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2년 손진길 목사 설교문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에서 양식을 사오는 모습에서 드러나고 있는 믿음생활의 비결(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3. 8. 11:00

제목;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에서 양식을 사오는 모습에서 드러나고 있는 믿음생활의 비결”(42:1-4)

설교일; 주후 2022313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38일 화요일 작성)

 

모세가 기록하고 있는 창세기가 영광스럽게도 오늘날 성도들이 읽고 있는 성경의 제일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창세기가 창조주 여호와의 천지창조 이야기 뿐만 아니라 성도들에게 한평생 어떠한 믿음생활을 영위하여야 영생의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 그 비결을 이야기체로 쉽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창세기의 이야기를 성도들은 자주 묵상하면서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과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에 비추어 그 깊은 의미를 재삼 깨닫고 복음적인 측면에서 그것을 실천하는 믿음생활을 영위하여야 합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오늘은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에서 양식을 사오는 모습에서 드러나고 있는 믿음생활의 비결을 창세기 제42장 첫머리에서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제부터 한 구절 씩 말씀풀이를 하면서 묵상의 결과 얻은 교훈을 다음과 같이 함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1. 그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아들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바라보고만 있느냐?”(42:1);

(1)  여기서 그때에’(42:1a)는 애굽제국과 그 주변국가에 7년 연속 풍년이 끝나고 드디어 2년간 계속하여 흉년이 들고 있는 그 시기를 말하고 있습니다(41:53-57). 처음으로 흉년이 들게 되면 지난 해까지 풍년이 계속되었기에 먹고 남은 곡식이 창고에 저장되어 있으므로 그것으로 한해를 버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2년간 연속 흉년이 들게 되면 그때는 사정이 달라집니다. 그 점에 대하여 실감나게 모세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56. 온 지면에 기근이 있으매 요셉이 모든 창고를 열고 애굽 백성에게 팔 새 애굽 땅에 기근이 심하며, 57. 각국 백성도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들어와 요셉에게 이르렀으니, 기근이 온 세상에 심함이었더라”. 연거푸 흉작이면 먹을 것이 부족합니다. 첫해 흉년에 벌써 그 전에 저축해둔 곡식을 모조리 먹어 치워버렸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곡식을 저장해둔 곳을 찾아가서 무조건 양식을 사와야 합니다. 그러하지 못하면 기근이 심하여 아사자(餓死者, 굶어서 죽는 자)가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2)   당시 애굽제국과 그 주변국에 똑같이 7년 연속 풍년이 있었고 이제는 2년 연속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애굽제국의 경우와 주변국의 사정이 전혀 다릅니다. 애굽제국에는 지난 7년 풍년시절에 애굽총리인 요셉이 철저하게 양곡을 관리하여 잉여생산분을 전부 창고에 저장하여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타 주변국은 그 반대입니다. 그 좋은 7년 풍년시절에 제 마음대로 흥청망청 잘 먹고 잘 살았기에 겨우 한해 흉년을 대비하여 저장해둔 곡식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2년 연속 흉년이 들자 그만 기아에 허덕이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러한 차이가 발생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한가지 뿐입니다; “애굽제국에는 하나님께서 예비한 지혜자 요셉이 총리가 되어 있어 잉여양곡을 저장하는 일을 국책사업으로 추진하고 있고 기타 주변국에는 그러한 하나님의 지혜자가 없어 흉년을 전혀 대비하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41:41-49);

 그 한가지의 차이가 흉년 가운데 백성의 생명을 살리기도 하고 아니면 굶어서 죽게 만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3)  양식이 없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게 되어 있는 지경에서 어떻게 하면 양식을 얻어서 연명을 할 수가 있을까요? 그 비결을 깊이 묵상하게 되면 하늘에서 생명의 양식을 얻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되는 유익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입장에서 모세가 기록하고 있는 말씀 곧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아들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바라보고만 있느냐?”(42:1b&c)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풀이를 해보고자 합니다;

1)    첫째, 야곱은 멀리 가나안 땅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애굽에 곡식이 있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 있을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이웃사람이 애굽에 가서 양식을 사오는 것을 자신의 눈으로 보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살리는 첫걸음은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으로 죽어가는 생명이 살아나는 것을 직접 보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영적인 체험이 지성에서 영성으로 넘어가는 믿음생활의 시발점이 되고 있습니다.

2)    둘째, 영적인 체험을 생생하게 하고서 믿음생활을 시작하게 되면 반드시 그 다음에는 자신의 가족과 주변사람들을 살리기 위하여 생명 살리는 행동에 나서야 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보고서 깨닫고 있는 그 하늘양식을 얻는 방법을 가족과 이웃에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 점을 본문에서는 아들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바라보고만 있느냐?”(42:1c)라고 모세가 알기 쉽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2. 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 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러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하매”(42:2);

(1)  1절에서 모세는 야곱이 이웃사람들이 애굽에 가서 양식을 사오는 것을 보았다는 의미에서 보고라는 용어를 이미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제2절에서는 새삼스럽게 들은 즉이라는 다른 용어를 구태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말의 뜻이 과연 무엇일까요? 그와 같이 이성적으로 판단할 때에 앞뒤가 서로 맞지가 아니하며 상식에 비추어 볼 때 일종의 모순처럼 보이고 있는 그러한 대목이 사실은 인간의 합리적인 사고를 뛰어넘어 하나님께서 전해주고자 하시는 영적인 말씀의 뜻이 숨어있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한번 해석을 해보고자 합니다.

(2)  여기서 들은 즉이라고 하는 말은 야곱이 자신의 육체적인 눈으로 이웃이 양식을 애굽에서 사오는 것을 보았다는 차원을 뛰어넘고 있는 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적인 안목으로 무엇을 깨닫고 있다는 의미를 벌써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여기서 당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애굽에 저장되어 있는 양식을 사와서 식구의 목숨을 살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 속에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기록을 통하여 사람들이 육신적인 목숨 연명의 차원을 넘어서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방법 곧 하늘의 양식을 얻을 수 있는 비결을 그 속에 벌써 숨겨두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3)  그 점에 착안하여 본문을 해석해보면 그 깊은 의미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야곱이 이 땅에서 유한한 삶을 살고 있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영적인 양식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그것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 영생의 양식을 사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야곱만이 깨닫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선지자 곧 하나님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선포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야곱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하다고 자신이 믿음의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들어서 잘 알고 있다고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창세기 제5장에 수록되어 있는 많은 의인들 곧 믿음의 선진들이 900년 전후의 긴 수명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와 같은 영생의 양식을 얻는 방법을 후손들에게 전승한 것으로 보입니다. 나중에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살아남아서 그 내용을 후손들에게 전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이 이름하여 창조주 여호와께로 돌아가서 영생을 얻는 믿음 생활입니다.

(4)  그와 같은 의미에서 창세기 제4장 말미에서는 아담의 형상을 물려받은 셋이 아들 에노스와 함께 영생하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있으며 제21장에서는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서 영생하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21:33);

 그렇다면 오늘날의 성도들은 어찌하면 될까요? 그 방법은 예수님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성경을 열심히 읽고 그 뜻 가운데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발견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이라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대속의 십자가를 지셨다고 하면 그 제자인 우리 성도들도 자신의 세상적인 이익을 내려놓고 널리 복음을 전하여 많은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작은 십자가를 지는 헌신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5)  그것이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영적인 양식을 사오는 방법입니다. 또한 돈을 주고 사오라는 것입니다. 그저 공짜로 얻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표현을 빌린다면 천국은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 큰 밭을 사는 것입니다(13:44). 그 가운데 어느 한 구석에 영생의 보화가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수고와 희생이 있을 때에 천국의 보화인 영생의 말씀을 사서 많은 생명을 살릴 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셋째로, “3. 요셉의 형 10사람이 애굽에서 곡식을 사려고 내려갔으나, 4. 야곱이 요셉의 아우 베냐민은 그의 형들과 함께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생각에 재난이 그에게 미칠까 두려워함이었더라”(42:3-4);

(1)  야곱은 22첩을 거느리고 자녀를 생산한 사람입니다. 1아내인 레아가 아들 6명과 딸 디나를 낳았다고 모세가 창세기 제29장과 제30장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제30장을 보면 첩 빌하와 실바가 또한 야곱에게 각각  2명의 아들을 낳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2아내 라헬이 11번째 아들인 요셉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제35장으로 가게 되면 라헬이 12번째 막내아들 베냐민을 생산하고서 객사하고 있습니다. 그 무덤이 베들레헴 근교에 세워지고 있는 것입니다(35:19-20).

(2)  그 가운데 야곱이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하고 있는 인물이 애처 라헬과 그녀의 소생인 두 아들 요셉과 베냐민입니다(37:3, 42:4). 그런데 요셉은 17세였을 때에 부친의 심부름으로 세겜까지 먼 길을 떠났다가 그만 짐승에게 찢겨 죽은 것으로 치부가 되고 있습니다(37:31-35, 42:36). 본문에서는 22년이 지나 연거푸 가나안 땅에 흉년이 찾아오자 야곱이 아들 10명을 애굽에 보내어 양식을 사오게 조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25세가 되어 있는 막내아들 베냐민을 결코 그 먼 길에 함께 보내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집을 떠났다가 그 옛날 요셉처럼 죽임을 당하게 되면 아니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야곱이 애지중지하고 있는 아들이 막내인 소자 베냐민입니다.

(3)  본문에서 모세가 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뜻이 그 정도에 불과할까요? 그것이 아닙니다. 복음적인 맥락에서 그것은 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점을 슬쩍 보여주고 있는 창세기 제43장의 한 대목이 다음과 같습니다; “29. 요셉이 눈을 들어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기 동생 베냐민을 보고 이르되, 너희가 내게 말하던 너희 작은 동생이 아니냐? 그가 또 이르되,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43:29);

 25세의 청년이며 벌써 결혼하여 10명의 아들의 아버지가 되고 있는 베냐민입니다(46:21). 그런데 구태여 베냐민을 소자여라고 요셉이 부르고 있습니다.

(4)  그 의미는 마태복음 제25장에서 영생과 영벌의 심판기준으로서 제시가 되고 있는 바 지극히 작은 자 소자와 같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비천하게 된 자를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보살피고 계십니다. 창조주께서는 공의의 정신에 따라 모든 생명을 돌보고 살리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3:4, 5:43-48). 그와 같은 의미에서 이 세상에서 지극히 작은 자를 내 형제라고 부르고 계십니다(25:40);

 나아가서 소자의 생명을 살리고 돌본 성도에게 가장 큰 상급을 주십니다. 그것이 천국에서의 영생인 것입니다(25:40-46).

결론적으로, 본문에서 얻은 영적인 교훈들을 다시 한번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생명을 살리는 첫걸음은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으로 죽어가는 생명이 살아나는 것을 직접 보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영적인 체험이 지성에서 영성으로 넘어가는 믿음생활의 시발점이 되고 있습니다.

둘째, 영적인 체험을 생생하게 하였다면 이제는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온전한 믿음생활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자신의 가족과 주변사람들을 살리기 위하여 생명 살리는 복음의 선포는 물론 하나님의 공의의 실천에 나서야 합니다.

셋째, 우리 성도들은 자신의 이익을 내려놓고 온세상에 복음을 전하여 많은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작은 십자가를 지는 헌신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영적인 양식을 사오는 방법입니다.

넷째, 창조주께서는 공의의 정신에 따라 모든 생명을 돌보고 살리기를 원하십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이 세상에서 지극히 작은 자를 내 형제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끝으로, 아무쪼록 그와 같은 의미에서 만민의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세상에 전하며 죽어가는 생명을 끝까지 돌보고 살리시는 귀한 성도님들의 생애가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