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2년 손진길 목사 설교문

유다와 모세와 바울의 소원과 바램은 역사 가운데 어떻게 성취가 되고 있는가(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2. 22. 12:18

제목; “유다와 모세와 바울의 소원과 바램은 역사 가운데 어떻게 성취가 되고 있는가?”(43:8-9, 32:30-35, 9:1-3)(참고구절; 3:16, 14:1-3, 16-20, 7:25-28, 2:1-4)

설교일; 주후 2022227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222일 화요일 작성)

 

인생을 살다가 보면 절박한 기도를 하게 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그 이유도 가지가지입니다. 가장 비근한 예를 들어본다면, 자신이 병이 들었거나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지가 병이 들었을 때에 주님의 이름으로 창조주 하나님에게 부르짖게 됩니다. 부디 잘못을 용서하시고 죄인을 구원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의미 있는 인생을 다시 한번 살게 해달라는 간절한 기도가 그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엄청난 빚을 지게 되었을 때에는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는 도저히 갚을 방법이 없으므로 부디 하나님 아버지께서 살길을 마련해달라고 하는 절박한 기도가 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도탄에 빠져 있는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그 앞길을 부디 형통의 길로 인도해달라고 하는 간절한 기도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말씀 가운데 살펴보고자 하는 간절한 기도는 그 정도의 간구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가족은 물론 부모형제와 그 자손까지 모두 구원하여 달라고 하는 절박한 호소가 창조주 하나님을 향하여 긴급하게 올라가고 있는 경우입니다. 더구나 기도자는 자신의 영원한 생명의 소멸까지 무기로 사용하여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대표적인 경우를 오늘은 창세기제43장에 기록이 되고 있는 유다의 경우, 출애굽기 제32장에 기록이 되어 있는 모세의 경우, 그리고 로마서 제9장에 기록되어 있는 사도 바울의 경우에서 살펴보고 그 기도의 의미를 한번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그런데 위의 세가지 사례에 있어서 공통적으로 깊은 성찰을 필요로 하는 질문들이 있습니다. 그 질문과 더불어 그에 대한 성경적인 답변의 방향을 먼저 다음과 같이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로, 인간은 스스로 창조주가 아니고 한갓 피조물에 불과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가 없으며 더구나 자신의 영원한 생명의 소멸을 걸고서 창조주 하나님께 무엇을 요구할 권리조차 없는 하찮은 존재입니다.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의 투정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점을 잘 알고 있다고 여겨지는 여호와신앙인 유다, 모세, 사도 바울 등이 어째서 그러한 말도 되지 아니하는 소리를 하면서 부모형제와 가족들의 구원을 절박하게 호소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만큼 절실한 마음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서 가족과 친지 나아가서 동족을 구원하고 싶다는 자신의 소원을 말하면서 스스로 하나님의 중보기도자들이 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둘째로,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주인의 입장에서 그들 종의 절박한 기도에 대하여 어떠한 반응을 보이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들의 이름을 정말 영생구원의 생명책에서 지워버리고 그 대신에 그들의 소원대로 가족과 부모형제 그리고 그 자손들을 대신 구원하여 주는 결정을 내리고 계시는 것일까요?

성경말씀을 살펴보면 그것이 아닙니다. 유다와 모세 그리고 사도 바울이 모두 진실한 여호와신앙인으로서 당연히 영생의 구원을 얻은 자들로 기록이 되거나 또는 말씀의 의미상 그렇게 간주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49:8-10, 34:10, 17:1-3, 3:7-14, 고전15:8-11).

셋째로, 하찮은 인간인 자신의 영생을 걸고서 절실하게 구하고 있는 그러한 기도에 대하여 창조주 하나님께서 귀를 기울이고 계신다고 한다면 장차 어떠한 방법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시는 것일까요?

그에 대한 대답은 요한복음 제3장에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입니다; “그와 같은 중보기도자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지만 그들의 능력 없음을 불쌍하게 여기시고 그들을 대신하여 그 구원의 소원을 이루어 줄 수 있는 능력자 곧 하나님의 독생자를 이 세상에 구원주로 그리고 영원한 대속자로 보내어 주시는 것입니다”(3:13-18);

넷째로, 자신의 가족과 부모형제 그리고 그들의 자손들 나아가서 동족을 멸망의 심판에서 구원하여 달라는 그 기도가 대속자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성취가 되어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때부터 진실한 중보기도자들은 어떠한 인생을 살아가야만 하는 것일까요?

여전히 이기적인 가족사랑 또는 집단 이기적인 동족사랑의 소원만을 간구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원하시는 창조주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자신을 대속의 제물로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답게 살아가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 대답은 전자가 아니고 후자입니다(5:43-48). 그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자가 바로 사도 바울이라고 하겠습니다(9:15-22).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도와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지상명령을 자신의 인생에 정확하게 적용하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28:18-20, 16:24, 15:17-19);

 

그와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 씩 다음과 같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묵상한 결과 얻은 교훈들을 아울러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로, “8. 유다가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베냐민)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아이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9.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43:8-9); 다음과 같이 나누어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1)  8. 유다가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베냐민)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아이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43:8);

1)    야곱의 4번째 아들인 유다가 부친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유다의 아버지 이름을 야곱이라고 기록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이라고 적고 있습니다(43:8a). 그 이유는 부자지간 이전에 대 족장인 이스라엘에게 아들 유다가 드리고 있는 청원이라는 의미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2)    유다가 청원하고 있는 내용에 담기어 있는 뜻이 다음 세가지입니다(43:8b); 첫째, 막내 이복동생인 베냐민을 데리고 빨리 애굽에 갈 수 있도록 허락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둘째, 베냐민을 데리고 오면 애굽의 양식을 살 수 있도록 하겠다는 애굽 총리 사브낫바네아의 언질이 이미 있었기에(42:20, 33-34) 유다는 그 요구를 만족시키고 양식을 사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빨리 그렇게 조치하지 아니하면 온식구가 거듭된 흉년으로 말미암아 기아에 시달려 죽을 것이기에 유다는 그 생명을 꼭 살리고 싶다는 것입니다.

(2)  9.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43:9);

1)    그러나 아버지 야곱 곧 대 족장 이스라엘은 거절할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야곱이 지극히 사랑하던 아내 라헬이 남기고 간 아들 요셉과 베냐민을 엄청 편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벌써 22년 전에 세겜으로 심부름을 갔다가 짐승의 밥이 되고 말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야곱은 이제 베냐민을 자신의 품에서 결코 떠나 보내고 싶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장남 르우벤이 진작에 두 아들을 담보로 맡기면서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에 가서 양식을 사오겠다고 말했지만 야곱은 그 제안을 일축한 적이 있습니다(42:37-38).

2)    그렇지만 양식이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어 더 이상 머뭇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따라서 유다가 적극 나서고 있습니다. 형인 르우벤과 달리 유다는 자신이 스스로 담보가 되겠다고 말합니다(43:9a). 따라서 만약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에 가서 그를 다시 데리고 오지 못할 경우에는 자신은 아버지 앞에 영원한 죄인으로 살게 될 것이라고 약속합니다(43:9b). 그 말의 뜻은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아들의 신분을 박탈하고 죄인으로 취급하여 평생 종으로 부리거나 아니면 즉시 처벌하셔도 좋다는 것입니다.

3)    또 하나는, 자신이 가족은 물론 부모 형제와 그 식솔을 전부 살릴 수만 있다면 자신은 영원히 죄인이 되어 그 영혼이 소멸을 당하더라도 기꺼이 그 손해를 감수하겠다는 결단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대 족장 이스라엘이나 그 아들인 유다 자신에게는 그 영혼을 영원히 소멸하는 권리와 능력이 없습니다. 피조물인 사람에게 주어져 있는 권리와 능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만이 보유하고 계시는 권한이므로 그것을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함부로 거론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불경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 속에 내포되어 있는 뜻과 결단만은 분명합니다; “나 자신을 영원히 희생하더라도 굶어서 죽어가고 있는 식솔들을 전부 살리고 싶다는 것입니다”;

4)    그와 같은 유다의 결심과 고백을 창조주 하나님께서 어여삐 여기고 계십니다. 따라서 훗날의 역사 가운데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이 세상에 성육신하게 하여 만유를 구원하기 위한 대속의 십자가를 지게 하십니다. 유다의 자기희생의 기도가 아버지 하나님께 상달되어 마침내 영원한 대속자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구원주로 오시게 되는 것입니다(3:16). 요컨대, 그와 같은 복음적인 인과관계를 진작에 시사하고 있는 귀한 창세기의 기록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30.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를 위하여 속죄가 될까 하노라 하고, 31.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32.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3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내가 내 책에서 그를 지워 버리리라. 34.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 35. 여호와께서 백성을 치시니, 이는 그들이 아론이 만든 바 그 송아지를 만들었음이더라”(32:30-35); 다음과 같이 나누어서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30.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를 위하여 속죄가 될까 하노라 하고, 31.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32:30-31);

1)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사정하여 부디 시내산 정상에 홀로 올라가서 그곳에 강림하여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 뵙고 그 입의 말씀을 배워 하산하여 산기슭에서 기다리고 있는 자신들에게 알려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렇게 부탁하는 이유는 피조물인 자신들이 귀로 듣기에 시내산 정상에 임재하여 백성들에게 선포하시는 창조주의 말씀이 너무나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여호와의 가르침을 받고자 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경우에는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위험이 다분합니다. 그와 같은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대표자인 모세의 등을 떠다민 것입니다(20:18-21, 5:25-27).

2)    어쩔 수 없이 홀로 산 정상에 올라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배우고 있는 모세입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오래 걸리고 있습니다. 한달이 지나도 모세의 하산이 없습니다. 그곳에서 잘못하여 죽임을 당했는 것만 같습니다. 최고지도자 모세가 없으면 어떻게 광야에서 살아남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수가 있을까요? 애굽제국에서 태어나 오래 함족의 제사방법을 많이 보고 자란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신들의 재물을 모아 가장 큰 신을 하나 만들고 있습니다. 그것이 송아지를 나무로 조각하여 그 겉에 금박을 입힌 것입니다(32:1-3).

3)    그렇게 정성을 다하여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그것을 아론이 출애굽의 신 여호와라고 백성들에게 소개합니다(32:4). 그리고 금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명백하게 십계명의 규정을 정면으로 위반한 행위입니다(20:1-7);

 

 따라서 시내산 정상에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행위를 내려다보시고 불과 같이 진노하십니다. 죄를 범한 이스라엘 자손들을 모조리 죽이고 오로지 모세의 자손만으로 새로운 선민을 만들겠다고 말씀하십니다(32:10).

4)    그 진노를 막아 선 자가 모세입니다(32:11-14). 그는 우선 하산하여 금송아지를 분쇄한후 그 가루를 백성들이 먹고서 회개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32:20). 그리고 주동자들을 처벌하기 위하여 레위인들의 칼을 빌려서 3천명 가량을 살해하고 맙니다(32:28). 그 이튿날 모세는 동족들을 살리기 위하여 시내산 정상에 다시 올라갑니다(32:30). 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께 간절하게 중보의 기도를 한번 더 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32:31).

(2)  32.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3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내가 내 책에서 그를 지워 버리리라”(32:32-33);

1)    간절하게 모세가 백성들의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지만 확답이 없습니다. 따라서 마지막 수단으로 자신의 이름을 하나님의 영생의 책에서 지워버리더라도 동족들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부디 목숨만은 구원하여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32:32);

 

 모세의 그 마지막 호소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비로소 대답하십니다; “모세를 포함하여 누구라도 이제부터 내게 범죄하면 생명책에서 이름을 지워버릴 것이다. 그 점을 백성들에게 분명하게 전달하도록 하라”(32:32의역).  

2)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의 위와 같은 말씀을 하산하여 동족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달하였지만 그후 그들은 다시 여호와 앞에 패역한 일을 반복적으로 행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모두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지워지고 만 것일까요? 그것이 아닙니다. 단 한번의 용서의 기회가 역사 가운데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로 찾아오고 있습니다. 그것이 소위 대속의 구세주 그리스도의 오심인데 그 내용이 모세의 글에 은유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32:34).

(3)  34.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 35. 여호와께서 백성을 치시니, 이는 그들이 아론이 만든 바 그 송아지를 만들었음이더라”(32:34-35);

1)    본문말씀을 피상적으로 이해하게 되면 모세의 중보기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자손들이 금송아지를 만든 잘못을 완전히 용서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사자인 천사를 보내어 앞서 가면서 약속의 땅 가나안을 얻을 수 있도록 이스라엘 자손들을 도와줄 것이기 때문입니다(32:34a&b).

2)    그렇지만 그 다음에 기록이 되고 있는 말씀,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32:34c)에 비추어 보면 그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잘못을 일일이 기억하여 두었다가 보응할 날이 임하면 그때 한꺼번에 확실하게 보응하겠다는 뜻을 분명하게 밝히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3)    그 의미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간이 지은 모든 죄를 한꺼번에 처리하는 보응의 시간이 예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시간이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가 이 세상에 구세주 그리스도 와서 대속의 십자가에 자신을 영원한 희생제물로 드리는 그 시간입니다;

 

 그 의미를 알고서 자신의 오랜 죄악을 회개하는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은혜가 창조주의 배려로 임하게 됩니다.

4)    그것은 마치 모세가 놋뱀을 만들고 그것을 쳐다보는 죄 범한 동족들이 나음을 얻게 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21:8-9). 그 점을 훗날 대속자로 오신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3-15).

5)    따라서 모세가 자신의 영생을 걸고서 간구하고 있는 그 중보의 기도로 말미암아 동족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의 죄사함을 얻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 점을 훗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서 이 땅에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 자신 외에는 구원자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3:13-15). 사도 베드로의 증언도 역시 그러합니다(4:10-12). 그러한 맥락에서 시내광야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우상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긴 죄가 다시 한번 본문에 기록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32:35).

셋째로, “1-2.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9:1-3);

(1)  사도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선택이 된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9:15-16, 1:1-7). 그런데 이방인 선교사로 열심히 사역을 하면서 바울은 여전히 한가지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소원이 바로 유대인인 자신의 골육을 구원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기회가 주어지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고통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2)  따라서 사도 바울의 놀라운 중보기도의 내용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9:3). 하나님의 종이요 그리스도의 이방인 사도로 평생 충성하였지마는 지금이라도 자신의 골육과 동족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과 영생이 모두 필요하다고 한다면 그것을 바쳐서라도 그들을 모두 구원하고 싶다는 솔직한 바울의 고백입니다;

 

(3)  그와 같은 소원을 사도 바울이 로마서 제9장에서 기록하고 있는데 그의 간절한 기도가 주님의 은혜로 응답이 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방인 사도인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자꾸만 동역자 가운데 일가친척이 포함되고 있기 때문입니다(16:7, 11). 그와 같은 뜻하지 아니한 열매를 주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바울이 자신의 사명인 이방인선교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였더니 그 마음의 소원을 아시고 주님께서 일종의 보상을 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 점을 자랑스럽게 사도 바울이 로마서 말미인 제16장에서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위대한 중보 기도자이며 여호와신앙인으로 칭송을 받고 있는 유다, 모세, 사도 바울조차 자신의 영생을 걸어 놓고 가족과 친지 나아가서 동족의 죄사함과 구원을 위하여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도는 두가지 측면에서 문제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는,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가 아니기에 자신의 영생의 문제를 결정할 수 있는 능력과 권리가 없는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영생을 걸고서 가족과 동족을 구원하여 달라는 호소를 하고 있으니 그것은 언어도단이며 일종의 원인 무효의 기도라고 하겠습니다.

또 하나는,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에서 벗어나고 있는 간구입니다. 왜냐하면, 이기적인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가족과 친지 나아가서 집단 이기적인 마음에서 동족들의 구원만을 위하여 부르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에 따라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와 삶의 방법을 가르쳐주고자 하십니다. 그것이 쉽게 말하자면 사도 바울이 애용하고 있는 구절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그 의미가 두가지로 파악이 되고 있습니다;

 

첫째, 유다와 모세 그리고 사도 바울은 스스로 자신의 영생을 걸고서 다른 사람의 죄를 속죄하며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죽음의 희생을 당하실 때에 비로소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자들이 누구나 멸망의 심판에서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독생자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십니다. 그것이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위한 복음의 선포이며 실천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이제 그리스도의 제자 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 방법이 더 이상 이기적이고도 집단 이기적인 부르짖음에 머물지 아니하고 원수진 자와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복음을 실천하면서 땅끝까지 달려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의 제자 답게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을 돕기 위하여 보혜사 성령님께서 그 심령속에 내주하여 함께 역사하고 계십니다(14:16-20).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복음생활을 하고 있는 성도들은 진리의 성령님 안에서충만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방인선교를 위하여 헌신할 때에 나의 골육과 동족들의 구원도 주님의 은혜로 크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점을 생각하면서 아무쪼록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성령님 안에서 참된 중보자의 삶을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