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47강(요5:30-34)(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3. 13. 14:11

요한복음 강해 제47(5:30-34)

작성자; 손진길 목사(로토루아순복음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511()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5:30)

 

판사가 재판을 합니다. 판사는 제 마음대로 판결을 할 수가 없습니다. 피고와 원고 양쪽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다음에 그 사례에 대한 법의 원리를 찾아 내어서 그것을 가지고 판결을 내려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판사의 생각이 재판을 지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법의 정신과 원리가 재판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끌고 있으며 마지막 판결까지 내리게 합니다. 그것을 한 마디로, ‘법치주의’(法治主義)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마찬가지 이야기를 지금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자기 생각대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입니다(5:30a). 자신을 이 세상에 파송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살펴서 그대로 행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기에 예수님의 심판도 의로운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5:30b). 의로운 것, 곧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것이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예언입니다.

예수님은 히브리 성경인 구약에 예언되어 있는 메시아에 관한 예언을 자신에게 적용시키고 있습니다(24:44-49). 그 메시아가 자신이며 그 예언대로 자신은 대속의 죽음을 맞이할 것이고 또 무덤에서 삼 일만에 부활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8:31, 9:31, 10:33-34). 그것은 자신의 생각이나 뜻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의 생각이고 뜻이며 또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이기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장차 그대로 역사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당당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오신 인자’, 곧 사람의 아들 예수님이 만약 자신의 생각대로만 행동을 했다고 한다면 육신을 입고 있는 약점을 가지고 있기에 그것은 세상을 구원하기에 만족스러운 것이 되지를 못했을 것입니다(8:7). 그렇지만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에 굴복을 시키고 있습니다(14:36). 그리고 자신의 뜻보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받들고 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쉬운 방법의 구원이 아니라 가장 견디기 힘든 십자가의 길을 가고자 하고 있습니다(12:27). 그 이유는 오로지 하나입니다. 자신이 제 마음대로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을 한다면 인간의 약점을 가진 자신의 뜻만이 성취가 되는데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을 절대로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재창조의 능력은 오로지 하늘에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것입니다(10:18, 1:7). 따라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하나님의 능력을 이 땅에 재창조의 역사로 동원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맞도록 생각하고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 점을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재삼 강조하고 있습니다;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12:49-50). 그와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은 영생에 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리고 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17:3). 말씀 그대로 예수님은 영생을 얻는 삶의 모범을 이 땅에서 자신의 제자들과 유대인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절대순종의 삶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에만 가능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 속에 하나님의 영이 내주하여 역사하시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예수님의 마음과 생각 그리고 모든 계획을 지배하고 계셨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하겠습니다(6:5-7’심판이유에 대한 반대해석임).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전적인 헌신이 그래서 가능했습니다. 그것이 임마누엘의 은혜이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능력입니다. 그러한 일이 장차 예수님의 제자들의 삶에 있어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죽으심과 무덤 속 부활이 있게 됨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은혜의 시대가 열리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영적인 삶의 모범과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이 있게 될 것입니다(14:16-21, 8:1-4).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17:21). 예수님처럼 사는 인생 그리고 성령님과 함께 동행하는 인생이 시작이 된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이미 수가 성의 여인에게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그 내용은 예수님이 진리, 성령님이 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장차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4:23-24). 그러한 새 시대에 새로운 예배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며 그들은 축복을 받은 인생들입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날에도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서 이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성령님 안에서 자신의 생각이나 뜻보다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구현하는 예배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 증인이 참인 줄 아노라(5:32).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5:34)

 

재판을 하는 법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이 땅에서 행해지는 사람들의 법정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존전에서 행해지는 하늘의 법정이 있습니다. 이 땅의 법정에서는 정의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현행 법규에 맞으면 적법이며 무죄가 되고 법규에 어긋났으면 위법이며 유죄라고 선언합니다. 그것이 사회의 정의를 구현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법정에서 사용하는 법규는 국회에서 만드는 성문법인 대륙법이거나 재판관들이 만드는 것으로서 상식법에 속하는 판례법입니다. 그것들은 주권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만 사회적인 정의를 실현하는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법을 가지고서는 만민의 생명을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나와 너와 우리에게 유리한 법은 우리가 아닌 다른 집단이나 민족에 대해서는 비도덕적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법은 구태여 그것까지 규제하지 아니하며 또한 나라의 법은 그렇게 관할권이 넓지를 못합니다.  그렇지만 하늘의 법정에서 사용하고 있는 법률은 다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구원하고 창조의 세계를 하나님의 뜻대로 운영하고자 하는 법체계입니다. 그렇게 만물과 만민을 살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고 살도록 해주는 것이 하나님의 법의 원리이며 그 법의 정신이 공의라고 하겠습니다. 말씀을 정리해보자면, 세상의 정의와 하나님의 공의는 다른 것입니다. 세상의 정의는 자신이 속한 집단에게 이익이 되면 그만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공의는 창조된 모든 피조물들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그러한 정답을 낼 수 있는 분은 창조주 하나님뿐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의 뜻, 곧 모든 것들을 살리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공의이며 그것이 하늘 법정에서 사용되고 있는 법률의 정신입니다. 그 공의의 정신이 성경말씀 속에 깊은 강이 되어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의 문제는 하늘의 법정에서 다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법정에서 정의이며 무죄라고 선포되는 것보다 하늘의 법정에서 공의이며 의롭다고 선포되는 것이 우선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 집단의 사회적 규정이나 윤리체계에 맞게 행동을 했으면 유죄가 아니라고 판정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정당성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의 증언도 얻게 되고 스스로 그 정당성을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정당성을 하늘의 법정에서는 주장하기가 힘들고 호소력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행동보다는 그 속에 숨어 있는 마음 속의 의도를 더 먼저 더 깊숙하게 통찰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5:28)고 판결하고 계시는데 과연 누가 그 앞에서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할 수가 있을까요? 이제 결론은 하나입니다. 구원을 얻자면 하나님이 무죄라고 증언해줄 수 있는 인생을 사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사회의 정의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공의가 자신의 행동의 기준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통찰하고 있으므로 자신의 생각과 마음 그리고 자신의 계획을 어떻게 하나님의 것에 맞추어나가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무죄판결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그러한 인생을 살다가 갔습니다. 이제는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서 성도들이 그러한 인생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눈과 창조주의 증언을 의식하면서 모든 생각과 행동을 삼가 스스로 말씀으로 규제해나가야만 합니다. 그것이 성도의 거룩한 삶이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