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19강(요2:12-22)(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2. 26. 04:00

요한복음 강해 19(2:12-22)

작성자; 손진길 목사(로토루아순복음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 4 18()

 

예수는 성전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하나님의 보좌는 하늘에 있지만 땅에 강림하실 때에는 하나님께서 성전에 머물고 계신다고 다윗이 그의 시편에서 노래하고 있습니다(11:4).  흔히 다윗의 시를 음미할 때에 언제나 시공간에 갇히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제한적인 것으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 보좌에 계실 때와 성전에 계실 때가 서로 분리된 시간대인 것으로 사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늘(heaven) 계시고 동시에 세상에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와 피조세계를 동시에 일통하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러한 능력의 소유자이시기에 피조세계의 운행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시키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정확한 인식을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분이시니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4:6).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그러한 인식의 원형을 예루살렘 성전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헐면 자신이 사흘 동안에 다시 일으키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2:19). 의미는 일만에 부활하게 자신의 육체를 두고 말한 것이라고 사도 요한이 보충설명하고 있습니다(2:21-22).

하나님께서는 피조세계를 초월하여 수면 바깥 하늘(heaven)에서 운행하고 계시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성전이 무너지더라도 하등 영향을 받지 아니하십니다. 오히려 성전에 종속되어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강요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종교적인 해방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유대교의 교리에 갇혀 있는 신앙이 아니라 시공간을 초월하고 계시는 창조주와 직접 만나고 동행하는 새로운 신앙생활이 시작되는 계기가 뿐입니다. 사도 요한은 점을 부활하신 예수님의 육체에 임하고 있는 하나님의 성전으로 일단 이해하고 있습니다(2:21). 그렇지만 개념은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를 통하여 확장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여 승천하시고 나면 땅에 진리의 성령님이 오시고 성도들에게 내주하시게 된다는 것입니다(14:16-17). 그리고 승천하신 예수님도 함께 영적으로 내주하실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14:18-19). 물론 아들을 사랑하시고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자리를 함께하실 것이라는 예언입니다(14:20). 그것은 성도들의 속사람 속에 건설되고 있는 완전한 성전에 대한 설명입니다(고전6:19, 8:9-17). 그러한 설명의 시초가 본문에서부터 비롯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진리의 말씀을 예루살렘 성전에서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명으로 보입니다. 이유는 갈릴리 지방을 방문하셨지만 고향 나사렛까지 가시지 아니하고 시급하게 예루살렘으로 직행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중간에 가나에 들리셔서 혼인잔치 집에서 모친을 만났습니다(2:1). 그리고 갈릴리의 가장 도시 가버나움으로 가는 동안에 동생들을 불러서 동행했습니다(2:12). 그러나 유월절이 임박하였기 때문에 가버나움에 오래 머물지를 못하고 바로 예루살렘으로 떠나신 것입니다(2:13). 그리고 예루살렘에서의 번째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그것은 병자의 치유가 아니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도 아니었습니다. 가장 시급한 일은 어처구니가 없게도 하나님의 집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작업이었습니다. 뜻은 장차 하나님의 성전이 임하게 사람들의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을 깨끗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컨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 새로운 성전이 되는 시대가 임박하고 있다는 신호탄이 예루살렘 성전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살펴보면, 성전청결의 사건은 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 예루살렘 방문 첫해에 있습니다. 그리고 공관복음에 따르면, 같은 사건이 공생애 마지막 해에 반복이 되고 있습니다(21:12-13, 11:15-17, 19:45-46).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역의 초점은 시작과 끝이 모두 성전청결에 있다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관심이 그가 부활한 후에 얻게 새로운 성전의 시대에 집중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쉽게 풀이해보면, 성도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매여서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처럼 장차 자유스럽게 창조주를 예배하며 함께 인생을 살아가는 시대를 열고자 하신 것입니다. 점을 사마리아 수가 성의 여인을 만났을 때에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계십니다; “여자여, 말을 믿으라.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4:21, 23). 성전이 위치하고 있는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성령 안에서 그리고 진리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분을 경배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성전과 산헤드린 공회의 권위에 굴종하고 있었던 유대교인들을 종교적으로 해방시키는 말씀입니다. 오순절 성령께서 강림하여 성도들에게 임재하여 역사하시게 되자 새로운 형태의 믿음의 공동체가 땅에 탄생했습니다. 그렇게 형성된 초대교회의 모습이 다음과 같이 기술이 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믿는 사람이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2:42, 44-47). 말씀과 성령의 역사가 공동체를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공동체는 성도들이 교제하는 장소이며 삶의 기쁨을 나누며 서로의 생활을 돌보는 장소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말씀을 전파하는 센터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공동체는 성도 각자에게 말씀과 성령의 임재라는 역사가 있게 됨으로 말미암아 탄생되고 또한 작동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공동체가 우리들의 교회의 모습이 되기를 소망해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