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만난 신구약의 인물들(손진길 작성)

27. 르호보암 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3. 12. 19:18

27. 르호보암 왕

 

(1) 르호보암은 솔로몬 왕의 아들이었다. 솔로몬 왕이 40년간 이스라엘 제국을 통치한 후 별세하자 왕자 르호보암이 41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르호보암이 40년간 왕자로 지내면서 직간접적으로 배우게 된 부왕 솔로몬의 치적과 과오는 다음과 같았다.

첫 째로, 솔로몬 왕의 가장 큰 치적은 국방을 튼튼히 하는 한편(왕상10:26-29) 해상 무역을 통하여 국부를 쌓은 것이다(왕상10:11, 15, 22-23, 9:26-28).

둘 째로, 또다른 치적은 왕궁과 성전 건축 뿐아니라 지방도시와 국경도시 건설에 박차를 가한 것이다(왕상9:10,15-19, 2:4-10).  

셋 째로, 솔로몬 왕의 과오는 크게 보아 두 가지였다. 가나안 족속을 건설 현장에 노예로 부려 먹었으며(왕상9:20-23) 지나친 종교행사(왕상8:63, 9:25)와 사치향락에 빠진 것이 그 하나였다(왕상10:16-21, 11:1-3).

넷 째로, 그는 또한 이방신과 우상을 숭배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큰 잘못을 범했다. 이 때문에 나라의 기틀이 내부에서 부터 무너져 내리는 엄청난 불행을 훗날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왕상11:4-8).

 

(2) 르호보암은 아비 솔로몬의 치적을 답습하는 한편 자기 나름대로 새 시대를 열고 싶었다. 그래서 국부의 원천인 무역항(에시온게벨, 왕상9:26-28)을 지키고자 권력과 군사력을 강화했으며(왕상12:21, 대하12:13) 백성들의 노력동원을 계속 강요했다. 새 시대를 열기 위해서 젊은 인재들을 등용하여 그들의 정책을 밀어 부쳤다(왕상12:8-15). 그 결과 솔로몬 시대부터 강제노역과 무거운 세금에 시달려온 이스라엘 10지파가 다윗 왕조를 버리고 에브라임의 큰 용사 여로보암을 세겜에서 왕으로 삼아 분리 독립을 선언해 버렸다(왕상12:16-20,25-33).

 

(3) 아비 솔로몬 같이 되고 싶었던 욕심도 새 시대를 열고 싶었던 야망도 모두 허사로 돌아가 버리자 르호보암 왕은 실의에 빠져서 아비 솔로몬 시대의 잘못을 되풀이 하고 말았다. 모친인 암몬 여인 나아마(왕상14:21)의 영향을 받았는지 밀곰 등 우상과 아세라 목상을 섬겼으며(왕상11:5, 14:23) 그 땅에 남색 등 성적 타락이 있었다(왕상14:21-24). 호화 사치와 방탕의 모습은 왕비 18, 후궁 60, 아들 28, 60(대하11:21) 이라는 사실에서 잘 엿볼 수 있다.

 

(4) 그러나 르호보암 왕에게도 나름대로 치적은 있었다. 그 것은 국가 비상시에 하나님 앞에 몇 차례 겸손했었다는 것이다. 첫 째로, 왕국 분열 초기에 18만 대군을 동원하여 북쪽 이스라엘 10 지파를 치려고 하다가 하나님의 만류를 받아 들여서 즉시 이를 중지한 것이다(왕상12:21-24). 둘 째로, 애굽 왕 시삭이 6만의 기병으로 예루살렘으로 쳐들어 왔을 때 하나님께 겸비하여 위기에서 벗어난 것이다(대하12:2-12). 셋 째로, 압살롬의 딸 마아가가 생산한 왕자 아비야를 세자로 책봉한 후 다른 왕자들 모두를 지방으로 분산 배치시켜 버림으로써(대하11:20-23) 예상되는 왕자의 난 등 유다 왕국의 분열을 미연에 방지한 것이다. 어쨋든 이와 같은 공로가 있었기에 르호보암 왕은 17년간 왕위에 있었으며 그의 다윗 왕조는 BC586년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당할 때 까지 향후 350년간 더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비상시에만 하나님께 매어 달리고 평상시에는 하나님을 떠나 살았던 르호보암 왕이었기에 조국의 통일은 요원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르호보암 왕은 오늘 날 영적으로 통일의 조건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주는 좋은 사례가 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