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40강(요5:5-9)(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3. 9. 00:13

요한복음 강해 제40(5:5-9)

작성자; 손진길 목사(로토루아순복음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55(주일새벽)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5:6)

 

자비의 집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베데스다연못 가에 수많은 병자와 장애자들이 모여 있습니다(5:3). 그들의 소원은 단 한 가지입니다. 치유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연못의 물이 신기한 움직임을 보일 때에 제일 먼저 그 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어떠한 병이나 장애라도 일시에 낫게 되는 기적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천사가 그 못에 내려와서 그 물을 움직이게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5:4). 그렇지만 그것은 천사의 능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이 천사를 통하여 그 물에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사항이 나타납니다. 천사가 그 물에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을 불어넣고 있다면 왜 한 사람에게, 그리고 단 한번에 그치고 있는 것일까요? 본문에서는 천사를 대신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시 수 많은 병자와 장애자들 앞에서 단 한 사람에게만 하나님의 신유의 능력이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왜 사랑과 긍휼의 그리스도께서 다른 병자와 장애자들을 모른 체 하시고 유독 그 한 사람의 병자에게만 병 나음의 특혜를 베풀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 의문은 역시 본문 가운데서 실마리를 찾아 그 의미를 해석함으로써 답변을 얻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성경말씀이 아니고 다른 곳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 하다가는 잘못되는 경우 허다하게 이상한 소리를 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치유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누구를 통해서 나타나든지 간에 같은 원칙을 가지고 행해진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견해에 따라서 그 능력을 행사하시지 아니하십니다. 그 능력은 오로지 하나님 스스로의 판정과 뜻에 따라서 행해지고 이루어집니다. 그 대목이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오래된 줄 아시고라는 대목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5:6). 한 마디로, 인간이 그 병이 오래되었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그 병자를 보시고서 그 점을 인정하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병이나 장애가 낫기를 원하십니까? 또는 사면초가에 빠진 자신의 처지나 환경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 길이 열리고 획기적으로 달라지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나의 처지와 환경을 돌아보실 수 있도록 간절한 심정으로 하나님을 찾아야만 할 것입니다. 전심전력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아야만 합니다. 그 분이 나의 인생에 있어서 원하고 계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그 뜻에 열심히 자신을 맞추어나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원칙적으로, 구하고 찾는 자에게 그 모습을 나타내겠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기억해야만 합니다(7:7-8). 38년된 불치의 병자는 스스로 움직일 수가 없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들을 능동적으로 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로지 수동적으로 그 물에 생명의 능력이 임하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 일만을 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먼저 움직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목적에 자신의 인생의 목적을 맞추고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맞추어나가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리하여야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그 사람에게 함께 하지 아니하겠습니까? 둘째로, 자력으로는 그 연못에 도달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5:7). 그리고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도저히 남의 도움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 입증이 되어야만 합니다. 낫고자 하는 열망은 가득하지만 그 일을 이룰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이 이 세상에서는 전혀 존재하지를 않습니다. 그 점을 예수님이 그 38년된 병자에게서 확인을 하시고 있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5:6),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5:7). 세상의 의료적인 치료와 도움의 손길이 아직 남아 있다면 그것부터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세상적인 도움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자연스럽게 성도들을 돕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는 보다 성숙한 믿음입니다(4:4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5:8)

 

  창조주의 능력은 생명과 부활의 능력으로 나타납니다(1:1-4, 11:25).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에는 병을 낫게 하고 장애를 없애주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그 실상은 죽은 세포를 없애고 새로운 세포를 만들어 주는 창조의 행위입니다. 인간의 몸은 수 많은 세포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그 세포 하나하나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 창조의 능력으로 필요한 세포를 다시 만들어 주시고 병이나 장애를 일으키고 있는 세포들을 제거해버리시는데 세상에 낫지 아니할 병이나 장애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 때문에 오늘 날도 모든 생명체들이 삶을 영위하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단지 자연상태에 있어서 각 세포의 활동과 재생은 생명체의 수명에 맞추어서 때와 기한이 정해져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와 기한은 철저하게 하나님 아버지의 절대권한입니다. 인간이 침범하거나 예수님이 말씀을 해주실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1:7). 다만 성도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여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키니하는 정도입니다(3:6-7a). 그리하면 하나님의 인정하심과 창조의 능력이 함께할 때에 그 병자나 장애자가 나아서 발과 발목이 즉시 힘을 얻고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3:7b-8). 그것은 겉으로 보면, 치료행위입니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 보면 그것은 재창조의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정확하게 인간의 능력이나 행위가 아닌 것입니다. 전적으로 창조주의 능력입니다. 이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첫째, 이 세상에는 병이나 장애를 낫게 하는 의료행위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료행위조차 세포를 살리고 계시는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의사가 자신이 자신의 실력과 능력으로 병자를 살렸다고 우쭐거릴 일이 아닌 것입니다. 둘째, 수명이 다한 세포나 완전히 폐사한 세포를 다시 부활시킬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것은 부활의 주님께서 함께 하실 때에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그 부활의 능력이 우리의 몸을 다시 살게 하고 우리의 영을 다시 살리고 있습니다(8:10-11). 그래서 남은 생애를 거듭난 자의 삶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기를 원합니다(3:3-7, 6:8-14, 12:1-2). 이제부터 그러한 새로운 삶을 살아가라고 격려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본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5:8-9). 그렇게 나음을 입고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자들이 바로 저를 비롯하여 여러 성도님들이라고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