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28강(요4:1-9)(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3. 3. 03:17

요한복음 강해 제28(4:1-9)

작성자; 손진길 목사(로토루아순복음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 4 25(: ANZAC DAY in NZ)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4:1)

 

구약시대 유대인들의 성경선생이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히브리 성경 39권을 전부 정경으로 믿고서 깊이 있게 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주석을 붙였습니다.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도록 행동규칙도 많이 정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 랍비는 신앙심 깊은 백성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길거리에서 백성들의 문안과 인사를 받기를 좋아했으며 모임장소에 가면 의례적으로 상석은 그들의 것인 줄 알고서 지냈습니다(23:6-7). 그러한 세월이 수백 년 동안 지속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가 없던 제2성전시대, 특히 중간기에 있어서 바리새인들은 선지자의 빈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말라기 선지자 이후 무려 450년 만에 갑자기 요단 강가에서 두 사람의 선지자가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세례 요한과 나사렛 예수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신경은 온통 그 쪽으로 쏠리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 가운데 누가 더 백성들에게 영향력이 큰 선지자인지를 눈여겨보고자 한 것입니다. 그와 같은 비상한 시국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세례를 줄 수 있는 권한을 위임하고 있습니다(4:2). 그 이유는 메시아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도 받고 아울러 세례를 받고자 예수님을 찾아오는 유대인들의 수가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세례 요한은 그러한 조치를 취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메시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세례식을 행하고 성찬식을 행할 수 있는 권한은 본래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으로부터 직접 위임을 받아야만 합니다. 메시아가 아닌 일개 선지자가 그와 같은 창조주의 권한을 위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연합을 이룸으로써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효과를 옷 입게 되는 세례식과 성찬식을 시행할 수 있는 권리를 당사자인 그리스도가 아니면 누가 위임을 해줄 수가 있겠습니까? 설혹 어느 교단이나 교황이 위임을 하여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신적인 권위로서의 정당성을 이미 상실하고 있는 하나의 종교적인 행위가 되고 말 것입니다. 요컨대, 세례와 성찬을 주재한다고 하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유권한을 정당하게 위임 받았다고 하는 의미가 항상 그 속에 담겨 있다고 하겠습니다.

어쨌든 예수님 일행에게 더 많은 백성들이 복음을 들으려고 몰려왔으며 세례를 받는 자의 수도 세례 요한의 일행보다는 월등히 많았습니다(4:1). 자연히 바리새인들의 감시의 눈초리가 더 따가워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시선을 피하고자 내륙의 길로 북상을 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땅을 지나서 고향이 있는, 소위 홈 그라운드갈릴리로 가려고 길을 잡고 있는 것입니다(4:3-4). 점점 운신의 폭이 넓어지고 복음전파의 자유가 주어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으므로 바리새인들의 시야에서 벗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교적인 시비가 줄어들고 있는 것입니다. 갈릴리에 있는 대도시를 만나기 전까지는 대체로 그러할 것입니다.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4:5)

 

예루살렘에서 세겜으로 가는 길은 가나안 땅의 중심부를 통과하는 것이며 역사적인 의미가 강합니다. 이유는 예루살렘은 남쪽 다윗 왕조의 중심지입니다. 반면에 세겜은 북쪽 이스라엘 왕국이 시작되었던 처음 수도였습니다(왕상12:25). 남과 북의 제사장나라는 모두 이민족에 의하여 망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 왕국의 유민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자 했습니다. 그때 북쪽의 사마리아 사람들이 함께 예루살렘 성전을 짓고 싶다고 요청을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지도자인 스룹바벨과 예수아는 완강하게 거절을 했습니다(4:3). 이유는 가지 때문으로 보입니다; 첫째, 사마리아 사람들이 종교적으로 우상을 많이 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왕하17:6-12). 다른 우상을 많이 섬기면서 야훼 하나님을 섬기고자 합니다(왕하17:29-33). 그것은 야훼 하나님을 우상의 하나로 인식하고서 복까지 받겠다고 하는 종교적인 혼합주의이며 기복사상입니다. 오로지 야훼 하나님만을 섬기고 있는 유대교인으로서 성전을 예루살렘에 재건하고자 하는 스룹바벨과 예수아는 도저히 그것만은 받아 들일 수가 없었습니다(6:4-5). 둘째, 사마리아 사람들은 과거 그들을 정복했던 앗수르제국에 의하여 인종적인 혼혈을 강요 당했습니다(왕하17:22-24). 그래서 종교적인 순수성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피의 순수성도 모두 잃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같은 이스라엘 자손의 순수한 혈통이 이미 아니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북쪽 이스라엘의 지파의 족보가 사라지고 것입니다. 다행히 남쪽 유다로 일부 피난을 사람들 때문에 사라진 족보의 흔적이 간간이 남아 있을 뿐이었던 것입니다(2:36). 그러한 가지 이유 때문에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루살렘 재건사업에 참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축복의 그리심에 자신들만의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렇지만 성전은 BC 107년에 예루살렘의 레위 하스모니안 왕가의 침입에 의하여 파괴를 당하고 맙니다.

그리심 산은 해발 854m 높이로 세겜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아름다운 산입니다. 햇빛을 많이 받고 있어 나무가 울창합니다. 마디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산입니다. 반면에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해발 920m 에발 산은 볼품이 없는 민둥산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을 정복할 당시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양분하여 그리심 산에서는 축복의 말씀을, 에발 산에서는 저주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8:33). 세겜의 이름을 사도 요한이 여기서 다르게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수가성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의미가 무엇일까요? 의미를 추적할 있도록 사도 요한이 실마리 하나를 남기고 있습니다;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아들 요셉에게 땅이 가깝고 거기 야곱의 우물 있더라”(4:5-6). 여기서 아들 요셉에게 세겜입니다(48:22). 그리고 야곱의 우물 수가 성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수가 옛날에 야곱이 세겜의 히위 족속으로부터 일백 개로 구입한 있는 땅이라고 하겠습니다(33:18-20). 우물이 있기에 훗날 동네가 형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수가 성의 정확한 위치는 구약의 세겜과 동일시 되기도 하지만(33:18-19) 세겜 바로 북쪽 오리쯤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야곱이 북쪽 밧단아람에서부터 남쪽 가나안으로 금의환향을 해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세겜 성은 훗날 로마군대에 의하여 파괴되었으며 그곳에 로마황제가 신도시 나블루스 건설하였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그리심 산에 가까운 수가 성에 도착을 했을 때는 방낮이었습니다(4:6). 해가 높이 솟아 있어 뜨거웠습니다. 갈증이 났습니다. 그래서 동네 우물가에서 예수님은 물을 얻어 마시기를 원하고 있습니다(4:6-7). 마침 수가 여인 사람이 물을 길러 왔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대화가 전개됩니다; “물을 달라!”(4:7),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4:9). 마침 예수님의 제자들이 동네 안으로 먹을 것을 사러 갔기에 대화는 예수님과 수가 여인 사이에 일대일 이루어진 것입니다(4:8).  그리고 여인의 답변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서로 상종을 하지 아니하고 지내오고 있는 역사적인 현실을 날카롭게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미 지적을 한대로 북쪽 이스라엘 왕국의 유민들 가운데 사마리아 땅에 여전히 남아 있는 자들이 통칭하여 사마리아인입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순수성도, 민족적인 순수성도 모두 잃어버리고 살고 있습니다. 이민족과의 혼혈은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동족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있으며 사람으로 취급하지도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인데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의도적으로 대화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오직 가지입니다. 그들 이방인보다도 못한 자로 괄시와 천대를 받고 있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만민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입니다. 바야흐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사마리아에서 예수님에 의하여 이방 땅으로 넘어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