4:19). 이제는 목자로서의 재능을 갖추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빌립에게 먼저 시험을 치르게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빌립의 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6:7). 세상적인 셈법으로 보면, 빌립의 답은 정답입니다. 일 데나리온이 장정의 하루치 품삯이므로 그것을 약 백 불이라고 보면, 2불짜리 식빵 50봉지를 살 수가 있고 그것은 100명에게 빵을 제공해줄 수 있는 값어치입니다. 그러므로 200데나리온이면 약 2만 명의 사람들에게 일단 빵을 먹일 수 있는 큰 돈입니다. 그렇지만 어디에서 갑자기 그 많은 빵을 구할 수가 있느냐?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돈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토지에게 생산할 힘을 계속 주지 아니하시면 먹거리를 구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옛날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오늘 날 21세기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서 자연재해가 빈발하고 공해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토지는 화학비료에 의하여 생명력을 착취 당하고서 날로 쇠약해지고 있습니다. 그나마 생산된 먹거리도 집단적인 이기주의 때문에 제대로 분배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잉소비를 하는 나라가 있고 아예 굶주리고 있는 나라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오병이어의 기적의 현장으로 다시 달려가서 그 의미가 과연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보아야만 합니다. 어디서부터 사람들의 생각을 뜯어 고쳐야 하늘의 곳간이 다시 열리고 자연과 토지가 정상적인 생명력을 가지고 생산활동을 할 수가 있게 될까요? 과연 그 정답은 무엇일까요?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6:9)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안드레가 가지고 온 어린아이의 도시락과 예수님의 축사입니다(6:8-13). 왜 하필이면 안드레가 어린아이의 것을 가지고 왔을까요? 안드레는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입니다(1:40). 그는 선지자가 되고자 세례 요한의 생도가 되어 있었던 사람입니다. 생업을 떠나서 하나님의 선지자가 되고자 했던 안드레는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바친 자입니다. 그리고 어린아이는 아무런 조건이 없이 자신의 도시락을 내어 놓았습니다. 적은 것이지만 함께 나누고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순전한 마음이 역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드레와 같이 헌신하고자 하는 삶이 전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할 때에 예수님의 축복이 임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곳간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날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헌신하겠다는 의인들이 있고 또한 사람들이 자신의 것을 비록 작은 것이지만 이웃과 함께 나누고 함께 살아가겠다고 순수한 마음으로 결심하고 행동을 한다면 이 땅과 백성들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축복은 다시 예수님 당시처럼 이 세상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18: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