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제26강(요3:22-30)
작성자; 손진길 목사(로토루아순복음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년 4월24일(수)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침례를 베푸시더라(요3:22)
예루살렘에서 성전청결사건을 일으키신 예수님은 밤중에 니고데모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그와 함께 대화를 나누신 다음에 제자들과 함께 내륙으로 북상을 하고 있습니다. 가는 도중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요단 강가에서 많은 사람에게 침례를 베풀었습니다. 그 일은 세겜 가까이 갈 때까지 계속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백성들에게 침례를 준 대표적인 장소가 ‘살렘’ 가까운 ‘애논’이라고 사도 요한이 표기하고 있습니다(요3:23). 참고로, ‘애논’은 물이 많은 요단 가까운 지역이며 세겜 북동쪽에 있는 강변도시 ‘벧스안’에서 12km정도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학자들이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스승인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모두 백성들에게 침례를 행하고 있으므로 그 숫자가 엄청났습니다. 세례 요한의 경우에는 제자들에게 침례의 권한을 위임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원망과 부러움이 섞여있는 발언을 하고 있습니다;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침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요3:26). 세례 요한은 제자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제자들에게 침례의 권한을 위임해줄 수 있는 권세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허용한 권한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가 알아 듣도록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요3:27). 예수님은 독생자의 영광을 지니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 분은 창조주이시며 사람들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에게 세례의 권한을 위임해 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종인 세례 요한은 주인의 허락이 없이는 함부로 자신의 제자에게 침례를 베풀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해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인과 종 사이의 권한의 차이입니다. 그 차이를 세례 요한이 분명히 알고서 사려 깊게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제자에게 분수를 지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분수는 두 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첫째, 세례 요한이 메시아가 아니듯이 제자들도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둘째, 어디까지나 주인이 가는 길을 먼저 준비하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마치 그리스도인 것처럼 주인의 고유권한을 침범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요3:28). 그러므로 예수님이 세례 요한을 다음과 같이 칭찬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11:11). 참으로, 세례 요한의 가르침이 새삼 그리워지는 오늘 날입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요3:29)
세례 요한은 메시아의 종입니다(요1:27). 메시아가 왕으로서 행차하는 길을 편하게 하기 위하여 외치는 자의 소리입니다(요1:23). 그런데 여기서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을 신랑의 ‘절친’(best friend)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고대사회에서 종이 친구가 된다고 하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철저한 신분사회에서 그와 같은 비유를 감히 하고 있는 것일까요? 세례 요한이 갑자기 스스로 지켜야만 되는 주종관계의 법도를 깨고 있는 것일까요? 그 해답을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서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15:14-15).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무엇을 행하려고 왔는지를 세례 요한이 깨닫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말씀을 공유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에 의존하여 그 말씀의 권위로 일을 할 때에는 주인을 대신하고 대리하는 위치에 서게 됩니다. 특히 신랑이 되시는 예수님에게 새로운 성도를 신부로서 보내어줄 때에는 함께 기쁨을 공유할 수 있는 친구의 위치에 서게 됩니다. 천국으로 많은 영혼을 구원하여 인도하는 일에 있어서는 친구와 같은 기쁨이 충만합니다. 그 사역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신분도 높여주시고 든든한 말씀의 지원과 성령님의 역사도 보장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그와 같은 뒷받침과 은혜를 맛보고 예수님이 친구라고 불러주는 위대한 종이 모두 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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