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25강(요3:19-21)(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3. 1. 23:53

요한복음 강해 25(3:19-21)

작성자; 손진길 목사(로토루아순복음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 423()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사랑한 것이니라(3:19)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첫째 날에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말씀으로 명령을 하시자 캄캄했던 세상이 갑자기 밝아졌습니다(1:3). 짙은 암흑 속에서 흩어져 있던 각종 땅의 소재들이 일시에 정체가 탄로나게 되자 서로 몸을 숨기기에 급급했습니다(1:2). 같은 종류가 서로의 뒤에 몸을 숨기면서 서로를 변호해주는 일종의 동류의식 생기고 처음으로 맛보는 동질적인 관계 형성이 있었다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밝아진 세상을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내버려두시지 아니하시고 낮과 으로 둘로 나누셨습니다(1:4-5). 그것은 창조물 가운데 특히 생물들에게 있어서 활동할 있는 시간대와 휴식을 취할 있는 시간대의 구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미리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낮에는 빛을 쪼이고 밤에는 어둠 속에서 휴식을 취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야행성인 경우에는 반대가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밤에도 쉬지 아니하고 일하십니다(121:3-4). 창조물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 동안에 피조세계에서 잘못 운행이 되고 있는 것들을 보수하고 치료하시는 것입니다. ‘빛과 어두움을 창조하신 하나님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돌보시면서 피조세계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나라처럼 생명을 서로 사랑하는 아름다운 관계가 영원히 지속되기를 원하시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선지자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야훼라,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하늘이여 위로부터 공의를 뿌리며, 구름이여 의를 부을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싹트게 하고, 공의도 함께 돋게 할지어다. 야훼가 일을 창조하였느니라”(45:7-8). 그러므로 빛과 어두움을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마디로, 어두움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어두움의 실체가 훤하게 드러나며 흑암 속에서 도모하고 있던 모든 일들이 탄로가 뿐입니다. 옛날 동생을 은밀하게 살해하고 암매장을 했던 카인이 완전범죄를 꿈꾸었습니다. 하나님의 질문에 거짓을 고하고 어두움의 세력에게 몸을 의탁하였습니다(6:12). 그러나 동생 아벨의 무죄한 피를 마시게 땅이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4:10). 카인의 범죄함 때문에 황폐해지는 자신을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4:11-12).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신음하는 자연의 고통소리를 오늘 날에도 창조주 하나님이 귀를 기울여 듣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부부가 서로의 치부를 가리기 시작했습니다(3:7). 가운데 노출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이름을 부르시자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있습니다(3:8). 빛보다 어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어두움 가운데 몸을 숨기고 있어야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지 아니하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쌍하게도 창조주 하나님이 어두움의 장벽을 뛰어넘을 없다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사도 요한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또는 이기지 못하더라)”(1:4-5). 어두움의 세력에 사로잡혀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독생자가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셨습니다(11:27).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들의 허물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여전히 어두움의 보호를 벗어나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죄와 사망이라는 어두움의 세력이 그들을 계속 지배하고 있습니다(7:18-24). 종말로 그들에게 생명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직접 세상에 내려 보내고 있습니다(1:14, 3:16-18). 이제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선택만이 남아 있습니다. 여전히 어둠을 사랑하고 흑암의 세력에게 몸을 맡기고 있을 것인가? 그렇게 종말의 심판을 받고 영원한 형벌에 처해지고 것인가? 아니면 가운데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창조주의 빛과 생명을 받아들일 것인가? 결론적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그것이 구원의 길이며 가운데 영원히 있는 영생의 길이 것입니다(1:12, 3:16, 8:1-4).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3:21)

 

  진리는 처음과 끝이 같으며 안과 밖이 동일한 것입니다.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어 주신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과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같은 것이기에 그것이 진리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분의 생애가 또한 같은 것이기에 그것이 확실하게 진리입니다. 같은 사실을 성도들에게 증거해주기 위하여 땅에 진리의 성령께서 오신 것입니다(14:17, 26). 만약 가르침과 행실이 다르거나 교훈과 행동이 서로 어긋난다고 하면 그것은 거짓인 것입니다. 혹시 가르침은 빛에서 행하고 자신의 행실은 어두움 가운데서 행하고 있다고 하면 그것은 거짓 선지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는 반드시 빛으로 오게 됩니다. 이유는 진리는 하나이며 결코 빛과 어둠으로 양분될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생명을 주는 진리도 하나입니다. 생명을 살리고 돌보는 창조주의 역할은 결코 죽이고 버리는 것으로 변질이 수가 없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의 취지가 생명을 살리고 돌보는 하나님의 진리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절대선이신 창조주의 정체성입니다(10:18). 그러므로 사람들의 모든 종교적인 행위와 율법의 규정도 그러한 절대선의 기준을 빛으로 하여 쪼이게 되면 정체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생명을 살리고 돌보는 것보다 하나님이 정하신 안식일의 규례가 중요하다고 믿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질책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3:4). 이제는 잠잠하게 주님의 말씀을 듣고 분을 주인으로 모시고 진리의 가운데서 살아가는 성도의 삶만이 우리 앞에 남아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이 나와 너와 우리, 그리고 그들까지 모두 살릴 있는 유일한 생명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