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18강(요2:16-17)(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2. 25. 08:21

요한복음 강해 18(2:16-17)

작성자; 손진길 목사(로토루아순복음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 418()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인류의 문명은 장사를 함으로부터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시공간에 갇혀서 사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누리고 있는 재화도 시공간에 갇혀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면, 다른 지역에 가면 흔한 것들이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는 희소성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물론 있습니다. 그리고 농사에 있어서도 추수기가 있고 춘궁기가 있어 곡물의 값이 달라집니다. 많이 생산이 되는 계절에는 흔한 것이지만 많이 소비가 되고 나면 재화는 귀해지는 것입니다. 결과 물물교환을 하더라도 재화는 장소에 따라 그리고 시간의 차이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발생적으로 교역이 발달합니다. 시장이 생기고 귀한 것은 값을 많이 받고 흔한 것은 값이 싸게 매겨집니다. 그래서 상인들이 물건을 운반하고 시간과 장소의 차이에 따라 달라지는 재화의 가치의 차이, 잉여가치 이익으로 향유합니다. 그것이 본문에서 사용되고 있는 용어 장사 의미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장사행위 인류의 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사회적인 통념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일종의 정당한 행위이며 제도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처음으로 유월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에 들리신 예수님은 성전 마당에서 제물(祭物) 장사하고 환전(換錢) 행하고 있는 무리들을 보시고서는 호통을 치고 계십니다;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2:16).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사회적인 통념에 속하며 문명발달의 근간이 되고 있는 교역제도를 거부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유대인들의 수도이며 그들의 성전이 자리잡고 있는 소위 유대교의 중심지 예루살렘은 위치와 지형이 독특합니다. 위치는 사해의 북변에서 수평으로 서진하다가 지중해를 만나기 중간지점쯤입니다. 보통 여행객들이 사해 약간 북쪽 요단 강을 건너서 서진하게 되면 가나안의 관문이 되고 있는 도시 여리고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여리고에는 세관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참고로, 예수님 당시 삭개오 여리고 세관의 책임자입니다(19:1-2). 그곳에서 협곡 통로를 따라 약간 서남진을 하게 되면 숙식비가 작은 마을 베다니 만나게 됩니다. 그곳에서 일박을 하고서 새벽 일찍이 상대적으로 낮은 구릉지 산인 감람 산을 넘어가게 되면 바로 예루살렘이라는 가파른 고원지대의 대도시로 올라갈 수가 있습니다. 그곳의 지형은 특이합니다. 북쪽을 제외하고 나머지 삼면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천혜의 요새지역입니다. 그리고 고원에 자리잡고 있는 예루살렘은 그리 넓은 면적이 아닙니다. 본래 다윗 산성이 있던 작은 성터에 불과합니다. 그곳에 종교적,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많은 인구가 몰려 살다가 보니 당연히 물자가 귀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자체 생산되는 것이 별로 없는 대표적인 소비도시가 되었기에 자연히 물가가 비쌀 밖에 없는 곳입니다. 거기에 계절적인 요인도 몫을 하고 있습니다. 유월절 같은 명절이 있게 되면 국내외에서 경건한 많은 유대인들이 몰려듭니다. 숙박업과 요식업이 대호황을 맞습니다. 그리고 거리를 순례자들이 제물로 바쳐질 동물을 끌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모두들 예루살렘에서 제물을 사야만 하기에 그곳에서 팔고 있는 소나 그리고 비둘기의 값이 비싸집니다. 아울러 해외 동포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용할 돈을 현지화로 환전하여야만 합니다. 가지 편의를 제공하고 있는 곳이 여기서는 예루살렘 성전 내에 자리잡고 있는 마당의 장터입니다. 그곳에서 제물도 판매하고 환전도 해줍니다. 그것은 이권입니다. 이권을 장사꾼들에게 허용해주는 조건으로 헤롯 왕과 대제사장이 돈을 거두고 있습니다. 돈은 대부분 예루살렘 성전의 증축에 사용이 되고 일부는 산헤드린 공회의 운영비로 사용이 것입니다. 그러한 제도와 관행에 대하여 나사렛 예수가 반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2:16).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렇게 반론을 제기하고 있는 것일까요?

기본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법도에 대해서는 창세기에서 이미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아담부부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2:16-17). 사람과 하나님이 공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구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엄청난 자유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이 사용할 있는 것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것을 사람이 침범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것이 그곳 예루살렘에서는 성전입니다. 하나님께서 머무시고 있는 성전은 거룩하게 구별이 공간입니다. 그곳으로 인간이 문명의 찌꺼기를 끌어 들여서는 아니 됩니다. 같은 말씀이 출애굽기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너의 곳은 거룩한 땅이니 발에서 신을 벗으라”(3:5). 본문에서는 사도 요한이 다윗의 시편을 빌려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69:9). 아버지 하나님의 집을 침범하고 있는 인간들의 잘못을 아들이 강력하게 징계하고 있다는 풀이입니다. 최소한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는 장사하는 행위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제도를 운영하고 싶다면 성전 바깥에서 시장을 개설하고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제사를 드리기 전에 먼저 경건하게 갖추어야만 하는 마음의 자세에 관한 문제입니다. 마디로, 하나님이 계시는 곳을 불법으로 주거침입하고 있으면서 집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다고 천명하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 말도 되며 이치에 도무지 맞지 아니하는 소리)입니다.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그러한 관행을 일삼고 있으면서 백성들에게 어떻게 율법의 준수를 강제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창조주 앞에 서있는 인간들의 분수와 법도에 대한 문제를 본문에서 예수님이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좌정하고 계시는 공간을 함부로 침범해놓고 제물을 가지고 와서 제사를 드리면 그것은 앞뒤가 맞지 아니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결국 책망을 받아도 마땅하다고 하겠습니다. 지금도 그러한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면 마디로 유구무언’(有口無言, 입이 있어도 변명할 말이 없음)입니다. 새삼 우리들의 교회문화를 되돌아보게 해주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본문의 말씀을 하나님의 것과 나의 , 하나님의 뜻과 나의 뜻을 엄격하게 구별하는 성숙된 신앙인의 자세를 갖추라는 뜻으로 받아 들였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