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39강(요5:1-4)(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3. 9. 00:11

요한복음 강해 39(5:1-4)

작성자; 손진길 목사(로토루아순복음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 54()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5:1)

 

  민족의 전통적인 명절을 보면, 민족이 어떠한 성격의 백성들인지 금방 수가 있습니다. 한국사람들은 새해 설날과 음력 8 보름 추석을 가장 명절로 지냅니다. 설날은 해가 새로이 시작되는 첫날이기 때문에 앞으로 일년간 소원성취를 있도록 서로가 축하의 인사를 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조상님들에게도 인사를 하고 음덕을 베풀어주시기를 소원하는 날입니다. 음력 팔월 보름 추석은 동안 농사를 지어서 수확을 거의 마무리하는 시점이므로 먼저 조상님의 음덕에 감사를 드리고 기쁨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명절입니다. 그렇게 설날과 추석 명절의 의미를 되돌아 보면, 한국사람들은 전통적으로 하나님보다는 우선 가까이 있는 공동체의 이웃과 돌아가신 조상님들을 먼저 돌아보는 유교적인 의식을 지니고 있는 민족입니다. 그러한 한국민족과 사도 요한이 여기서 소개하고 있는 유대민족은 다릅니다. 유대인들의 민족적인 명절이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이기 때문입니다(13:1-10, 23:14-17). 유월절은 본래 4 중순인데 하나님의 명령으로 달이 아빕월 새해 정월이 되고 있습니다(12:2). 출애굽의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먼저 생각하고 해를 지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매주 토요일에는 안식일을 지킵니다(35:1-3). 일손을 놓고서 성전이나 회당에서 하루를 지냅니다. 온종일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두루마리 성경을 읽고서 뜻을 구약선생인 랍비로부터 가르침을 받습니다. 그리고 말씀의 뜻에 비추어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다시 하나님의 뜻대로 인생을 살겠다고 결심을 하는 날입니다. 그와 같은 안식일을 일곱 완전하게 지내고 나면 비로소 다음 오순절을 맞이하게 됩니다. 안식일을 완전하게 지켰다는 기쁨을 오순절 하루 동안 누리게 됩니다. 믿음을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감사하고 이웃과도 인사를 나눕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익은 열매를 바칩니다. 가을걷이가 모두 끝나면 추수감사의 절기를 하나님 앞에서 지냅니다. 그리고 농한기가 시작이 되었기에 초막을 짓고서 출애굽 광야시대를 다시 체험하고자 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실족하지 아니하도록 마음을 다잡고 신앙생활에 전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유대교의 절기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유대민족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을 파수하고 있는 민족입니다(4:22). 하나님 신앙이 전통적으로 살아있는 민족입니다. 비록 그들만의 일신교리와 선민의식 때문에 만민구원사상을 반대하고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나사렛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고 말지만 그래도 그들은 여전히 종교적인 열심이 대단한 민족입니다(10:2). 특히 유월절 명절이 되면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경건한 유대인 교포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합니다. 그리고 지방은 물론 세계에서 회당을 책임지고 있는 랍비들과 경건한 유대인들은 오순절이 지나도록 동안이나 예루살렘에 머물게 됩니다(2:1, 5). 그들은 가말리엘과 같은 바리새인 스승으로부터 히브리 성경에 대한 해석과 강해를 듣고 율법과 히브리 사상을 다시 공부합니다(2:46, 5:34, 22:3). 그리고 중요한 종교적인 이슈는 서로 토론을 합니다. 비록 유대인들이 그들만의 경직된 일신교리와 편협한 선민의식 때문에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만민구원을 주장하는 복음을 반대하였지만 그래도 그들이 종교적인 열심이 대단한 민족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들의 명절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명절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이 가까워지자 예루살렘으로 향하시고 계십니다(5:1).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5:2)

 

예루살렘은 790m높은 고지에 자리를 잡고 있는 도시입니다. 골짜기가 아니기 때문에 물이 부족합니다.  다른 지역에서 물을 끌어와야만 하는데 그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북쪽만 제외하고 나머지 삼면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산들과 예루살렘 고지 사이에는 깊은 계곡이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주변의 높은 산에서부터 물을 끌어올 수가 있을까요? 적어도 예루살렘보다 높은 위치에 수자원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남쪽 820m내지 850m높이에 동굴에서 흘러나오는 샘물 기혼 있습니다. 샘물은 넘쳐서 골짜기의 경사를 타고서 서쪽에서 동쪽 기드론 골짜기로 흘러갑니다. 히스기야 왕은 앗수르 군대의 침략을 받았을 때에 샘물이 흘러가는 것을 서쪽에서 막았습니다(대하32:4). 그리고 물을 전부 예루살렘 서쪽으로 끌어들였습니다(대하32:30). 물이 자연석 바위 사이 틈새로 흘러가는 물줄기를 찾아서 수로를 넓히는 공사를 것입니다. 유대왕국의 공병들이 동제기구로 장장 533m 이르는 바위터널을 파고 자연수로를 넓혀서 일종의 인공적인 지하수로를 만든 것입니다(왕하20:20). 안으로 끌어들인 물을 기존 실로암 터널을 이용하여 예루살렘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실로암 연못에 저장을 두었습니다. 덕택에 히스기야의 군대는 예루살렘 성에서 걱정이 없이 오래 버틸 수가 있었습니다. 반면에 예루살렘 성을 장기간 포위했던 산헤립의 군대는 물이 없어서 고생만 하다가 하나님의 역사와 자국내의 반란 때문에 물러갔습니다(왕하19:35-37). 본래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있었던 원주민 여부스 족속은 시온 남쪽 경사지역에 산성을 짓고서 남쪽 기혼의 샘물을 길어다가 식수로 사용을 했습니다(왕상1:38). 그리고 적의 침입을 대비하여 물을 안전하게 여부스의 도시로 끌어들이는 수로와 수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통로를 타고서 다윗 왕의 병사들이 여부스로 침투하기도 했습니다(삼하5:8). 그리고 솔로몬 왕은 성전 남쪽 기슭에 많은 연못을 만들고 기혼의 샘물을 끌어와서 그곳에 저장을 했습니다.  

그렇게 물이 귀한 도시가 예루살렘입니다. 따라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용하는 물도 동쪽 출입문으로 들어오기 전에 저장을 하고 있습니다. 물이 땅으로 스며드는 것을 막기 위하여 돌로써 인공저수지를 만들었습니다. 위로 북쪽에는 52mx40m, 아래 남쪽에는 57mx48m이며 수심은 모두 7m입니다. 그것이 소위 베데스다연못입니다. 예루살렘 성은 동쪽 성문 이름이 스테반 또는 사자 입니다. 문으로 양을 끌고 들어옵니다. 그러면 쌍둥이 베데스다 연못 가운데 지정된 한쪽 연못에서 깨끗하게 목욕을 시킵니다. 제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청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쪽의 깨끗한 물은 성전 뜰에서 제사장들이 사용해야 하는 물입니다. 그런데 성전에서 사용할 물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물에는 종교적으로 그리고 의학적으로 치료의 효과가 종종 나타납니다. 그래서 각종 불치의 병자들이 그곳에 몰려와 있습니다; 사도 요한의 설명에 따르면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것입니다(5:4). 외에도 본문에서는 가지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첫째, ‘행각 있다는 것입니다. 행각은 기둥을 가지고 있으며 사람이 통행할 있는 인도입니다. 그러므로 기둥 옆에 서서 고대에서는 설법이 행해졌습니다. 그것이 소위 스토아입니다. 둘째, 행각이 다섯이나 있었다고 합니다. 행각의 수는 통행인의 수가 얼마나 되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행각이 다섯이나 있다고 하는 것은 시장이 형성되어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고라입니다. 제물을 준비하지 못한 자는 곳에서 마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자연스러운 시장을 성전 안으로 끌어 넣고서 자리세를 징수하던 자들이 예수님에게 질책을 당한 것이 이른 성전청결사건입니다. 행각 다섯 가운데 개씩은 개의 연못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이에 6m 정도의 행각이 하나 있으며 곳을 통하여 사람들이 성전 동쪽 양문’(sheep gate)으로 진입한 것으로 보입니다(3:1). 참고로, ‘베데스다라는 말은 자비의 ’(house of mercy)이라는 뜻이며 인공연못은 BC 2세기에 대제사장 시몬이 건립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번째의 유월절을 앞두고서 연못 가에서 바야흐로 메시아의 능력을 행하시면서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관심사항이 무엇인가를 사람들에게 가르쳐주고자 하십니다(5:8-9).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5:3)

 

  사도 요한은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신위적인 치료를 받고자 대기하고 있는 자들을 크게 가지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첫째, 많은 병자들입니다. 각종 질병으로 고생을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둘째, 장애자들입니다. 시력장애자와 지체장애자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체장애자는 다시 다리 저는 자와 각종 근육장애자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혈기 마른 사람은 근육과 신경에 이상이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장애 역시 대부분이 불치에 속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창조주의 능력을 전해주기를 간절하게 베데스다 연못을 바라보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450년간 선지자도 없던 중간시대가 이제 끝나고 있습니다. 랍비와 천사에 의존하여 동안 영적 치유와 육적인 치료를 받아오던 그들 앞에 이제는 선지자보다 능력이 많으신 구세주 메시아가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인생 가운데 만날 있는 최고의 행운이 유월절에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행운의 그리스도가 지금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있다고 사도 요한이 그의 마지막 책에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3:20).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오시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 성전으로 들어 오셔서 함께 인생을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님으로 영접하는 자가 성도입니다. 그는 몸과 마음을 모두 치유할 있는 주님을 이미 모시고 있는 진정한 행운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