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의 패권(손진길 정치학박사)

동서양의 패권 4. 그 옛날 동북아의 호랑이였던 고구려와 발해의 패권에 대하여(작성자; 손진길 박사)

손진길 2022. 3. 3. 10:09

동서양의 패권

 

4. 그 옛날 동북아의 호랑이였던 고구려와 발해의 패권에 대하여(작성자; 손진길 정치학박사)

 

2천년 전에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 하나의 민족으로 융합되고 있는 한민족의 원류에 대하여 고대사학자들이 여러가지 가설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지만 공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한반도의 남쪽에는 해양민족들이 들어와서 부족국가의 형태로 살았는데 한반도에 강력한 왕조를 세운 족속은 북쪽에서 남진한 기마민족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반도에 일찍 정착한 해양민족은 어디에서 왔을까? 그리고 정복자 기마민족은 어디에서 나타난 것일까? 2천년 이전에 바다길을 통하여 한반도까지 들어와서 살았다고 하면 그들 원주민에 대하여 2가지의 가정이 가능하다; 하나는, 배를 만들어 타고서 먼 거리를 항해할 수 있는 해양 족속이다. 또 하나는, 전에 살던 땅보다 한반도가 살기에 더 낫기 때문에 그것을 알고서 들어온 것이다.

전자에 대해서는 큰 섬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이라고 볼 수 있다. 스리랑카, 필리핀, 말레이지아 등이 그러하다. 후자에 대해서는 열대나 아열대 지역에서 기후가 온난하고 아름다운 한반도로 이주해온 것으로 볼 수가 있으므로 대표적으로 인도남부의 족속이나 말레이족이 손꼽히고 있다.

이제는 어떠한 북방 유목민들이 남진하여 한반도에 왕조를 세웠는지를 알아볼 차례이다. 다행스럽게도 그것을 추론할 수 있는 용어가 하나 있다. 그것이 예맥족(濊貊族)이라고 하는 익숙한 용어이다. 그것은 활을 잘 쏘는 유목민 맥족과 물이 풍부한 땅을 찾아서 남하한 예족이 하나가 되어 만들어진 새로운 민족의 이름이다;

고조선의 한 갈래로 보이는 맥족에 대해서는 대체로 중국북방의 유목민이 남하하면서 황하를 타고서 동진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 맥족이 남하하여 곧바로 중원을 쉽게 차지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는 장강유역에서 농업을 일으켜 그 수가 많아진 ()이 북진하자 그들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황하유역을 빼앗기고 그만 동진하고 말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맥족이 만주지역에서 먼저 그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예족을 만나게 된다. 예족은 시베리아 툰드라 지역에서부터 물이 많고 따뜻한 좋은 땅을 찾아서 남하한 족속이다. 예족은 그 수가 많지 아니하기에 기꺼이 황하의 문명을 가지고 동진한 맥족을 받아 들이고 결국에는 하나의 민족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 새로운 민족의 이름이 예맥족이다.

그런데 두 족속의 기상으로 보면, 예족은 곰과 같고 맥족은 호랑이와 같다. 두 족속 가운데 먼저 국가를 형성한 족속은 예족인데 그것을 부여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나중에 고구려가 부여의 남쪽에서 발흥하게 되는데 그것이 맥족의 나라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억지로 구분한 것이고 사실은 모두가 예맥족한민족의 조상들의 나라인 것이다;

고구려의 고대사는 특이하다. 5대 부족이 모여서 연맹왕을 선출하는데 가장 강한 연노부에서 연맹왕이 되어 300년이나 5부족을 이끌고 있다. 하지만 세습이 허용되지 아니하고 있어 정식으로 고구려의 국왕으로 볼 수는 없다. 그런데 훗날 절노부에서 영웅 고주몽이 나타나서 강력한 국왕이 되면서 세습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초대왕을 동명성왕인 고주몽으로 보고 있는데 그때가 서기전 37년경이다.

맥족인 절노부에서 동명성왕이 등장하여 강력한 왕정을 실시하면서 국호를 고구려로 정하자 그것에 반발하는 예족들이 3갈래길로 남하를 하게 된다. 그로부터 동부여, 서부여, 남부여가 탄생하고 있는데 그 지역이 열도, 대륙, 반도이므로 각각 열도부여, 대륙부여, 반도부여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참고로 첨언하자면, 반도부여가 백제이고 열도부여가 왜국이며 대륙부여가 산동성과 그 이남의 해안지역이다. 그와 같은 예맥족의 역사 가운데 오래 살아 남아서 오늘날까지 하나의 민족의 동질성을 두드러지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 만주와 한반도의 ()민족이다.

그들의 국가가 삼국시대에는 북쪽의 고구려, 남쪽의 백제와 신라였다. 그 가운데 한반도의 북쪽 절반과 만주 전체를 차지하고 있던 고구려가 동북아의 호랑이로서 중원의 통일국가 수나라 그 뒤를 이은 당나라와 대등하게 전쟁을 벌인다;

 그 오랜 전쟁의 결과 연개소문의 아들대에 와서 서기 668년에 내분으로 말미암아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고 만다.

그렇지만 30년의 세월이 흐르자 서기 698년에 고구려의 유민들이 말갈족과 힘을 합하여 고구려의 고토에 발해국을 세우고 있다. 그 나라가 해동성국으로 크게 번영을 누리게 된다;

 나중에는 그만 왕족 사이에 내분이 발생하여 어이없게도 거란족이 세운 서쪽의 요나라에 의하여 서기 926년에 멸망을 당하고 만다.

그렇지만 그 남쪽인 반도에서는 통일신라와 그 뒤를 잇고 있는 고려가 성립이 되어 한민족의 역사를 한반도 내에서 겨우 보전하게 된다. 그와 같은 한민족의 변천사에 유의하여 여기서는 한때 동북아의 호랑이로 이름을 떨친 고구려와 발해의 패권에 대하여 한번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로, 한때는 만주지역을 석권하고 동북아의 호랑이로 불린 고구려나 발해가 어찌하여 중원을 정복하지 못하였는지에 관하여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다. 훗날 말갈의 후예로 볼 수 있는 만주의 여진족이 금나라를 세워 중국본토의 북쪽 절반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나중에는 청나라를 세우고 중국전부를 차지하여 오래 다스렸다.

그 뿐만이 아니다. 북방의 유목민이 세운 몽골제국의 한 갈래인 원나라는 중국을 정복하여 역시 통치한 적이 있다. 그런데 같은 유목민의 피를 지니고 있는 만주의 패자인 고구려와 발해는 어찌하여 한번도 중원을 차지하지 못하고 멸망을 당하고 만 것일까?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내분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고구려 말기에는 연개소문이 쿠데타로 집권하여 중원의 지배자인 당나라의 침입을 계속 막아내기에 급급하다. 따라서 연개소문 당시의 고구려는 백성들의 삶을 도탄에 빠뜨리고 만다. 더구나 독재자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죽고 나자 장남과 지차 사이에 권력다툼이 발생하여 장남이 적국 당나라에 망명을 하게 된다.

장남 연남생이 자원하여 당나라 군대를 인도하여 동생들을 치고 기여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마는 것이다;

 조국보다 일신의 영달과 복수를 도모하고 있는 소인배가 있었기에 고구려는 결코 중원을 차지하지 못한 것이라고 하겠다.

참고로 안보론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내우가 있는 나라는 외환에 의하여 쉽게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구려가 중원을 차지할 수 있는 방법은 내우가 없이 일치단결하는 것인데 그것이 부족한 고구려의 왕족과 귀족사회라고 하겠다.

둘째로, 발해의 선왕 때에는 그 세력이 그 옛날 고구려보다 더 막강하여 해동성국으로 불리고 있다. 그런데 발해가 중원 전부를 도모하지 못하고 있다. 일부지역을 잠시 점령하는데 그치고 있을 뿐이다. 어째서 발해의 패권이 그 정도에 그치고 만 것일까?

그 이유를 일부 학자들은 백두산 화산의 대폭발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정확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발해 내부의 권력투쟁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기본적으로 발해국을 건국할 때에 고구려 유민의 수가 절대다수가 아니다. 고구려의 피지배 민족이었던 원주민인 만주족 곧 말갈인의 수가 더 많은 것이다.

그 두 부류가 옛날 고구려 시대처럼 강력하게 하나의 민족으로 융합이 되지 아니하고 있다. 그러므로 발해는 내부적으로 모래 위에 지은 성과 같은 것으로 볼 수가 있다. 그와 같은 문제를 지니고 있지만 선왕이 해동성국으로 칭송을 받은 것을 보면 그의 치적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런데 선왕과 같은 위대한 영웅왕이 죽고 나자 그만 망조가 들고 만다. 왕자들이 서로 보좌를 차지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그것을 보고서 말갈인들이 제살길을 찾아서 분리가 되고 있다. 그 틈에 서쪽에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가 기습을 하자 모래성 발해가 속절없이 무너지고 만다;

어째서 발해가 내적 융합을 그토록 이루지 못한 것일까? 그것은 두고두고 역사적인 미스터리다. 대조영의 후손들이 무려 수도를 5군데로 분산시키면서 발해왕국을 겨우겨우 유지하고 있다. 그것은 5부족의 눈치를 보면서 왕권을 유지하고 있다는 의미로 보인다. 요컨대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지 못하였기에 중원을 완전히 정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셋째로, 서기 926년에 발해가 망하고 나자 일부세력이 남하하여 반도의 남쪽에서 융성하고 있는 고려로 망명을 하고 있다. 그것을 보고서 서기 935년에는 약소국이 되어버린 신라의 경순왕이 고려의 창건왕 왕건에게 나라를 들어서 바치고 만다. 이듬해에는 후백제를 세운 바 있는 견훤이 왕자들의 반란을 피하여 고려로 망명을 한다. 그리고 고려군을 인도하여 후백제를 치고 나라를 왕건에게 바치고 마는 것이다.

그때부터 한반도 남부를 통일한 고려가 한민족이 세운 국가로서 유일한 정통성을 지니게 된다. 태조 왕건은 조상들이 살고 있던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으라는 유언을 하고 있다. 그 유언이 아주 조금씩 지켜지고 있다;

그러나 서기 1392년에 역성혁명이 발생하여 고려는 조선이라고 국호가 바뀌게 된다. 조선에서는 만주족의 세력이 약화된 호기를 맞이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한반도를 전부 영토로 삼게 된다;

 하지만 만주지역을 차지한 것은 결코 아니다.  

결론적으로, 21세기에 들어서자 대한민국이 경제적인 발전을 이루고 선진국이 되고 있다. 하지만 그 영토는 헌법상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정이 되어 있고 그것도 북쪽의 절반은 현실적으로 북한의 공산정권이 차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역사적으로 동북아를 호령했던 선조들의 나라 고구려와 발해의 고토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온다. 누군가 현대일본의 문화적인 특징을 축소지향적이라고 규정한 적이 있다. 그 말을 원용한다면 안타깝게도 오늘날 한민족의 역사적인 특징이  축소지향적이다.

이제는 조상들 앞에 부끄럽지 아니한 자손들이 되기 위하여 한민족은 그 옛날 예맥족의 기상을 되찾아야 한다. 그리고 고구려 말기처럼 국가의 지도자들이 백성들의 삶을 도탄에 빠뜨려서는 안된다.   

나아가서 발해의 말기처럼 서로 대권을 차지하려고 혈안이 되어 지방의 분열이 심화되고 있는 것을 등한시해서도 안된다. 그와 같은 교훈을 반면교사로 삼아 전진한다면 한민족이 언젠가는 그 옛날 조상들에게 부끄럽지 아니한 예맥족으로 다시 역사 가운데 등장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한 미래가 펼쳐진다면 한민족이야 말로 단군 시조의 가르침 그대로 번영과 영광을 이웃나라와 함께 나누는 이른바 홍익인간의 이념을 실천하는 좋은 민족으로 자리매김이 될 것이다. 그날을 소망하면서 이글을 마치고자 한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