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의 패권(작성자; 손진길 박사)
5. 성경에 나타나는 중동의 패권국 앗수르
중동지역 메소포타미아의 강대국 앗수르의 이름이 구약인 히브리정경에 하나의 패권국의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그 시기는 다윗왕조 유다왕국의 국왕 히스기야의 부왕인 아하스 왕의 시대이다(왕하16:7-9).
주전 733년경 유다왕 아하스는 북쪽의 이스라엘왕국이 아람왕국과 함께 침입해오자 그 타개책이 막막하다. 두나라의 군대를 홀로 상대하기에는 군사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람왕국의 동편에 있는 메소포타미아의 강대국 앗수르제국의 황제인 디글랏 빌레셀에게 많은 재물을 보내면서 급히 구원병을 요청하고 있다(왕하16:7-8);
당시 앗수르제국의 황제는 메소포타미아지역을 석권하고 이제는 서쪽으로 진출하여 아람, 이스라엘, 유다, 블레셋, 모압, 암몬, 에돔, 그리고 페니키아에 이르기까지 모든 왕국을 정복하고자 하는 대단한 야심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유다왕이 많은 재화를 주면서 원병을 요청하고 있으니 참으로 좋은 기회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주전 733년에 얼른 대군을 동원하여 앗수르제국의 황제 디글랏 빌레셀이 원정을 떠나게 된다. 그 결과 순식간에 아람왕국을 치고 그 수도인 다메섹을 점령하고 만다(왕하16:9). 그 뿐만이 아니다. 앗수르제국의 다음 황제 살만에셀도 전쟁에 능하다.
주전 724년에 살만에셀 황제가 대군을 이끌고 북조 이스라엘왕국을 침입하여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성을 포위하여 계속 공격한다(왕하17:5). 그런데 포위한지 2년이 지나도 황제 살만에셀이 사마리아성을 점령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을 보고서 3년째 되는 해에 그만 정변이 발생하고 만다;
무능한 살만에셀 황제를 끌어내리고 빨리 사마리아성을 점령하자는 것이다. 그와 같은 명분으로 살만에셀의 동생 사르곤2세가 반란에 성공하여 앗수르제국의 새로운 황제가 되지만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그 정변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계속 등장하고 있다.
따라서 사르곤2세는 전력을 기울여 사마리아성을 공격한다. 그 결과 북조 이스라엘왕국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왕성이 무너짐으로써 주전 722년에 역사 가운데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왕하17:6);
애초에 사르곤2세는 가나안의 비옥한 해변을 차지하고 있는 블레셋의 5도시국가를 정복하고 그 다음 다윗왕조의 유다왕국까지 정복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는 그의 야망을 접고 급히 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 이유는 정변에 반대하는 세력이 앗수르제국을 계속 쪼개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사마리아에 남기고 간 원정군이 가나안의 첫번째 해안도시국가인 아스돗을 정복하게 된다. 그런데 수도 니느웨로 회군한 사르곤2세는 18년이나 앗수르제국의 재통합을 위하여 고군분투하지만 결국 메소포타미아의 반대세력을 전부 소탕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만다.
하지만 사르곤2세의 아들 산헤립이 주전 704년에 황제가 되자 국면이 달라지고 있다. 산헤립은 얼마나 유능한지 부황 사르곤2세가 18년이 걸려도 해내지 못한 일을 단 3년만에 끝내고 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반군들을 완전히 소탕한 것이다;
그만큼 전쟁에 뛰어난 인물 산헤립 황제가 대군을 이끌고 주전 701년에 다윗왕조 유다왕국을 치고자 달려오고 있다. 당시 유다왕국의 국왕이 아하스의 아들인 히스기야이다. 그는 도저히 앗수르제국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서 얼른 많은 금과 은을 산헤립 황제에게 주면서 부디 군대를 돌려 달라고 통사정을 한다(왕하18:13-16);
그것을 보고서 산헤립이 회군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도중에 다시 말머리를 돌려서 유다왕국을 침입하고 만다(왕하18:17).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한마디로, 앗수르제국의 황제인 산헤립이 역사에 남는 정복왕이 되고자 벌써 결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메소포타미아의 패권국에 머물지 아니하고 당시 고대사회의 제2의 문명국이며 강대국인 애굽제국을 정복하고자 하는 웅대한 야망을 품고 있다. 애굽까지 정복해야 비로소 고대사회에 있어서 앗수르제국은 중근동의 유일한 패권국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유다왕국은 물론 그 주변에 있는 작은 가나안 왕국들을 모조리 정복해야만 한다. 따라서 산헤립은 곧바로 다윗왕조 유다왕국을 얻고자 말머리를 돌려서 진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유다왕 히스기야가 결코 어리석은 인물이 아니다. 부왕 아하스와 달리 머리가 명석하고 세상적인 지혜가 있는 왕이다. 따라서 그는 앗수르제국의 산헤립 황제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패권을 다시 되찾아가고 있을 때에 나름대로 그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다.
만약 산헤립이 대군을 이끌고 유다왕국을 치려고 달려온다면 일단 금은보화를 주고서 그를 설득할 생각을 하고 있다. 그 다음에 그가 재차 침입을 한다면 그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수도인 예루살렘성에 군량미를 많이 비축하고 또한 지하수로를 파서 성밖의 샘물을 안전하게 성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왕하20:20, 대하32:30);
그리고 지방에 있는 군사를 대거 왕도인 예루살렘성으로 이동하여 수도만은 끝까지 사수하고자 계획하고 있다(대하32:2-8). 그런데 히스기야 왕의 그러한 대비책이 다윗왕조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마치 ‘청야작전’(淸野作戰)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청야작전이란 적에게 양식을 전리품으로 주지 아니하기 위하여 들판의 곡식을 모두 불태워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적의 병참선이 길어져서 침공의 속도가 늦어진다. 아울러 침략군의 사기가 떨어지게 된다. 그러나 그 부작용이 심각하다. 산으로 피신한 백성들이 굶주리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히스기야 왕은 왕족과 귀족 그리고 부자 등 기득권층이 살고 있는 왕도 예루살렘을 철저하게 방어하기 위하여 정예병을 전부 왕성에 끌어 모으고 있다. 따라서 지방의 성들은 병력이 부족하여 제대로 대항하지도 못하고 앗수르의 말발굽 아래 속수무책으로 짓밟히고 만다(왕하18:13).
앗수르제국의 황제인 산헤립이 유다왕국의 지방을 유린하면서 막상 그 수도인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보니 보통일이 아니다. 예루살렘성이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이며 철옹성인 것이다;
예루살렘성은 고도 평균 해발 780미터에 있는 높은 분지에 자리를 잡고 있다. 삼면이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고 오로지 북면만이 조금 완만한 경사지이다. 그런데 동쪽과 서쪽의 외성에서 북면을 방어하고 있기에 그쪽으로 접근하게 되면 화살 받이가 되기 십상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삼면을 지키고 있는 것은 예루살렘의 외성만이 아니다 골짜기 반대편에 높은 산들이 빙 둘러 있는데 그곳에도 어김없이 유다의 병사들이 주둔하고 있다. 그러므로 골짜기로 접근하는 외적은 양편에서 집중적으로 공격을 받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에 따라 산헤립의 앗수르 군대가 3면의 산에 주둔하고 있는 유다의 군대를 먼저 쳐부수고자 전력을 다하고 있다. 수개월의 시간이 걸려서 겨우 주변의 산들을 모두 차지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애굽에 심어 놓은 간자들에게서 급한 첩보가 올라오고 있다. 애굽제국의 지원군이 유다를 향하여 출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산헤립 황제는 예루살렘 공성작전을 수하들에게 맡기고 애굽의 원군을 쳐부수기 위하여 해변도로가 가까운 지역으로 이동을 한다. 지역정찰을 한 결과 립나에서 매복작전을 펼치면 골짜기를 지나게 되는 애굽의 군대를 무찌를 수가 있는 것으로 판단이 된다.
앗수르 군대의 매복작전을 모르고 애굽의 구스왕 디르하가가 대군을 이끌고 골짜기로 접어들고 있다(왕하19:8-11);
그것이 그의 패착이다. 양편 산지에서 굴러 떨어지고 있는 나무와 돌을 피하기도 어려운데 기름이 뿌려지고 불화살이 날아들고 있다.
골짜기가 불에 타고 있는데 겨우 그곳을 벗어나고 보니 군사의 대부분을 잃어버리고 난 후이다. 구스 곧 이디오피아의 왕 디르하가는 어쩔 수가 없어서 그만 애굽으로 되돌아가고 만다.
산헤립이 대승을 거두고 예루살렘 가까이 와서 부관 랍사게로 하여금 애굽의 원군을 물리친 사실을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알려준다(왕하18:21). 그것이 사실임을 확인한 히스기야 왕이 절망에 빠지게 된다.
다윗왕조 유다왕국의 히스기야 왕은 그때서야 그가 세상제국 애굽을 의지하고 그 대신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도움을 바라지 아니한 엄청난 불신앙을 깨닫게 된다. 몇 달 전 불치의 병에 걸렸을 때에 선지자 이사야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께 애걸복걸하여 15년 목숨 연장을 받은 사실이 새삼 생각이 난다(왕하20:1-7);
절망의 순간에 창조주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다시금 기억했다는 것이 유다왕 히스기야의 행운이며 위대한 발견이다. 히스기야 왕이 수하를 보내어 선지자 이사야에게 기도를 부탁한다(왕하19:2). 그리고 스스로 성전에 들어가서 적장 산헤립이 보내어온 항복을 권유하는 최후통첩문을 펴 놓고 하나님께 간구한다(왕하19:14);
그런데 히스기야 왕의 간구의 내용이 상당히 이상하다. 그것은 세상적인 방법만을 선호한 자신의 잘못을 먼저 고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불신한 죄인임을 솔직하게 인정한 것이 아니다.
단지 적장 랍사게가 산헤립 황제의 명령으로 전달한 그 최후통첩의 내용이 얼마나 이스라엘의 수호신인 여호와 하나님을 멸시하고 있는지를 통렬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왕하19:14-19).
그것을 보시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기가 막혀서 선지자 이사야를 보내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신다; “내가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라”(왕하19:34).
그 말씀의 뜻은 두가지이다; 하나는, 전능하신 창조주요 역사의 섭리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멸시하였으므로 역사심판을 하겠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던 다윗왕처럼 새롭게 여호와신앙을 회복하여 살아갈 기회를 히스기야왕과 백성들에게 한번 더 주겠다는 것이다(행13:22).
그 예언의 말씀 그대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날 밤 천사를 보내어 예루살렘성을 포위하고 있는 앗수르 군사 18만 5천명을 전멸시키고 마는 것이다(왕하19:35);
아침에 그 놀라운 광경을 보고서 산헤립 황제가 혼비백산하여 앗수르제국의 수도인 니느웨로 도망을 치고 만다(왕하19:36).
그러나 전쟁으로 일어선 앗수르제국에 있어서 패전한 황제는 제대로 보좌를 지킬 수가 없다. 무능한 황제를 끌어내리려고 하는 반란세력이 등장하고 그 기회를 틈타서 왕자들이 정변을 일으키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주전 681년에 왕자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부황 산헤립을 암살하고 만다(왕하19:37). 그것을 보고서 전장에 나가 있던 왕자 에살핫돈이 회군하여 반란세력을 쳐부순다. 패전한 두 왕자는 외족이 다스리고 있는 변방의 나라 아라랏으로 피신하고 만다.
반란을 진압한 에살핫돈이 새로운 황제로 즉위하게 된다. 그런데 에살핫돈의 뒤를 잇고 있는 앗수르바니팔(주전 669-633)이 앗수르제국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황제이다. 그는 다윗왕조 유다왕국을 제외하고 나머지 가나안 땅의 왕국들을 정복하고 나아가서 애굽제국까지 거의 점령하고 말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다왕 므낫세도 그에게 조공을 바치게 된다;
그렇지만 칼로 일어선 이방제국 앗수르가 어이없이 무너지게 된다. 그 이유는 주전 612년에 변방 아리안 족의 나라 메대와 메소포타미아의 중심지 갈대아 땅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바벨론이 연합하여 티크리스 강 상류에 있는 수도 니느웨를 급습하기 때문이다;
앗수르는 왕도 니느웨를 적들에게 내어주고 군비를 재정비하여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계속 전투를 벌이게 된다. 그렇지만 주전 609년에 유프라테스 강 상류에 있는 요새지 갈그미스와 시리아 땅을 애굽의 바로인 느고2세에게 맥없이 빼앗기고 만다(왕하23:29).
주전 605년에 신바벨론제국의 새로운 황제 느부갓네살이 등장하자 앗수르의 잔존세력들이 와해가 되기 시작한다(렘25:1). 그리고 갈그미스와 시리아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애굽의 군대도 패하여 본국으로 도망한다(왕하24:1-4).
게다가 느부갓네살 황제의 침입을 받은 유다왕국에서도 조공을 바치기로 하고 왕족과 귀족의 자제를 인질로 내놓게 된다(단1:1-4). 그 이유는 느부갓네살 황제가 역사상 유례가 없는 전쟁의 영웅이기 때문이다(왕하25:4-7, 렘46:25-26, 52:27-30).
결론적으로, 이 세상에는 영원한 제국이 없다. 성경에 등장하고 있는 강력한 앗수르제국이 한때 애굽제국까지 점령하는 엄청난 전공을 세우지만 결국에는 더 강력한 신바벨론제국의 느부갓네살 황제를 만나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세상제국의 역사는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말씀 한자락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26:52). 그 말씀만이 창조주의 역사심판의 대 원칙임을 인류의 역사가 언제나 증명하고 있을 따름이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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