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42강(요5:14-18)(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3. 10. 00:06

요한복음 강해 제42(5:14-18)

작성자; 손진길 목사(로토루아순복음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57()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5:14)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균형 있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점이 본문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베데스다못 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후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5:14)고 엄중하게 당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의 평생을 지병과 장애로 신음하고 있는 자가 하나님의 능력을 간절하게 사모하고 있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셨습니다. 간혹 천사가 내려와서 베데스다물을 움직이게 할 때에 가장 먼저 들어가는 자만이 나음을 입게 된다고 합니다(5:4). 그런데 지체장애자이기도 한 그 병자는 도저히 자력으로는 제일 먼저 그 연못으로 들어갈 수 있는 확률이 전혀 없습니다(5:7). 서로 병이 낫고자 몸부림을 치고 있는데 그 누가 자신의 치료를 뒤로 미루면서 그 자를 먼저 살려주고자 할 것입니까? 생존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서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긍휼이 인간사회에서는 전혀 가망성이 없는 자, 이른 바 비자발적으로 소외된 자그 병자에게 향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참고로, ‘자발적으로 소외가 된 자는 스스로 낫고자 하는 의욕이 없는 자입니다. 그 이유는 스스로 자폐행위를 선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발적으로 자폐행위를 선택하고 있는 자들은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기피하며 대단히 이기적입니다. 기본적으로, 인간의 체취와 냄새를 싫어합니다. 사람보다 사이버 공간을 더 좋아합니다. 한 마디로, 몰인격적인 기계적 관계를 선호하며 인간적인 따뜻함이 이미 사라진 자입니다. 오늘 날 공동체의 권위와 질서가 조소의 대상이 되고 개인의 가치와 자유가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는 21세기 포스트 모더니즘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벌써 사이버 공간에서 서로 만나고 있고 극히 필요한 경우 불가피한 대인관계마저도 소위 묻지마 교제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날은 정상적인 인격적인 만남이 일종의 천연기념물이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독생자의 성육신과 예수님의 공생애로 말미암아 가능해진 교회공동체, 곧 인간적인 체취와 사제간의 사사(師事, 스승으로 모시고 가르침을 받는 것)관계마저 그 전통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성령님의 역사가 크게 일어나야만 할 때입니다. 사이버 공간을 사탄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지배를 해야만 할 때입니다. 그 방법은 사이버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생각의 뿌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야 하며 성령님의 역사가 그들의 욕구와 행동을 제어하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측면에서 본문을 들여다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지적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하심을 38년된 병자에게 베풀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죄의 소욕을 이기지 못하게 되면 공의의 하나님이 그를 처벌할 도리밖에 없기 때문입니다(4:6-12). 그 점은 간음현장에서 잡히어 왔던 여자의 경우에서도 동일합니다(8:11). 둘째, 죄의 소욕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사람에게는 없습니다. 인간의 의지나 도덕률 또는 율법의 강제나 득도의 경지로써도 감당할 수 없는 것이 이른바 죄의 소원입니다(4:7, 6:5, 8:21, 10:18, 3:10). 셋째, 죄의 소욕을 이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 능력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그 제자들에게 영적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제 겉사람이 죽고 속사람이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침내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믿는 자의 영과 육을 지배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처럼 이제는 말씀으로 악한 영을 대적할 수 있는 힘을 얻고 있습니다(4:3-11, 6:10-20). 그 일을 위하여 성령님이 강림하셔서 성도들의 속사람 속에 자리를 잡고서 역사하시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그와 같은 장치가 되어 있기에 이제는 성도들이 죄의 소욕을 다스릴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38년된 병자나 간음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이 앞으로 해야만 하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을 하고 성령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은 생애를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게 되는 유일한 구원의 방법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5:17)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으로부터 청지기의 교육을 받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1:26-29, 2:5-9, 15-17). 청지기의 교육을 받고서 만물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관리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파송이 되었다고 하겠습니다(3:20-23).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하나님 아버지의 만민구원과 세상구원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 땅으로 파송이 되신 것입니다(5:30, 6:38).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하늘에서 일을 하시고 이제 땅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을 이 땅에서 실현시키는 일을 하시고 있습니다(6:10). 그와 같은 의미에서 예수님이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5:17)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의 의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교육을 받고 그 뜻을 분명하게 깨달아서 생명을 살리고 돌보는 데 최선을 다하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3:4). 그러한 입장에서 안식일 날에 베데스다 못 가의 38년된 병자를 낫게 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품에서 말씀을 주관하시며 안식을 하셨던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와서 당연히 행해야만 하는 일입니다(1:1, 5:19-21). 그런데 그 점을 유대인들이 크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은 모든 노동행위를 금지하고 좋은 하나님의 말씀만 듣고서 푹 쉬는 날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5:10, 3:1-6). 그 생명의 말씀이 이 세상에서 무엇 때문에 필요한 것인지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창조주 하나님이 자신의 권한을 청지기와 같은 아들과 선지자에게 필요한 한도 내에서 위임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인정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유대교리에 따르게 되면 창조주는 하늘의 보좌에 계시고 이 땅에 오셔서도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서만 갇혀 지내시게 됩니다. 나머지 일은 모세의 율법을 가졌다는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모두 행사하게 됩니다. 그들이 정한 세부규칙이 율법의 이름으로 백성들을 통제하고 있습니다(23:1-36). 그와 같은 유대교의 종교적 행태는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그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선민들만의 특혜적인 구원을 강조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근원적으로 살피고 구현하고자 하는 노력이 제도적으로 봉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컨대, 유대교라는 종교적인 틀로써 하나님의 생명력을 가두고자 합니다. 그 틀을 벗어나려는 예수님에 대해서는 신성모독죄로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안식일 규례를 위반하고 참람하게도 하나님을 친아버지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5:18). 하나님의 깊은 뜻을 살피지 아니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인민재판형식의 종교재판은 한 마디로,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바야흐로 그 비극의 서막이 서서히 열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