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22강(요3:3-8)(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2. 27. 05:06

요한복음 강해 22(3:3-8)

작성자; 손진길 목사(로토루아순복음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 421(주일새벽)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없느니라(3:5)

 

니고데모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없느니라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3:3b). 그리고 명제가 진리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라고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3:3a). 여기서 거듭 난다 하는 것은 중생’(重生, born again)이며 다시 태어나는 의미하고 있습니다. 사람인 니고데모의 경험 가운데에서는 어머니의 모태에서 아기가 태어나는 것을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개념을 다음과 같이 확인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있사옵나이까?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있는 방법이 있사옵나이까?”(3:4). 사도 요한은 니고데모가 극존칭을 사용하여 지극히 공손하게 나사렛 예수에게 묻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진리를 선언하고 있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체로 자리에 임하고 있었음을 밝히고자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그것이 예수님이 지니고 있는 신성입니다. 언뜻 보면, 예수님이 진짜 사람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사람과 똑같이 여자의 모태에서 아기로 태어나서 동일하게 성장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속사람으로부터 지금 흘러나오고 있는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권위는 니고데모를 압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것이 아니기에 니고데모가 극존칭을 사용하고 있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근본적으로 생각을 해보아야만 하는 이슈가 하나 있습니다. 이슈를 끌어내기 위한 논리의 전개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주기 위하여 친절하게도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에게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마디로, 독생자가 성육신하신 번째 목적입니다. 둘째, 사람의 몸으로 죽음에서 부활하고 스스로 승천하는 광경까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같은 조건으로 우리도 구원과 영생을 누릴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육신하신 번째의 목적이 되고 있습니다. 셋째, 그러나 의문은 여전히 남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예수님은 사람이지만 근본적으로 신분과 정체가 보통사람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을 받아야만 되는 보통 사람들을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지도록 먼저 만들지 아니하면 아니 되는 것입니다. 방법이 무엇일까요? 여기서 예수님의 입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없느니라”(3:5). 언뜻 보면, 물세례와 성령의 세례를 의미하고 있는 같습니다. 그렇지만 깊숙한 의미의 해석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차이를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육으로 것은 육이요 영으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지지 말라”(3:6).

 

육으로 것은 육이요 영으로 것은 영이니(3:6)

 

  하나님은 인간의 겉사람인 육체에 신분을 부여하고 있지 아니합니다. 속사람 속에 신분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마디로, 외모를 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영과 교통할 있는 경건한 속사람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으로 기름을 부을 자를 고르실 때에 선지자 사무엘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하고 있습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야훼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사람의 몸은 시공간에 갇혀있는 것이며 수명이 유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생하시는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거주하기 위해서는 영생을 누릴 있는 특별한 몸이 필요합니다. 몸은 유한한 육체가 죽고 나서 비로소 얻을 있는 부활의 몸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몸을 당장 얻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직 향년을 맞이할 때까지 유한한 육체를 가지고 살아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목숨이 다할 때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땅에서의 사명을 감당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완전한 구원과 영생을 얻을 있는 신분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있지만 예수님처럼 속에 신성을 갈무리하고 있는 그러한 상태로 만들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신성을 담을 있는 몸을 만들 있는 방법이 이미 소개가 되고 있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입니다(3:5). 그것은 육체적인 의미가 아니라 영적인 의미로 그렇게 태어난다고 예수님이 첨언하고 있습니다(3:6). 성령은 본래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의미 자체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물이 지니고 있는 영적인 의미에 대하여 묵상을 해보아야 합니다. 먼저 물세례를 때에 사용하는 물이 영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물세례를 받을 때에 영적인 차원에 있어서는 다른 물이 개입을 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물은 창세기 1장에서 벌써 소개가 되고 있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1:2). 혼돈과 어두움의 세력을 제어하고 있는 물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닷물이나 강물이 아니라 천상의 물입니다. 물을 예수님이 사마리아 수가 성의 여인에게 주고자 하십니다(4:10). 구체적인 설명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 (우물)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4:13-14). 그리고 나서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4:23-24). 그러므로 생명수 거룩한 물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본뜻을 정확하게 깨닫고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는 비록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신분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점을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너희 율법에 기록된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10:34-36, 82:6).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본뜻을 정확하게 깨닫고 실천하는 자에게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에 그는 하나님의 신성을 보유하게 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는 비록 모태에서 태어났으나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자입니다. 이제는 예수님과 몸이 되어 남은 생애를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다시 살아난 신분으로 평생 분의 지체로서 행동하게 것입니다. 점을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 가운데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17:20-24).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3:8)

 

  바람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람이 불고 있다는 증거가 드러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바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님을 우리는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하나님의 말씀의 본뜻을 헤아릴 있는 지혜의 문을 열어주시고 육신적인 생각과 행동을 제어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때에 성령님이 자신에게 임하여 역사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뿐입니까? 인간의 이성과 과학의 한계를 뛰어넘어서 생명을 살리고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때에 창조주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지금도 인생과 역사를 주관하고 계심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묘막측한 삼라만상과 우주의 창조 그리고 치의 오차도 없는 천체의 운행을 가능하게 하고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영적인 능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가깝게 느끼는 것은 많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21세기에 있어서 아직도 70억의 인류가 생존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보호하심 때문이라고 밖에 없습니다. 핵무기 보유 강대국들의 정치적, 군사적 지도자들이 모두 유능해서가 아닐 것입니다. 철저하게 핵단추를 관리하고 있어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오류와 오차가 많은 것이 인간의 심성이며 행동양식인지를 사회과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완벽하게 통제가 되지 아니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인간의 행태, 소위 ‘human behaviour’입니다. 결론적으로, 아직 지구인들의 역사와 문명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만민구원의 계획이 아직 종료되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독생자가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로 오셔서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이 되고 예수님처럼 살아감으로써 천국으로 입성할 있는 구원과 영생을 누리라고 말씀하신 때로부터 우리 인생들은 종말의 때를 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상의 구원과 영생을 얻을 있는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구원과 영생의 길을 만민에게 끝까지 알려주고 가르쳐주는 일만이 남아 있습니다. 일이 마쳐지는 때에 세상의 마지막 종말이 임할 것이라고 공관복음에서 이미 언급하고 있습니다(24:14). 그러므로 아무쪼록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새로운 신분과 능력을 받아서 남은 인생을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보람 있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