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23강(요3:8-15, 1:33)(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2. 28. 10:23

요한복음 강해 23(3:8-15, 1:33)

작성자; 손진길 목사(로토루아순복음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 422()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알라 하셨기에(1:33)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 가운데 드러나고 있는 의문사항을 해결하자면 사도 요한이 세례 요한의 증언으로 기록하고 있는 위의 글귀를 정밀하게 다시 해석하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세례 요한은 위의 글에서 다음 가지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메시아로 오시는 분이 누구신지는 비밀에 속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1:33a). 둘째, 메시아가 누구인지 알게 해주시는 분은 세례 요한을 땅에 사명자로 보내어주신 하나님이십니다(1:33b). 메시아가 누구인지 백성들에게 소개해주기 위하여 특별히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을 땅에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1:6-7). 환언하면, 메시아의 정체를 오로지 세례 요한의 증언을 통하여 백성들에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조치하고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탄이 미리 눈치를 채게 되면 적극적으로 방해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의 증거가 없으므로 자동적으로 거짓 메시아와 선지자들은 적그리스도로 정체가 탄로나도록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세례 요한에게 메시아가 누구인지 알게 해주는 방법은 성령의 강림과 임재입니다.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이라고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33c). 그래서 세례 요한은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이 강림하고 임재하는 장면을 자신의 눈으로 보고서 그가 메시아임을 알고 백성들에게 사실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1:29). 넷째, 성령세례를 받은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자가 되고 있습니다(1:33cd). 메시아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권한이 바로 백성들에게 성령세례를 베풀고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임을 세례 요한이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1:33-34).

세례 요한의 증언을 분석해보면 분명한 사실 하나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구약시대 성령의 강림과 임재를 경험했던 많은 사람들 , 제사장, 선지자 등과 차이가 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원칙적으로 구약의 선지자들은 메시아처럼 백성들에게 성령세례를 행할 수가 없었으며 더구나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게 하여 그들을 천국으로 들어가게 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마디로, 백성들을 천국으로 들어가게 있는 중생’, 거듭남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에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깨달음의 기초 위에서 이해할 있는 명제가 예수님의 선언, “하늘에서 내려온 ,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3:13)이며 또한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5) 구절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3-15)

 

예수님 이전에 하늘에 올라간 사람이 있습니다. 에녹과 엘리야입니다(5:24, 왕하2:11). 그렇지만 사람은 본래 하늘에서 내려온 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들은 부활의 몸을 입고 승천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죽음을 경험해보지 아니했으며 자력으로 승천을 수도 없었습니다. 에녹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데려감을 당했습니다. 엘리야의 경우에는 그의 승천을 위하여 말과 수레 그리고 회오리 바람이 동원이 되고 있습니다. 이제 성도들의 구원 영생과 관련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죽음의 과정을 통과해야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은 중요합니다. 둘째, 예수님이 무덤에서 부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들도 예수님처럼 부활할 수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처럼 지상명령을 실천하면서 살아간다면 부활의 소망을 이룰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셋째, 부활의 몸을 입고서 그대로 승천하고 있습니다. 야단스러운 과정과 절차가 없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신원의 회복입니다. 그러한 영광이 성도들에게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넷째, 성도들이 중생한 이후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정말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와 같은 은혜와 소망이 현실적인 능력으로 작동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구원과 영생이 이미 중생한 성도에게 가동이 되고 있다는 증명이 필요합니다. 점을 설명하고자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4장부터 17장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의 포도나무 비유와 마지막 기도의 내용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내용은 마디로, 보혜사 성령님이 오셔서 성도들에게 임재하시게 되면 영적으로 예수님도 하나님 아버지도 함께 임재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성도와 함께 인생을 사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성도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속사람 속에 임재하고 있으며 인생길에 동행하고 있으므로 이미 죽음을 통과하여 영생을 누리고 있는 것과 진배가 없다고 하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5:24).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3:10)

 

 물과 성령의 역사가 구약시대에도 있었음을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담겨 있는 말씀이 선지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계시의 말씀들이 소위 히브리 정경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가운데에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았던 많은 선지자들의 이야기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땅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이적으로 베풀고 백성들을 깨우쳤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니고데모가 깊이 자신에게 적용을 시키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오로지 율법을 철저히 지키게 됨으로써 구원을 얻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율법과 규례의 준수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속사람과 마음의 변화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대한 깊은 묵상과 깨달음, 그리고 성령의 임재와 영적인 인도함이 없으면 마치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영혼의 변화가 없는데 종교적인 모양새만 그럴듯하게 갖추고 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사야 선지자의 마디가 명쾌합니다;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29:13).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예언하였도다. 기록되었으되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하였느니라”(7:6-7). 니고데모 역시 바리새인이었으므로 내심보다는 외양에 신경을 쓰면서 신앙생활을 영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3 이상 예수님의 공생애를 지켜보면서 내면적인 영적 변화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친구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서 예수님의 시신을 로마총독 본디오 빌라도로부터 인수 받아서 장례를 치르고 있습니다(19:38-40). 니고데모의 귀에는 예수님의 깨우치심의 소리가 계속 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3:10-12). 그러므로 신앙생활에 있어서 정작 중요한 것은 땅의 것으로 하늘의 것을 판단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도움이 아니면 인간이 구원과 영생을 이룰 수가 없다고 하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율법과 규례를 온전하게 지키는 일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인간의 생각의 뿌리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의 본성을 이길 있는 힘이 사람의 의지 속에, 율법의 강제력 속에, 자력적인 깨달음 속에 담겨있지 아니하다는 사실을 빨리 깨닫고서 능력을 달라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매어 달리는 것이 구약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함(upright)”이라고 하겠습니다(25:8, 32:11, 2:7). 많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미 점을 지적하고 있기에 예수님께서 3:11’절에서  우리라는 용어를 번이나 사용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사도 마태의 글에 의하면 독생자께서 이미 구약시대에도 선지자들을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계시를 백성들에게 많이 전해주었기에 말씀과 예수님의 복음이 동일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11:27). 다만 문제는 계시의 취지를 무시한 선민들이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함으로써 변질과 왜곡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질적인 말씀의 뜻을 깊이 묵상하면 거듭남의 비밀도 깨달을 수가 있었을 터인데 이스라엘의 선생인 니고데모가 대목을 놓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지적 사항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우리 모두가 그와 같은 예수님의 질책을 받지 아니하도록 구약에 있는 하나님 말씀의 뜻을 파악하고 예수님의 복음의 이해에 깊이를 더하는데 한층 노력하는 신앙생활이 있기를 바라 마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