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2년 손진길 목사 설교문

모세의 마지막 깨달음 시편 제90편(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3. 1. 05:15

제목; “모세의 마지막 깨달음 시편 제90”(90:1-17)

설교일; 주후 202236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31일 화요일 작성)

 

150편의 시가가 수록되어 있는 시편 가운데 모세의 시는 단 하나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1편 가운데 모세의 인생살이의 고달픔과 한숨이 진솔하게 담기어 있고 또한 고달픈 인생이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어떻게 새로운 소망과 기쁨으로 바뀌고 있는가를 모세가 자신의 영적인 깨달음으로 영롱하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허무한 인생에 대한 고찰과 영생의 하나님을 만나 얻게 된 새로운 인생의 의미가 단 17절에 응축되어 있기에 오늘은 모세의 시편 제90편을 자세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노래의 의미를 깊이 묵상함으로써 인생의 슬픔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기쁨을 다시금 발견하시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서론삼아 미리 말씀드리고 싶은 것 한가지는 모세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등 오경을 기록한 다음에 마지막으로 시편 제90편의 깨달음의 노래를 남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오늘 살펴볼 모세의 노래에는 향년을 맞이한 모세의 마지막 영적인 깨달음이 진하게 담기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모세의 노래 시편 제90편의 내용을 한 구절 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묵상의 결과 얻은 교훈을 다음과 같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1.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2.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3. 주께서 사람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4.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90:1-4); 다음과 같이 나누어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1)  1.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2.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90:1-2); 이 대목은 모세오경 첫머리에 있는 창세기의 내용을 참조하여야 깊이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다음과 같이 그 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우리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날 우주의 행성을 연구하고 있는 과학자들이 장차 인간이 새로운 별에 가서 거주하자면 가장 먼저 인류가 살 수 있는 환경부터 조성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거처할 수 있는 땅을 만드는 것이라는 의미를 담아서 흔히 테라포밍’(terraforming)이라고 전문적인 용어를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2)    그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모세가 기록한 창세기 제1장 앞부분의 말씀을 묵상해보면 인류를 포함하여 모든 동식물이 살 수 있는 자연환경을 만들어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정도만이 아닙니다. 모세의 시편 제90편 첫머리에서는 테라포밍을 하기 전에 벌써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명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보존하시는 거처가 되고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모세가 노래하고 있습니다.

3)    사람의 생명을 가장 먼저 창조하시고 그 생명을 애지중지 보전하고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하여 모세가 진솔하게 1.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2.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90:1-2)라고 놀랍게도 단 2구절로 압축하여 여호와의 은혜를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4)    그 점에 대하여 훗날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4.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1:4-5); 바울의 글의 뜻은 우주를 창조하시기 전에 그리고 생물이 살 수 있는 자연환경을 만드시기 전에 벌써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나의 생명을 창조하시고 나를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 돌보며 그 생명을 안전하게 품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5)    그 의미를 재삼 묵상해보면, 생명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들이 훗날 대속자 그리스도를 만나 회개를 하고서 주님과 동행하는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 결과 다시 아버지 하나님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서 그곳에 거처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의 신원을 회복할 수 있게 되는 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복음의 내용입니다. 그와 같은 사상의 원형을 모세의 시편 제90편 제1-2절에서 미리 볼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실로 놀라울 뿐입니다.

(2)  3. 주께서 사람(히브리어 에노쉬אֱ֭נֹושׁ)티끌(히브리어 닥카דַּכָּ֑א)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90:3);

1)    창세기 제3장에서 아담부부가 생명의 주인이신 여호와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고 맙니다. 그 결과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며 종국에는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3:19). 그 점을 모세가 여기서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90:3b)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2)    에덴동산의 동쪽 곧 실락원(失樂園, Lost Paradise)으로 쫓겨난 인간들은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에 불과하며 그 모집단인 티끌로 돌아가는 연약하며 유한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아담의 형상을 물려받은 셋이 깨닫고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그 뜻을 담아 에노스’(mortal body)라고 짓고 있습니다(4:25-26). 그리고 셋은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티끌과 같은 인간을 불쌍하게 여기시고 부디 영생의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 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4:26);

3)    그것은 멸망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이 어째서 영생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지 곧 그들의 여호와신앙의 본질과 목적을 말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모세가 간단하게 3. 주께서 사람(히브리어 에노쉬אֱ֭נֹושׁ)티끌(히브리어 닥카דַּכָּ֑א)로 돌아가게 하시고”(90:3a)라고 노래하면서 그 대목을 거론하기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3)  4.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90:4);

1)    창조주 하나님은 영이십니다(4:24). 물질이 아니시기에 결코 빛의 속도 안에 갇히어 있는 존재가 아니십니다. 한마디로 에노스인 인간과 피조물인 물질이 갇히어 있는 시공간을 초월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영이시며 초월자이신 창조주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인간이 천년의 시간을 산다고 하더라도 그 인생은 오직 지나간 하루의 값어치에 불과할 것입니다. 더구나 어두운 밤과 같은 죄악된 인생을 살아간 자의 인생은 아무리 계산해도 하루가 아니고 그저 한순간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2)    그 점에 대하여 훗날 사도 베드로가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벧후3:8);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셨지만 3일만에 무덤에서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여 40일 후에 승천하시고 천국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것이 베드로가 말하고 있는 영적인 시간의 초월성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3)    그러므로 주님께서 당부하신 지상명령을 수행한 성도들은 역시 부활하여 영생의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28:18-20, 22:28-30). 그와 같은 소망을 가지고 믿음생활을 하고 있는 성도들은 이 세상의 시공간에 갇힌 사고가 아니라 영생의 주님의 눈으로 자신의 인생을 다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사도 베드로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고의 원형이 벌써 모세의 노래 가운데 여기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입니다(90:4).  

둘째로, “5. 주께서 그들을 홍수같이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같으니이다. 6.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7.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8.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9.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90:5-9);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5. 주께서 그들을 홍수같이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같으니이다. 6.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7.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90:5-7);

1)    모세가 자신이 창세기 제6-8장에 기록한 노아 시대의 홍수심판을 염두에 두고서 본문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고 있습니다(90:5a). 그 옛날 노아 시대 여호와의 전면심판에 따라 노아의 가족 8명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이 멸절을 당하고 말았습니다(6:17-18). 그 뿐만이 아닙니다. 방주에 타고 있는 일부 동물을 제외하고 모든 코로 숨을 쉬는 동물들이 함께 죽고 말았습니다(6:19-20, 7:22);

2)    그러므로 여호와의 역사심판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제멋대로 인생을 사는 자의 값어치는 잠깐 자는 것 같으며 풀과 같이 피었다가 별 수 없이 말라져 사라지는 것에 불과합니다(90:5b-6). 여호와의 진노로 멸망의 심판을 받을 뿐만 아니라 살아 생전에도 주님의 역사섭리로 인과응보의 두려움을 맛보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90:7).

(2)  8.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9.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90:8-9); 이 대목에서는 모세가 두가지 심판의 종류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1)    하나는, 하나님의 역사 심판입니다. 그것은 노아 시대의 홍수심판이나 롯의 시대 소돔과 고모라에 행한 불심판과 같은 것입니다. 죄를 범하고 흉포하게 된 세상을 당장에 심판하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 점에 대한 모세의 노래가 제9절의 내용입니다. 세상적인 풍조에 따라 열심히 이기적으로 살았지만 그 결과는 하나님의 분노의 대상이 되어 허무한 인생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9.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90:8-9).

2)    또 하나는, 죽음의 잠을 자고 있는 모든 사람을 부활로 깨워서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세우는 것입니다; “8.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90:8). 그 자리에서 인생 가운데 주님의 뜻을 행한 의로운 자는 영생으로 들어가고 반대로 주님의 뜻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살아간 불의한 자는 영벌로 들어가고 마는 것입니다;

 그 점에 대하여 훗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27.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28. 이를 놀랍게 여지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5:27-29),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그들은 영벌,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25:45-46).

셋째로, “10.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1.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13.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14.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90:10-14); 다음과 같이 3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10.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90:10);

1)    한국사람들은 옛날부터 60세가 되는 환갑을 축하하고 또한 70세가 되는 고희를 중시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옛날에 보통 60세를 살게 되면 주위사람으로부터 축하를 받을 만하고 70세까지 사는 사람이 많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살고 있는 중동의 고대사회에 있어서는 그 수명이 10년 정도 더 긴 모양입니다. 그래서 옛날 한국사람보다 10년을 더하여 보통 70세를 향수하며 강건하면 80세를 누리게 된다고 모세가 노래하고 있습니다(90:10a).

2)    그러나 고대 한국사람처럼 드물게 70세를 살든지 아니면 모세 시대의 중동사람처럼 강건하여 80세를 살든지 간에 별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 이유를 모세가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90:10b)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가 다음과 같습니다; “인생을 오래 살았다고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 인생은 수고슬픔의 연속입니다. 여기서 수고 히브리어로 아말(עָמָ֣ל)인데 그것은 고생 또는 노역’(참조 욥 5:7)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슬픔 히브리어로 아웬(אָ֑וֶן)인데 그것은 근심, 피로, , 범죄, 사기 등으로 인한 인생의 허망함을 말하고 있습니다(참조 수7:2). 모세는 그렇게 고생만 하다가 수고의 참된 열매 곧 영생을 얻지 못하고 만다고 하면 그것이 얼마나 허무한 인생살이인가를 함축적으로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90:10b의역);

(2)  11.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90:11-12);

1)    능력 없는 사람이 화를 내고 진노를 퍼부어보아야 별로 두렵지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직접적으로 손해를 보거나 고통을 당하는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창조주이시며 전능하신 심판주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벌을 내리신다고 하면 그것은 진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10:28).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인간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하고 더구나 영원한 처벌까지 꼼짝 없이 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점을 모세가 여기서 11.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90:11)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모세가 기록하고 있는 신명기 제30장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30:20). 여기서 생명은 영생을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장수는 이 땅에서의 오래 사는 것 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세상과 천국에서의 삶을 모두 망라하고 있는 용어입니다.

3)    그와 같은 맥락에서 창세기 제5장에 기록되어 있는 에녹의 이 땅에서의 365년의 인생과 그 다음 휴거하여 천국에서 누리고 있는 영생을 함께 계산할 수가 있습니다. 당시 의인의 족보를 보면 보통 900세 정도를 살고 있는 긴 수명의 시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는 진정한 의인 에녹은 짧게 365년만을 이 세상에서 살고 그 다음에 미련없이 휴거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영적인 의미가 있는 인생의 계산방법을 자신의 인생살이 가운데 배우고 깨달았으면 참으로 좋겠다고 모세가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90:12).

(3)  13.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14.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90:13-14);

1)    천국에서의 영생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마냥 이 세상에서의 삶에 만족하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참으로 불쌍한 존재입니다. 모세는 이제 이 땅에서 여호와의 종으로서의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고 120세를 향년으로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34:7).

2)    그렇지만 인생 가운데 영생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고 있는 동족들을 보니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13.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들을 불쌍히 여기소서”(90:13). 그들을 여호와의 종으로 삼아 주시고 그 인생들을 불쌍하게 여기시며 부디 그들의 인생을 영생의 길로 인도하여 달라고 하는 모세의 간구인 것입니다.

3)     인생 가운데 주님과 동행하며 안식의 복을 누리고 있는 성도는 하루 일과를 끝내면서 주님께 치유하심과 회복의 역사를 간구하며 모든 것을 맡겨 드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다음날 아침에 주님께서 창조하시는 새로운 역사를 기쁨으로 만날 수가 있습니다(2:2-3). 그와 같은 기쁨과 즐거움이 있어야 남은 인생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끝까지 살아갈 수 있습니다. 모세의 노래 제14절에는 벌써 그러한 의미가 풍성하게 담기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넷째로, “15.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 16. 주께서 행하신 일을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그들의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17.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90:15-17); 본문에서 모세는 의미상 세가지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첫째가 고난입니다. 둘째가 영광입니다. 셋째가 은총입니다. 그 점을 중심으로 풀이를 해봅니다;

(1)  이 세상에서 주님의 종으로 의롭게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고난의 연속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마음은 원이지만 육체의 약함과 악함 때문에 넘어지고 쓰러지며 하나님의 진노로 고통을 당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그와 같은 고통고난의 세월을 보시고 이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풀어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15).

(2)  잘못을 바로잡아 주시고 다시 주님의 종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리하면 주님의 종으로 반듯하게 살아간 그 인생이 주님의 은혜로 천국에서 영생의 기쁨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 점을 고난 다음에 얻게 되는 주의 영광이라고 모세가 표현하고 있습니다(90:16, 8:17-18).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달라고 한 모세의 노래 그대로 훗날 그리스도가 그들의 땅에 오시고 또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고난 가운데 살아간 여호와의 종들이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90:16, 22:28-30);

(3)  성도들이 내세에 받게 되는 천국에서의 영광을 미리 이 세상에서 맛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모세는 훗날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로 그리고 여호와의 종으로 살아가게 되면 그 은총을 누릴 수가 있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17). 그것은 모세 당시에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훗날에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보혜사 성령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삶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4)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공생애와 대속의 십자가의 삶을 본받아 살아가게 되면 그 복음적인 인생이 얼마나 복이 되며 천국에서 놀라운 상급을 받을 수 있는지 모릅니다. 그 점을 은유적으로 모세가 벌써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17.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90:17).

결론적으로, 모세오경의 저자인 모세가 향년을 앞두고 그의 동족들에게 자신의 영적인 깨달음을 이제 하나의 오도송(悟道頌, 궁극의 도를 깨달은 자의 노래)으로 불러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시편 제90편에 내용이라고 하겠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한평생을 되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허망하고 고난의 연속인 삶 가운데 부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베풀어 주시고 영생의 소망을 이루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모세의 간구의 노래 가운데에는 벌써 구세주 그리스도의 오심을 고대하고 있는 소망이 엿보이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사실에 비추어 모세의 시편 제90편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결론적으로 한번 요약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창세기의 내용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그것이 제1절에 담기어 있는 거처’(마온 מָעֹ֣ון)라는 용어입니다. 그것은 부부의 동거 또는 하나님과의 동행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생명이 살 수 있도록 이 세상의 거처를 만드신 분이시지만 그 이전에 벌써 나의 정체성이며 본체가 되고 있는 생명을 잉태하시고 만들어서 그 품에 보전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출애굽기의 내용은 제11절에서 압축적으로 기술이 되고 있습니다; “11.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애굽의 황제인 바로가 여호와 하나님의 요구를 완강하게 거절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로와 그의 신민(臣民, 신하와 백성)인 애굽인에게 혹독한 하나님의 처벌이 창조주의 능력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출애굽의 해방을 받아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자손들 역시 여호와의 구원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패역을 일삼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세는 이제 레위기와 민수기의 내용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레위기의 내용은 속죄의 제사와 제사장의 죄사함의 간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본문 제13절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13.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리고 민수기의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패역함으로 말미암아 짧은 광야생활이 유배생활 40년의 처벌로 바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마지막 해에는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여호와의 명령으로 요단강 동편의 아모리 2왕국의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것을 모세는 본문 제15절에서 절절하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15.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

넷째로, 신명기는 아모리 족속의 2왕국을 광야생활 마지막 해에 차지한 모세가 이 땅에서의 보상에 만족하고 있는 동족들에게 부디 더 나은 영생의 상급을 소망하라고 가르쳐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의 성취와 자랑이 허망할 뿐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 내용이 본문 제3-4절과 제12절에 가득합니다; “3. 주께서 사람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4.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다섯째로, 신명기의 마지막인 제34장에서 모세는 옛날 모압 땅에 있는 느보산에 올라가서 서편지역에 펼쳐져 있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멀리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자신이 동족을 이끌고 이 땅에서의 목적지로 함께 들어가지 못하여 못내 서운했지만 마지막 눈을 감는 그 순간에 위대한 깨달음을 얻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지상천국이 아니라 천상천국으로 들어가서 창조주 하나님의 품에서 영생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비추어보면, 먼 훗날 이 세상에 대속자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그때 자신의 영혼은 영생의 부활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영적인 깨달음이 본문 제16-17절에 기록됨으로써 모세의 마지막 노래가 끝이 나고 있습니다; “16. 주께서 행하신 일을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그들의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17.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90:16-17).

끝으로, 아무쪼록 그와 같은 깊은 의미를 재삼 생각하시면서 모세의 마지막 깨달음의 노래를 자주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제자에게 맡겨진 주님의 지상명령에 더욱 충성하셔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생의 부활이라는 견고한 상급을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90:16-17, 28:18-20, 22:28-30).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