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41강(요5:9-13)(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3. 9. 23:59

요한복음 강해 제41(5:9-13)

작성자; 손진길 목사(로토루아순복음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56()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5:10)

 

안식일 규례는 출애굽 직후 광야에서 생겼습니다. 출애굽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6일간 일을 하고 제7일이 되는 토요일에는 일을 쉬면서 각 처소에서 안식의 복을 누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16:29-30). 그렇지만 안식일이 제대로 지켜지지 아니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뒷부분에서 모세가 백성들에게 다시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엿새 동안은 일하고 일곱째 날은 너희를 위한 거룩한 날이니 야훼께 엄숙한 안식일이라. 누구든지 이 날에 일하는 자는 죽일지니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35:2-3). 유대 땅에 선지자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아니했던 제2성전시대에 랍비들이 안식일의 뜻을 자기들 나름대로 해석을 하여서 백성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안식일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근원적으로 살핀 것이 아닙니다. 다만 안식일에 관한 모세의 명령을 글자 그대로 해석을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주석을 붙이고 세부규정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백성들의 생활을 규제하는 세칙들입니다. 한 마디로, 안식일 날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하여 백성들의 모든 노동행위를 금지한 것입니다. 그 결과 백성들이 유일하게 행할 수 있는 일이 성전이나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전날 요리해둔 음식을 안식일 하루 동안 그냥 먹을 수 있는 것 정도입니다. 그리고 용변을 보기 위하여 짧은 거리를 빈손으로 걸어 다니는 것 정도는 허용이 되지만 무엇을 들고 다니는 것도 일이라고 하여 금지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랍비들이 율법의 생활규칙을 만들어 백성들의 행동 하나하나까지 규제하고 있던 시대에 선지자 세례 요한이 나타났으며 뒤를 이어 선지자 요한으로부터 메시아로 소개를 받은 나사렛 예수가 등장을 했습니다(1:24-36). 사도 요한의 설명에 따르면 본문에서 예수님이 랍비들이 만든 안식일 규칙을 어기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안식일 날 예루살렘 성전 동쪽 출입문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는 베데스다못 가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시고 그에게 일을 시킨 것입니다(5:5-9). 그 자가 깔고 누워있던 자리를 들고서 걸어가라고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안식일 날 빈손으로 다녀야 하는 규정을 어긴 것입니다. 랍비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던 주위의 유대인들이 그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5:10).

 

그런데 유대인들의 안식일 규례와 율법에 정통하신 예수님께서(2:46-47) 왜 구태여 그와 같은 시비거리를 제공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 내심이 궁금합니다. 공관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안식일 날 배가 고팠던 제자들이 들판의 이삭을 잘라서 먹는 것도 묵인하고 계십니다(2:23). 그리고 안식일 날 유대인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그것도 회당에서 손이 마른 병자까지 고치고 있습니다(3:1-6). 회당에서 히브리 성경 두루마리로 백성들을 가르치고 있는 유대교 선생인 바리새인들이 생각하기에는 나사렛 예수가 철저하게 자신들의 안식일 규례와 율법을 짓밟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유대교리를 지키기 위하여 바리새인들은 그때부터 유대교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사두개인들과 협력하여 반역자 예수를 처단하려고 합니다(3:6). 그렇다면 자신의 죽음까지 감수하면서 예수님이 백성들에게 가르쳐주려고 했던 안식일 제정의 본 뜻은 과연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답변 가운데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3:4). 안식일은 본래 창조주의 뜻을 받들어서 천하만물을 선하게 관리해야만 하는 청지기를 하나님이 교육시키는 날입니다. 그 교육의 장소가 에덴동산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창세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야훼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2:3, 8). 창세기 제1장이 엿새 동안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이야기라면 제2장은 그 세상의 경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일곱째 안식일 날에 하나님께서는 천지창조를 계속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일곱째 날에는 세상을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맞게 관리하기 위하여 에덴동산에서 사람과 함께 지내시면서 사람을 교육시키고 훈련을 시키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모세를 시내 산으로 불러서 40일 동안 함께 지내시면서 율법의 정신과 내용을 전수하여 준 것과 동일하다고 하겠습니다(31:12-32:1). 에덴동산에서 가장 중요한 교육의 내용이 청지기의 분수에 관한 것입니다. 청지기의 권한이 막강합니다. 모든 실과를 관리하고 먹을 수가 있습니다(2:16).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직접 사용하시는 생명나무의 열매와 선악나무의 열매만은 따먹을 수가 없습니다(2:9, 17, 24). 인간이 피조물들의 생명을 살리고 돌보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 세상에서 실천하는 청지기이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고유영역만은 침범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3:5, 19:24, 6:5, 삼상2:30, 22:21). 종이 주인의 자리와 고유권한을 범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39:8-9, 14:12-15).

 

어쨌든 안식일 날 교육받은 그대로 생명을 살리고 돌보는 일을 사람들이 행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아직 교육과정에 있다고 병자를 고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안식일 날 요리를 하지 아니하고 일을 하지 아니하는 것으로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왜 안식일을 만들었는지 모세오경의 내용과 그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입법취지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조차 없습니다. 세상을 고치고 생명을 살리며 돌보라고 교육을 시켰더니 하는 일이라는 것이 안식일 날은 교육만 받는 날이지 아무런 행위를 하지 아니하는 날인 줄 알고 있습니다. 모법의 취지는 사라지고 이상한 외식적인 강제규정만이 유대인 사회에 남아 있습니다(15:3-9). 마치 헌법의 정신은 사라지고 시행규칙만이 남아 있는 경우와 같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그 시행세칙을 잘 지키고 있는지 그것만을 감시하고 정죄하는 기관에 불과합니다. 대대적인 유대교의 개혁이 불가피한 시점입니다. 그 충돌의 모습을 사도 요한이 완곡하게 본문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에서 그토록 바리새인들의 외식에 대하여 질타를 하고 있는데(23:2-36) 왜 요한복음에서는 간단하게 그냥 짚고 넘어가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이미 AD 70년경에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면서 산헤드린 공회가 그 영향력을 상실해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AD 90년경에 소아시아 에베소 땅에서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사도 요한이 구태여 옛날의 갈등을 재론할 필요가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것입니다.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5:13)

 

 고침을 받은 사람이 자신을 낫게 해주신 분이 누구신지 잘 알고 있지 못하다고 하는 구절은 적어도 세 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로,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그대로 예수님이 바리새인을 필두로 하는 유대인들의 안식일 시비에 직접적으로 휘말리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5:13). 아직 공생애를 시작하신 지 두 번째의 유월절에 불과합니다. 아직 두 번의 유월절이 더 남아 있습니다. 공생애 36개월을 채우시고 네 번째 유월절 기간에 체포를 당하고 십자가를 지는 일정이 남아 있습니다. 아직 때가 이르지 아니했기에 그 자리를 피하신 것입니다. 둘째로, 38년된 병자를 낫게 해주는 시간이 실로 짧았다는 점을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수술과정이나 투약의 과정이 전혀 없습니다. 단지 병자의 낫고자 하는 확고한 의지를 확인하고 있는 간단한 질문과 일어나 걸어가라!는 주님의 권위 있는 명령의 말씀만이 존재할 뿐입니다(5:6, 8). 말씀과 동시에 나음을 입고 있습니다. 영적으로는 새로운 창조물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고후5:17). 막상 나음을 입게 된 병자는 창조주의 능력 앞에 어리둥절할 뿐입니다. 그것은 갑자기 발생한 기적이기 때문에 그 이치를 깨닫는데 시간이 걸립니다. 더구나 그 기적의 의미를 깨닫고 자신의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만 하는지에 대하여 알게 되는데 있어서는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다메섹 도상에서 환상 가운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된 사울의 경우와 동일합니다. 사울은 여러 해 동안 다시 히브리 성경과 예수님의 일생을 연구하고서 비로서 복음에 대한 깊은 이해를 얻어서 사도 바울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간 것입니다(1:17-19, 2:1-2). 그러므로 금방 나음을 입게 된 그 병자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어디에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은 정답을 당장 얻을 수가 없는 노릇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만이 그 자리에 남아 있기를 예수님이 원하고 계신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만이 그 자리에서 드러나는 것이 옳습니다. 그와 같은 능력을 베푼 사람이나 하나님의 대리자는 창조주의 영광 뒤에서 가리움을 받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종이 주인의 명령으로 주인의 능력을 행사하고 나면 모든 존귀와 영광을 주인이 받도록 하고 자신은 주인의 뒤에 서서 단지, “무익한 종입니다!라고 알아서 처신하는 것이 옳다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17:10). 아무쪼록 그와 같은 청지기로서의 삶에 익숙해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