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21강(요2:23-3:5)(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2. 27. 05:05

요한복음 강해 21(2:23-3:5)

작성자; 손진길 목사(로토루아순복음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 420()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2:23)

 

그의 이름을 믿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서 예수님의 신분이 메시아이며 그의 정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었다는 뜻입니다(1:49, 2:23). 그것은 획기적인 인식의 변화입니다. 그리고 당시로서는 굉장히 위험한 믿음입니다. 원칙적으로 유대교는 유일하신 분의 창조주 야훼 하나님만을 섬기고 있을 아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6:4-9). 그것은 마디로, 하나님의 신성에 대한 모독죄 해당이 됩니다(10:33-36). 그런데 그렇게나 위험한 고백을 백성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바리새인 성경선생 니고데모가 나사렛 예수에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표적을 아무도 없음이니이다”(3:2). 그가 예수님에게 위험천만한 고백을 하면서 얻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의 확신을 얻고 영생을 얻을 있는 방법입니다. 산헤드린 공회원으로 추정되는 높은 신분의 니고데모가 밤중에 찾아와서 길을 알려달라고 예수님에게 매어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3:1-15).

그런데 80대의 노인이 되어 지금 4복음서를 기록하고 있는 사도 요한은 옛날 학문이 별로 없었던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4:13). 그는 그의 스승에 관한 이야기를 로마세계의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게 전해주기 위하여 오랜 세월 에베소에 거주하면서 헬라의 철학과 사상을 공부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글은 보통 신학자가 흉내를 수도 없을 정도로 심오한 학문적인 체계를 보이고 있습니다. 용어사용과 개념의 연결이 매끄럽고 논리적입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위의 명제는 면밀하게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요한복음은 전체가 21장으로 되어 있는데 사용되는 용어의 설명과 명제의 설명이 대부분 1장에서 이미 기술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1장이 전체의 서론이 되고 있다고 말할 있습니다. 둘째, 1장에서 영접하는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1:12). 따라서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서 그의 이름을 믿는 자들도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고 있습니다. 셋째,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는 것만으로 구원과 영생을 확신하는 신앙생활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유는 성육신을 하신 창조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생활을 하면서 그로부터 충만한 은혜와 진리를 얻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1:14-18). 그러므로 이제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요시되고 있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생활을 하면서 특별한 은혜와 진리를 얻는 것입니다.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 사도 요한의 기록들입니다. 36개월 동안 스승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다니면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많은 표적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분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르침보다 중요한 것은 복음의 말씀을 증거하는 예수님의 공생애 자체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구원과 영생의 능력을 제자들에게 확인을 시켜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약속하신대로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어 성도들의 속사람 속에 임재하게 해주셨습니다. 이제 성도들은 하나님의 진리의 영을 모시고 함께 신앙생활을 영위할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세월 동안 사명을 감당하면서 자신의 부활과 승천이 이루어지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다는 소망에 넘치고 있습니다. 그러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 특별히 사도 요한의 글들이라고 말할 있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심이니라(2:25)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백성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능력으로써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이 수가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지적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가 다음 구절에 흠뻑 젖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2:23-25). 과연 사람의 속에 무엇이 담겨 있기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백성들도 구원과 영생의 확신을 얻을 수가 없는 것일까요?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세기의 설명을 참조해야만 합니다. 성경전체의 서론이 되고 있는 그곳에 중요 개념이 이야기 형식으로 설명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시대 홍수로써 사람의 죄악을 심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죄성에 대한 하나님의 언급이 다음과 같습니다; “야훼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6:5-6). 홍수심판 후에도 죄의 본성이 인간 속에 자리잡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8:21).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롭게 변화시키기 이전에는 구원의 확신이나 영생의 소망이 이루어질 수가 없다고 말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완전하게 변화시킬 있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요? 방법을 들려주시고 보여주시고 깨닫게 해주시고 경험하게 해주기 위하여 구원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이제 사도 요한이 설명하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사족을 더하자면, 그러한 완전한 변화가 없으면 하나님의 임재가 이루어지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의지하거나 영으로 함께 동행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죽음과 부활, 성령의 강림,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임재 동행의 과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없느니라(3:3)

 

  니고데모는 아리마대 요셉과 친구입니다. 그는 요셉과 행동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산헤드린 공회 내에서 종교 정치적인 입장을 같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이 예수님의 장례를 사람이 함께 치르고 있는 장면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19:38-42). 그들은 비록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지만 점을 숨기고 있습니다. 이유는 산헤드린 공회에서 바리새인들이 소수파이며 더구나 예수를 메시아라고 인정하고 있는 자가 극소수이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이 나사렛 예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사도 요한은 은연중에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라”(1:24). 산헤드린 공회에서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이 공식적으로 파견한 제사장과 레위인 랍비들은 세례 요한의 정체를 파악하자 일찍 되돌아 갔습니다(1:19-23). 그렇지만 바리새파 공회원들이 특별히 보낸 자들은 끈질기게 세례 요한에게 묻고 있습니다;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침례를 베푸느냐?”(1:25). 심도 깊은 질문에 대하여 세례 요한이 중요한 답변을 해주고 있습니다; 자신의 뒤에 메시아가 오신다는 것입니다(1:26-28). 그리고 분이 바로 나사렛 예수이심을 다음 백성들에게 증거해주고 있습니다(1:29-34). 그러한 정보는 즉각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에게 보고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은밀하게 그들이 나사렛 예수를 방문할 차례입니다(3:1).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의 마디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표적을 아무도 없음이니이다”(3:2). 이것은 세례 요한에게서 들었던 예수님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기에 가능한 고백입니다. 모든 체면을 내려놓고 그와 같은 신앙고백을 하면서 간절하게 구원과 영생의 길을 묻고 있는 니고데모를 예수님께서 좋게 보신 같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중요한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없느니라!”(3:3). 예수님의 말씀을 음미해보면, 구원을 얻는 방법을 넉넉히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마음 속에 둥지를 틀고 있는 죄의 소원 다스리는 방법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4:7, 3:9-12, 7:21-24). 인간의 의지, 율법의 강제성, 고행과 득도, 어떠한 인간적인 노력과 행위도 완전한 성취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님께서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습니다(2:23-24). 환언하면, 영생의 하나님이 그들 속에 임재할 수가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 그렇다면 창세기에서 발견할 있는 에녹의 휴거와 노아의 방주는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요? 에녹이 휴거를 있었던 비결은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5:22-24). 여기서 죄성을 마음 속에 지니고 있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과 평생 동행하는 경험을 수가 있었는지 의문입니다. 그리고 에녹이 천국으로 바로 입성하였다고 섣불리 단언할 수도 없습니다. 이유는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3:13). 그렇다면 에녹은 스스로 하늘로 올라간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은 자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모세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5:24). 노아의 경우에는 그의 가족이 그로 말미암아 대홍수의 심판에서 구원을 받게 됩니다. 노아의 신실한 하나님 신앙은 다음과 같이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6:9). ‘하나님과의 동행, 에녹의 경우에 비추어 보면, 심판을 면할 있는 자격입니다. 그렇다면 의인의 삶과 완전한 삶은 그의 식솔을 모두 방주에 태울 있는 자격요건이 되고 있습니다. 뜻을 간결하게 풀이해봅니다; ‘의인이라고 하는 것은 마디로,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하는 자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고 있는 아브라함이 점에 있어서 좋은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야훼를 믿으니 야훼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15:6). 자식이 없는 아브람이 가신 엘리에셀을 후계자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이 잘못이라고 즉시 반성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주시고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예언을 당장 믿고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이며 그러한 자가 의인입니다. 다음으로 완전한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자입니다(17:1). 요셉처럼 24시간 하나님의 의식하는 자는 완전한 인생을 수가 있습니다. 은밀한 유혹 가운데에서도 그는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의식하고 있습니다(39:9). 그리고 매사를 하나님에게 묻고서 뜻을 따라 형통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최종결정권자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고 있으니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종의 구원을 책임지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결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독생자가 보냄을 받고 있다고 하겠습니다(3:16). 셋째로, ‘거듭난다 하는 것은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향년을 맞이하기 전에 인생 가운데 죽음과 부활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방법은 하나님께서 그렇다고 인정하시고 의제를 해주실 경우에만 가능합니다. 경우가 바로 독생자의 대속입니다. 그리고 부활사건입니다. 쉽게 설명을 하자면,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에 자신을 못박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에 자신을 다시 부활시키는 입니다. 사도 바울의 설명에 따르면 그것은 정확하게 세례의 의미입니다(6:4). 그런데 세례에는 물세례 성령의 세례 있습니다. 가지 세례가 있을 때에 영적으로 거듭나는 자가 된다고 예수님이 친절하게도 니고데모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없느니라”(3:5).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모두 경험하게 되는 성도들은 분명 성령세례를 경험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던 세례 요한보다 천국에서 자가 있을 것입니다(11:11). 그러므로 아무쪼록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는 세례의 의미를 깊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음미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