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2년 손진길 목사 설교문

영생의 하나님, 부활의 주님을 다시 바라보자(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2. 8. 04:20

제목; “영생의 하나님, 부활의 주님을 다시 바라보자”(3:10-16, 참고구절; 9:1-19, 고전15:7-11, 19-26, 19:23-27, 32:31-34, 25:1-13, 110:1-7, 13:11-16, 11:23-27, 4:23-24, 20:29, 24:44-49)

설교일; 주후 2022213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28일 화요일 작성)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주님의 교회가 성립되고 기독교가 왕성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가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대속의 십자가를 지고 만민구원을 위하여 속죄양으로 죽었으며 그 공로로 창조주 하나님에 의하여 3일만에 무덤에서 부활하고 40일 후에 승천하여 천국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그 사실을 굳게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남은 인생을 그리스도의 교훈과 생애를 하나님의 복음으로 온세상에 전파하고 주님의 제자 답게 끝까지 살아가게 되면 자신도 예수님처럼 부활하여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다는 부활신앙이 성도들에게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와 해외에 존재하고 있는 한국인교회가 위기에 처해있으며 성도들의 신앙이 크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신앙의 근본을 잊어버리고 회의적인 믿음으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감히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음 두가지 질문을 하고 그 대답을 들어보면 금방 현실이 그렇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진실로 믿고 계십니까? 혹시 그것은 지어낸 이야기이거나 일종의 신화가 아닐까요?...”;

둘째,초대교회의 사도와 성도들이 허황한 교리를 만들어 온 세상에 전파하다가 불쌍하게 죽어간 것이 아닐까요? 그것보다는 이왕에 존재하는 성도들의 교회와 교회의 권력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이 더 나은 것이 아닐까요?... ”.

그런데 기독교의 진리는 오늘날 세상적으로 현명하고 똑똑하게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성도들의 눈으로 보자면 참으로 어리석고 우직한 것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바보와 같은 믿음 생활입니다.

왜냐하면, 유대교지도자들에게 붙잡혀서 억울하게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을 여전히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성도들이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살아가게 되면 부활하고 영생할 수 있다고 하는 소망을 붙잡고 살아가다가 결국에는 하나같이 허무하게 죽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바보의 선택으로 보이는 그것이 사실은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의 복음의 진수입니다. 더구나 교회에서 여전히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생애이며 그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보혜사 성령님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증거하고 있는 진짜 내용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저는 오늘 영생의 하나님과 부활의 주님을 다시 바라보자는 제목을 가지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을 다시 많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효과적으로 말씀을 드리기 위하여 사도 바울의 신앙의 진수를 알 수 있는 빌립보서 제3장 제10-16절 말씀을 성경본문으로 선택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본문말씀을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신 구약 성경말씀에서 그와 관련이 깊이 되어 있는 말씀을 발췌하여 다음과 같이 먼저 말씀을 드려 두고자 합니다;  

첫째로, 히브리경전에 밝았던 랍비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이상한 영적인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태양보다 더 밝은 빛에 사로잡혀서 육신의 눈이 멀어진 채 영적인 눈을 떠서 하나님의 형상을 바라보고 있는데 돌연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고 나타난 예수라는 것입니다(9:3-7);

오직 산술적으로 하나뿐인 여호와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고 살아가고 있는 유대교인에게 있어서는 말도 되지 아니하는 영적인 체험입니다. 따라서 랍비 사울이 고민합니다.

랍비 사울은 다메섹에 살고 있는 선지자 아나니아를 만나서 그 영적인 체험의 의미를 듣고 갑자기 소경이 된 눈이 고침을 받게 되자 크게 감격하여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다메섹에서 간증합니다(9:8-25). 그렇지만 자신의 외침이 유대인의 핍박을 받게 되자 그의 고민은 깊어집니다(9:26-30). 

어떻게 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와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확실하게 믿도록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가 있을까요? 비록 사울이 자신의 영적인 체험을 즉시 간증하고는 있지만(9:20-22) 그에 대한 확고한 믿음의 반석을 발견한 것은 그가 오래 공부한 히브리경전을 다시 살펴보고 연구하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를 발견하게 된 후입니다(1:11-2:2).

아울러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나사렛 예수로 성육신하여 공생애를 살아간 모습을 묵상하면서 비로소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발견하게 됩니다. 그 결과 랍비 사울은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방인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 바울로 남은 인생을 끝까지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사도 바울이 주님의 제자로 한평생 살아감으로써 개인적으로 얻고자 하는 목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부활과 영생입니다;

 

 그것을 그는 자신의 믿음의 푯대라고 말하고 있으며 성도들에게 함께 그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자고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습니다;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히게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3:10-16). 그것이 오늘 강해설교의 본문이므로 뒤에서 자세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셋째로, 사도 바울은 예수님과 공생애를 함께 지낸 12사도와는 다릅니다. 그는 생전의 예수님과 함께 복음사역을 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나사렛 예수가 만민구원을 위하여 대속의 십자가를 지고 3일만에 부활하였다는 이상한 소식을 전파하는 자들을 탄압하는 일에 앞장을 선 인물입니다(9:1-2). 그 점을 집사 스데반을 돌로 쳐죽이는 장면에서 생생하게 엿볼 수가 있습니다(8:1).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상한 간증을 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가 눈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11.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고전15:7-11).

어떻게 그러한 일이 가능할까요? 그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진작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육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영적으로)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20:29);

 

 한마디로, 영적인 눈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보게 되는 경우를 염두에 두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사도 바울의 경우가 그러한 것입니다(고전15:8).

넷째로, 예수 그리스도가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신 후 무덤에서 창조주의 부활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시고 영생의 몸을 입으시고 40일 후에 승천하셨다는 사실을 오늘날의 성도들이 어떻게 믿을 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회개하고서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 보혈의 은혜를 영접한 성도들에게 진리의 성령님께서 임재하여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에 가능한 믿음입니다.

보혜사 성령님께서 증거하고 계시는 진리는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실천이 동일하다는 것입니다(14:16-17, 16:13-15). 구체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의 뜻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누구에게나 구원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그 뜻을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성육신하여 공생애를 살아가면서 복음사역을 통하여 증거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대속의 십자가를 지셨으며 3일만에 부활하여 제자들을 다시 교육하시고 40일 후에 영생의 몸으로 천국에 들어가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와 같은 진리를 성령의 능력으로 깨달아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성도들이 참된 예배인생을 살아가는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벌써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4:23-24). 요컨대, 성령님의 역사로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될 때에 영생의 하나님을 올바로 바라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독생자가 이 세상에 구세주로 오신다는 사실을 어떻게 히브리경전에서 발견한 것일까요? 자세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가 발견한 내용을 구약성경말씀에서 대략 다음과 같이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1)  먼저 동방 땅의 제사장이라는 욥이 다음과 같이 간증하고 있습니다; “23.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24.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26.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27.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19:23-27). 족장시대에 이방인 선지자인 욥이 벌써 대속자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훗날 오실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2)  모세가 그의 출애굽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31.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32.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3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내가 내 책에서 그를 지워 버리리라. 34.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32:31-34). 두가지 뜻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모세가 동족 이스라엘 자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영생을 걸고서 중보기도하고 있습니다(32);

 

 또 하나는, 모세의 중보기도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여호와의 용서함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훗날 대속자가 그 죄를 담당할 때에 비로소 보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34).   

(3)  다윗이 영적인 눈으로 천국에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과 어린양 주님을 보고서 다음과 같이 찬양하고 있습니다; “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110:1);

여섯째로, 영생의 하나님과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현세적인 삶 만을 추구하는 자들은 어떠한 사람들일까요? 참고로, 구약성경에서 그 전형적인 특징을 민수기 제25장과 호세아 제13장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가, 우상을 섬기며 혼음의 향락을 즐기고자 하는 자들입니다(25:1-3);

(2)  둘째가, 하나님의 백성을 타락시키는 줄도 모르고 외세와 내통하고 자신의 향락만을 즐기면서 영적으로 무감각하게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시므리와 같은 지도자입니다(25:6-8, 14-15);

 

(3)  셋째가, 사람이 죽고 나면 그만이지 죽은 다음에 음부에서 심판을 받는다거나 죄와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여 영생한다는 것을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치부하고 마는 자들입니다(13:14).

(4)  넷째가, 불의와 죄악을 행하더라도 한평생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라는 지독한 현세주의자들입니다(13:12-13). 그러한 자들은 세속적인 왕의 권세를 의지하여 부와 권력만을 추구하면서 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13:11).

이제부터 위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 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얻은 교훈을 아울러 다음과 같이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히게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3:10-12);

(1)  사도 바울이 제10절에서 부활의 영광과 이 세상에서의 고난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는 고난을 먼저 경험하였기에 아버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으로 영생의 몸을 입고 무덤에서 부활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사도 바울이 그의 로마서 제8장에서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8:17-18);

 

(2)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얻으신 그 영생의 부활을 자신도 얻고 싶어합니다(11). 영생의 부활을 얻을 수 있는 비결을 예수님의 생애에서 바울이 배우고 있습니다. 그 비결이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만민구원과 영생의 복음으로 이 세상에 전한 그리스도의 일을 계승하는 것입니다(3:16). 또 하나는, 자신의 이익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제자 답게 십자가의 고난을 감내하는 영적인 삶입니다(16:24).

(3)  랍비였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고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그와 같은 영적인 체험을 통하여 사울이 두가지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다; 하나는, 나사렛 예수가 성육신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처럼 복음사역을 하고 고난의 십자가를 지면 자신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영생의 부활을 얻을 수가 있다는 진리입니다(8:11-18).

(4)  랍비 사울이 이제는 이방인 사도 바울이 되어 남은 인생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가 그토록 열정적으로 이방세계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며 종교적인 핍박과 박해를 마다하지 아니하고 있는 것은 그에게 한가지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처럼 그러한 인생을 살아감으로써 예수님께서 얻으신 그 영생의 부활을 그가 꼭 얻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3:12b). 그것은 비록 미래에 바울에게 임하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지금 바울은 그것을 이미 얻으신 주님을 보니 성령님 안에서 그것이 확실히 자신의 것이 될 수가 있다는 확신을 얻고 있습니다(3:12a). 그것이 바울이 누리고 있는 자신의 부활과 영생에 대한 믿음의 확신입니다.  

둘째로,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3:13-14);

 

(1)  사도 바울이 형제들아”(3:13a)라고 부르면서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참으로 중요한 믿음생활의 비결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3:13b) 매진한다는 것입니다.

(2)  그 의미가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믿음의 진짜 열매는 미래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생의 부활이기에 이 세상의 몸을 벗고 난 다음에 부활하여 얻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영생의 부활이라는 하나님의 선물을 얻기 위해서는 성도가 이 세상에서 남은 인생 가운데 우리를 이 세상에 매어 두고자 하는 것들을 뒤로 하고 주님처럼 고난을 향하여 앞으로 달려가야 한다는 것입니다(26:39).

(3)  그와 같은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적과 싸우기 위하여 앞으로 달려나가는 로마병사의 용감한 모습을 상기시켜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로마병사가 용감히 달려나가 선전함으로써 승리의 상급을 받게 되는 것처럼 성도들이 부활과 영생이라는 푯대를 향하여 똑바로 달려가는 믿음생활을 하게 되면 반드시 주님께서 얻으신 그 영생의 부활을 얻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14).

(4)  그와 같은 놀라운 구원의 상급을 주고자 주님께서 다메섹 도상에서 자신을 부르셨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바울은 그 사명을 감당하고자 전심전력으로 달려가고 있다고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14)이란 성도들이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의 Calling out’이며 그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게 되면 영생의 부활이라는 상급을 얻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셋째로,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3:15-16); 

(1)  하나님의 Calling out’을 생각하면서 그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고자 애를 쓰고 있는 성도들이라고 한다면 그 인생의 목표가 영생의 부활이며 그것을 얻기 위하여 주님의 제자로 한평생 살아갈 따름입니다(3:15a). 만약 달리 이 세상의 상급을 위하여 종교생활을 영위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3:15b). 그때에는 믿음생활의 목표가 그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일깨워 주실 것입니다(3:15c).

(2)  그것이 진리의 성령님의 역사로 깨닫게 되는 말씀의 은혜입니다. 그와 같은 영적인 깨달음을 얻게 되면 성도들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때에는 믿음생활의 목표를 즉시 영생의 부활에 두고서 다시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야 합니다(16);

 

 그리하지 못하고 계속 이 세상에서의 성공과 형통만을 누리고자 애를 쓰게 되면 그와 같은 종교생활은 낭패를 당하고 맙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고 결국에는 현세적인 삶 만을 누리고 자신의 생애를 끝내고자 하는 유혹에 사로잡히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도 바울이 믿음생활에서 실패하게 되는 근본이유를 가장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얻으신 영생의 부활이라는 상급을 푯대로 삼아 달려가지 아니하고 다른 것을 푯대로 삼아서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생의 부활이란 내세적인 것이기에 당장 현실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며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실체를 의심하기 쉬우며 그 목표를 현세적인 그 무엇으로 수정하고자 하는 시험과 유혹이 강합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시대 말기에 요단강 동편 모압 평지에서 그러했습니다. 젊은 모압 여인들을 따라 브올 산에 올라가서 우상 바알에게 절하고 2부순서로 제사에 참여한 여인들과 혼음을 즐긴 것입니다. 그것이 여호와신앙의 목표인 영생구원보다는 현실적으로 더 즐거운 쾌락이기에 그 유혹에 쉽게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북조 이스라엘왕국의 백성들이 영생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국왕의 권력에 의지하여 현세적인 구원과 영광만을 추구하고 있다고 갈파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시대가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눈을 높이 들어 영생의 하나님과 부활의 주님을 다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푯대를 향하여 사도 바울처럼 달려가지 아니하게 되면 현세적인 성공과 형통만을 추구하는 종교생활에 발목을 잡히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영생의 부활을 소망하고 있는 믿음생활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말 것입니다. 더구나 현실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의 능력이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아무쪼록 그와 같은 불행을 청산하시고 온전한 믿음생활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