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32강(요4:22-26)(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3. 4. 14:32

요한복음 강해 32(4:22-26)

작성자; 손진길 목사(로토루아순복음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 428(주일새벽)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4:24)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 성의 여인과 동네 우물가에서 대화를 나누시면서 하신 말씀 가운데 위의 명제는 실로 뜻이 심오합니다(4:24). 이유는 수가 근처에 있는 축복의 그리심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의 성전에서도 말고 오직 영과 진리로하나님을 예배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신령해 보이는 높은 산에 올라가서 기도를 하거나 크고 웅장한 성전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께서 만나주시고 축복을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본질적인 예배의 조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장소나 건물과 같은 환경적인 요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배자의 마음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를 주시하시면서 신령하고도 참된 만남을 허용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배자의 마음 속에 반드시 들어 있어야만 하는 , 이른 영과 진리 의미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아니하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대화의 상대방이 되고 있는 인간은 시공간에 갇혀있는 존재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육체를 입고서 시공간의 제약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전달하면 가장 효과적일까요? 방법은 현재 장소에서 상대방인 인간에게 가장 익숙한 사물이나 개념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맥을 잡고서 본문을 들여다보게 되면 참으로 놀라운 개념이 영과 진리 연결이 되고 있습니다; 첫째, 무엇이 진리인가를 있도록 예수님이 4 22절에서 이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알고 있으나 사마리아인들이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진리라는 것입니다(4:22ab). 진리는 구원 관련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4:22c). 세상에 구원 주고자 하나님의 아들이 모태에서부터 성육신을 했습니다(1:18). 분이 지금 사마리아 수가 성의 여인과 말씀을 나누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4:25-26). 그런데 구세주 메시아가 세상에 것이라는 사실을 사마리아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잊어버리고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알고서 믿음생활을 해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메시아에 관한 예언이 히브리 경전에 담겨 있는데 그것을 유대인들이 성전과 회당에서 매주 안식일에 읽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경전을 버린 오래입니다. 역사적으로, 북쪽 이스라엘 왕국의 초대 왕이었던 여로보암이 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야훼 하나님이라고 부르자 레위 제사장들이 나라를 떠나버렸기 때문입니다. 이후 여러 왕조가 바뀌었지만 그들의 종교정책은 변하지 아니했습니다. 레위인이 아닌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삼고서 금송아지 우상을 계속 섬긴 것입니다(왕상12:28-31). 그래서 금송아지 우상을 금하고 있는 히브리 경전을 버린 것입니다(32:8). 지금 사마리아 사람들도 이방의 신들을 섬기고 있으면서 겸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들은 오직 많은 세상적인 축복을 받기 위해서 야훼 하나님을 우상의 하나로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히브리 경전에 대한 깊은 이해와 깨달음이 별로 소용이 없습니다. 어쨌든 여기서 진리라고 하는 것은 구약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구약에 담겨있는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과 예언의 성취가 진리 핵심이라고 하겠습니다.  좀더 깊이 말씀을 드리자면, 유대인 선민들만의 구원이 아니라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이방인 취급을 받고 있는 사람들까지 모두 구원의 대상이 된다고 하는 만민구원의 복음그것이 진리의 본질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예배자로부터 찾고 계시는 대해서는 예수님이 알아듣기 쉽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라고 먼저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4:24a). 근본적으로, 영이신 하나님은 사람의 육체가 아니라 영과 교통을 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렇지만 영이 어두워져 버린 사람들은 그렇게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어두워진 사람의 영을 먼저 소생시켜야만 영적인 대화가 가능합니다. 그것이 성령의 세례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세례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전제조건이 하나 필요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과 무덤 부활을 믿고 받아들이는 신앙고백이 먼저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그러한 신앙고백을 하고서 성령의 내주하심을 받은 자가 성도입니다. 그러므로 결론을 맺어 보자면, 성도가 성령 안에서 자신의 되살아난 영으로 드리는 예배 여기서 말하고 있는 영적인 예배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영과 진리 드릴 있는 예배가 사마리아 수가 성의 여인에게 당장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아직 예수님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지 아니하고 있는 시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수가 성의 여인이 장차 영과 진리 하나님을 예배할 있는 성도가 있는 가능성이 엿보이고 있습니다. 대목이 바로 여자가 이르되 메시아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4:25)라는 믿음의 구절입니다. 보통 유대인들에게서도 듣기 힘든 메시아 신앙이 사마리아 여인에게서 터져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치하의 유대인들은 옛날 다윗의 패권국가 이스라엘 제국을 메시아가 다시 건설해주기를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수가 성의 여인은 세상적인 해방과 영광보다도 하나님을 진심으로 예배할 있도록 길을 열어주시는 메시아를 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치적인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는 유대인들과 다른 신앙적인 고백입니다. 예수님이 진실로 듣고 싶어하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하고 구원을 얻고자 하는 여인의 바램이 메시아 신앙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인 메시아를 고대했던 유대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버리고 맙니다. 그렇지만 수가 성의 여인과 같은 종교적인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배신하지 아니하고 영접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장면이 수가 성의 동네주민들이 메시아를 영접하는 대목입니다. 여인의 방문을 통하여 메시아가 동네에 오셨다는 소식을 접하고서 주민들이 모두 예수님 앞으로 나아오고 있기 때문입니다(4:39-42). 그러한 놀라운 역사를 촉발시키고 있는 예수님의 마디가 다음과 같다고 사도 요한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4:26). 예수님이 수가 성의 여인에게 메시아가 바로 자신이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 경전에서 예언하고 있는 메시아, 만민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그리스도, 바로 분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정체를 드러내고 있는 장면입니다. 동안 선민이라고 하는 유대인들로부터 구원이 없다는 이방인 취급, 하나님을 만날 없다는 잡종 사마리아인으로 치부되고 있었던 수가 성의 여인에게 메시아가 직접 나타난 것입니다. 참된 의지처가 없는 세상에서 자신을 구원하여 하나님에게 인도해줄 있는 메시아가 드디어 여인 앞에 나타났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이미 여인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는 반증이 됩니다. 유일한 소망을 메시아의 오심에 두고서 사람 취급도 받으면서 고난의 세월을 살고 있었던 수가 성의 여인에게 찾아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들 이방인들에게 찾아 오신 분이십니다. 결론적으로, 복음이 이방인에게 넘어가는 분수령에 오늘도 수가 성의 여인의 고백이 자리를 잡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자신의 인생에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고백이 어쩌면 영과 진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있는 자의 가장 번째 자격요건이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