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2년 손진길 목사 설교문

르우벤의 생각과 야곱의 생각의 차이에서 드러나고 있는 생생한 복음(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1. 25. 13:39

제목; “르우벤의 생각과 야곱의 생각의 차이에서 드러나고 있는 생생한 복음”(44:26-45:5)(참고구절; 42:37-38, 3:4-5, 12:30-31)

설교일; 주후 2022130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125일 화요일 작성)

 

야곱은 본래 약속의 아들인 이삭의 쌍둥이 아들 가운데 둘째입니다. 그런데 장남인 에서가 영적인 장자가 되지를 못하고 그 동생인 야곱이 영적인 장자가 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끈질긴 기도로 여호와의 축복을 얻어 자신의 타고난 운명을 바꾸고 이 세상을 이긴 자 이스라엘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25:27, 32:26-29);

세상적으로 말하자면 고대사회는 장남이 부친의 재산을 상속하고 차기 족장이 되는 시대입니다. 그렇지만 여호와신앙을 떠나서 제멋대로 자신의 칼을 믿고서 한평생 야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에서는 결코 약속의 아들 이삭의 여호와신앙을 물려받게 되는 영적인 장자 곧 이스라엘이 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25:28-34).

그런데 올바른 여호와신앙의 본질이 무엇일까요? 창세기는 스토리텔링으로 그 점을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므로 성경의 서론으로서의 역할을 단단히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창세기의 기사에서 그 점을 살펴보게 되면 가장 두드러진 답변을 오늘의 강해설교의 제목과 같이 야곱의 장남인 르우벤의 생각과 이스라엘로 불리게 되는 야곱의 생각의 차이에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44:26-45:5);

그에 따라 오늘은 창세기 제44장 제26절에서부터 제45장 제5절에 이르는 구절의 의미를 풀이하면서 과연 창세기가 말하고 있는 생생한 복음의 진수가 무엇인가를 한번 파악해보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 대목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창세기 제42장 제37-38절 말씀에서 르우벤과 야곱의 생각의 차이를 우선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스토리를 마가복음 제3장 제4-5절과 제12장 제30-31절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다음과 같이 이해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의 선한 뜻은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것이라고 단언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마가복음 제3장 제4-5절에서 선포되고 있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4.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을 행하는 것과 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5.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3:4-5).

둘째로, 창조주 하나님의 뜻이 정확하게 모든 생명을 살리고자 하시는 것임을 어떻게 알 수가 있을까요? 그 점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제12장 제30-31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30.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12:30-31).

간략하게 풀이를 해보자면 그 의미가 다음과 같습니다;

 

(1)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12:30). 그것이 여호와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전심으로 피조물인 사람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아니하는지를 어떻게 알 수가 있을까요? 단지 외형적으로 제사를 빠짐없이 드리고 종교생활을 잘 하는 것으로 행동하면 되는 것일까요?

(2)  그것이 아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창조주 여호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창조한 피조물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앞에 서게 되면 자신도 이웃도 전부 똑같은 피조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식처럼 사랑하여 생명을 돌보고 있는 대상들입니다. 나의 생명이 소중하듯이 그들 역시 하나님께서 똑같이 귀하게 여기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성도들은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셋째로, 그와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 경외자로 불리게 되는 아브라함은(22:12) 소돔성에 살고 있는 자신의 장조카인 롯의 가족 뿐만 아니라 소돔과 고모라 성에 살고 있는 모든 백성들을 여호와의 불심판에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면전에서 간절하게 중보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18:20-33). 그것이 바로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고 있는 아브라함의 여호와신앙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제19장을 보게 되면 아브라함의 장조카인 롯의 생각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는 하나님의 천사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신의 두 딸을 귀히 여기지 아니하고 단지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고서 소돔성의 악한 무리들에게 성적인 희생양으로 던져주고자 하고 있습니다(19:5-8);

롯의 신앙은 겉으로 보면 여호와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으로 보일지 몰라도 내적으로는 사람의 생명을 하나같이 귀하게 생각하며 전부 돌보고 살리고자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과 그 뜻을 실천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한참 벗어나고 있는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넷째로, 오늘의 본문과 관련하여 제42장 제37-38절 말씀을 살펴보게 되면 야곱의 생각과 그의 장남인 르우벤의 생각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으며 결국 어느 쪽이 하나님의 복음인가를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1)  37. 르우벤이 그의 아버지(야곱)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그(베냐민)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내 두 아들을 죽이소서. (베냐민)를 내 손에 맡기소서.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리이다”(42:37);

 

 르우벤은 자신의 두 아들의 생명보다 다른 것을 더 귀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막냇동생인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에 가서 양식을 사와서 집안사람들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또 하나는, 무사히 양식을 구해서 돌아오게 되면 그 공로로 장남인 르우벤은 아버지 야곱의 신임을 회복하여 그 지위를 승계하는 차기 족장이 될 것입니다(35:22). 두 아들의 생명을 담보로 제공하면서 그와 같은 세상적인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 복음일까요? 그것은 창조주 여호와의 생명사랑 곧 공의의 정신에서 한참 벗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장남 르우벤은 결코 영적인 장자가 되지를 못하며 영적인 대()족장 이스라엘의 후계자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49:3-4).

(2)  38. 야곱이 이르되, 내 아들(베냐민)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요셉)은 죽고 그만 남았음이라. 만일 너희가 가는 길에서 재난이 그에게 미치면 너희가 내 흰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42:38); 야곱은 요셉을 사랑했듯이 이제 자신의 품에 남아 있는 막내아들 베냐민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애굽의 총리에게 베냐민을 데려가지 아니하면 양식을 구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42:29-34). 하지만 소자인 베냐민의 생명을 희생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구휼하는 양식을 구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고 있습니다. 그는 결코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사랑하는 아들의 생명을 희생하는 모험을 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집안사람들의 목숨도 소중하지만 아들 베냐민의 목숨도 귀한 것입니다. 그와 같은 야곱의 생각은 먼 훗날 예수님을 해치고자 획책하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생각과 정반대입니다; “49. 그 중의 한사람 그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50. 한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11:49-50);

(3)  사람들은 흔히 소수를 희생하여 다수를 살리게 되면 그것은 필요한 조치이며 그 자체 의로운 헌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맹신적인 신앙이며 전체주의 사회의 잘못된 사고방식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그와 같은 인신제사를 결코 원하지 아니하십니다. 그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창조주께서는 피조물인 인간이 아니라 자신의 독생자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어 영원한 제물이 되도록 역사를 섭리하신 것입니다(3:16, 7:23-28).

(4)  그와 같은 사실을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제22장에서  모리아 산의 여호와 이레를 통하여 진작부터 보여주고 계십니다(22:12-14). 그러므로 복음이란 사람을 희생하여 사람을 살리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의 생명을 돌보고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친히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성도들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 영원한 대속의 제물로 삼으셨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복음으로 온세상에 널리 전하여야 합니다(24:44-48). 더구나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삶의 모범을 온세상에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15:17).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창세기 제44장 제26절부터 제45장 제5절 말씀까지의 본문말씀을 다음과 같이 한 구절 씩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26. 우리가(대변인 유다가) 이르되, 우리가(요셉의 이복형 10) 내려갈 수 없나이다. 우리 막내아우(베냐민)가 함께 가면 내려가려니와 막내아우(소자)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그 사람(애굽 총리 또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음이니이다. 27. (애굽 총리)의 종 우리 아버지가 우리에게 이르되, 너희도 알거니와 내 아내(애처 라헬)가 내게 두 아들을 낳았으나, 28. 하나는(요셉은) 내게서 나갔으므로 내가 말하기를 틀림없이 찢겨 죽었다 하고, 내가 지금까지 그를 보지 못하거늘, 29. 너희가 이 아이(25살의 베냐민)도 내게서 데려가려 하니, 만일 재해가 그 몸에 미치면 나의 흰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하리라 하니”(44:26-29); 다음과 같이 나누어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1)  26. 우리가(대변인 유다가) 이르되, 우리가(요셉의 이복형 10) 내려갈 수 없나이다. 우리 막내아우(베냐민)가 함께 가면 내려가려니와 막내아우(소자)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그 사람(애굽 총리 또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음이니이다”(44:26); 지난번에 애굽에 양식을 사기 위하여 다녀온 자들이 요셉의 이복형 10명입니다(42:2-4). 이제는 양식이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어 다시 애굽에 가서 양식을 사와야만 합니다(43:1-2);

1)    그런데 애굽의 총리인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아니하고서 그 옛날 자신을 애굽에 노예로 팔아먹은 심히 괘씸한 이복 형들에게 엄포를 놓았습니다; “자신의 친동생인 베냐민을 데리고 오지 아니하면 결코 애굽에서 양식을 살 수가 없다”(42:20의역).  그와 같은 사정을 유다가 대변인이 되어 우리가라고 칭하면서 아버지 야곱에게 진술하고 있습니다(26).

2)    그 대목은 훗날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양과 염소의 비유(25:31-46)와 비교하게 되면 복음적인 의미의 확장이 다음과 같이 나타나게 됩니다; “막냇동생 베냐민이 소자가 되고(25:40) 그 소자를 돌보아 아버지 하나님께 데리고 가는 성도가 영생의 상급을 얻도록 되어 있습니다(25:45-46). 그것이 주님의 복음입니다”.   

(2)  27. (애굽 총리)의 종 우리 아버지가 우리에게 이르되, 너희도 알거니와 내 아내(애처 라헬)가 내게 두 아들을 낳았으나, 28. 하나는(요셉은) 내게서 나갔으므로 내가 말하기를 틀림없이 찢겨 죽었다 하고, 내가 지금까지 그를 보지 못하거늘”(44:27-28);

1)    본문의 말씀은 사실 유다가 형제들을 대표하여 애굽의 총리에게 자신들의 사정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진술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유다는 상대방인 애굽 총리를 라고 부르면서 자신을 주의 종이라고 겸손하게 호칭하고 있습니다(44:27a).

2)    아버지 야곱에게는 본래 22첩이 있지만 그 가운데 야곱이 내 아내라고 여기서 부르고 있는 대상은 지극히 사랑한 애처 라헬입니다;

 

 그녀가 베냐민을 낳다가 25년전에 객사하였지만(35:16-20) 야곱은 여전히 그녀의 소생인 요셉과 베냐민을 무지하게 사랑하고 있습니다(44:27b, 37:3).

3)    요셉은 불행하게도 22년 전에 이복형들의 목축현장을 방문하였다가 길에서 짐승에게 참변을 당한 것으로 보고를 받아 야곱이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44:28, 37:32-35). 그러므로 이제는 애처 라헬의 소생은 막내아들 베냐민 뿐입니다. 그 아들만은 형 요셉처럼 자신의 품에서 잃어버리지 아니하려고 애지중지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아버지 야곱임을 유다가 애굽의 총리에게 알기 쉽게 설명하고자 합니다.  

(3)  29. 너희가 이 아이(25살의 베냐민)도 내게서 데려가려 하니, 만일 재해가 그 몸에 미치면 나의 흰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하리라 하니”(44:29); 야곱은 막내아들 베냐민의 나이가 벌써 25세나 되지만 그를 여전히 사랑하는 자신의 아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44:29a). 그처럼 아끼고 애지중지하는 아들이므로 그 아이를 잃어버리게 되면 야곱은 벌써 백발이 성성한 130세의 노인이므로 더 이상 삶을 영위할 기력이 사라져버리고 말 것입니다(44:29b, 47:9). 유다의 설명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30.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 이제 내(유다)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31. 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애굽총리 요셉의) 종들이 (여호와)의 종 우리 아버지가 흰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32. (애굽 총리)의 종이 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짐을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33.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34. 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또는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버지(야곱)에게 미침을 보리이다”(44:30-34); 다음과 같이 3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30.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 이제 내(유다)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31. 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애굽총리 요셉의) 종들이 (여호와)의 종 우리 아버지가 흰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44:30-31);

1)    유다가 자신도 모르게 어느 사이에 여호와신앙의 핵심이며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수가 되고 있는 한 대목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다는 것입니다(44:30a). 말을 바꾸게 되면 창조주 하나님의 생명과 여호와의 형상과 모양을 닮아 창조가 되어 있는 사람들의 생명이 하나로 묶여 있으며(1:26-27) 그 신원이 회복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5:24-29, 6:39).

2)    하지만 여기서는 유다가 막냇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게 되면(44:30b) 발생할 불상사에 대하여 애굽의 총리에게 가나안의 족장인 부친 야곱의 절절한 이야기를 인용하여 액면 그대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애굽의 총리 각하, 부디 나 야곱의 막내아들 베냐민을 살려서 내 품으로 돌려보내 주세요. 나는 그 아이의 형처럼 그를 잃어버리고 싶지가 않습니다. 무사히 부자상봉을 못하게 되면 저는 더 이상 이 세상을 살아갈 보람도 이유도 없습니다”(31절 의역);

(2)  32. (애굽 총리)의 종이 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짐을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33.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44:32-33); 애굽의 총리가 끝까지 자신의 사정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으므로 유다가 차제에 한가지 청을 하고 있습니다;

1)    그 내용은 유다 자신을 애굽 총리집의 종으로 삼더라도 베냐민 만은 부친 야곱의 품으로 돌려보내 달라는 것입니다(33). 그 이유는 유다가 부친에게 자신이 책임지고 베냐민을 돌려보내 줄 것이라고 벌써 약속했기 때문입니다(32).

2)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면 영원히 아버지의 집에서 죄인의 신세가 될 것이니 차라리 자신이 애굽 총리집에 종살이를 하고 막냇동생 베냐민을 가나안의 아버지께 돌려보내어 주는 것이 자신의 마음에 편하다는 진술입니다(44:32-33). 그와 같은 유다의 진술은 형제를 살려서 아버지의 집으로 돌려보내고자 하는 굳은 결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    그것은 22년전에 17세의 청소년이었던 요셉 자신을 상단의 노예로 팔아버린 이복형들의 태도와는 완벽하게 다른 모습입니다.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소자를 살려서 아버지의 품으로 돌려보내고자 하는 그 마음이 구세주 그리스도의 마음이며 복음의 진수입니다(25:40). 따라서 역사하는 힘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곧 이복형들을 원망하고 있는 요셉의 마음을 녹이고 있는 창조주의 능력이 놀랍게도 유다의 복음적인 진술 가운데 숨어 있는 것입니다.

(3)  34. 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또는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버지(야곱)에게 미침을 보리이다”(44:34);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약자인 소자를 돌보고 복음으로 그 생명을 살려서 창조주 하나님께 귀한 예물로 바치게 되면 다 함께 천국으로 들어가서 영생을 누리게 되는 상급이 있습니다(66:20-21, 25:40, 46). 그 뿐만이 아닙니다. 유다의 증언에 따르게 되면 소자 베냐민을 살려서 부친 야곱에게 돌려보내게 되면 부친의 생명이 보전된다는 것입니다(44:34). 그러므로 형제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부모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올려드리게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셋째로, “1.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질러 모든 (애굽)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자신의 정체)를 알리니, 그때에 그와 함께한 다른 사람(애굽인)이 없었더라. 2. 요셉이 큰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3.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45:1-5); 다음과 같이 나누어서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1)  1.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질러 모든 (애굽)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자신의 정체)를 알리니, 그때에 그와 함께한 다른 사람(애굽인)이 없었더라. 2. 요셉이 큰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45:1-2);

1)    이복형들을 대표하여 유다가 애굽의 총리에게 진술하고 있는 내용 가운데 두가지 복음적인 사실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막내아들인 베냐민을 자신의 생명같이 사랑하고 있는 아버지의 마음 그것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입니다. 또 하나는, 소자인 막내동생을 살려서 아버지의 품으로 돌려보내기 위하여 자신을 애굽 총리의 종이 되겠다고 자원하고 있는 유다의 형제사랑과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 그것이 성도들의 헌신적인 마음가짐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그 두가지의 복음적인 진술이 창조주의 능력으로 애굽 총리인 요셉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있습니다(45:1a).

2)    그 결과 요셉이 애굽인들을 주위에서 물린 다음에 히브리어로 형제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있습니다(45:1b);

 

 그리고 지나간 세월의 억울함과 원통함을 큰 애곡으로 한꺼번에 씻어내고 있습니다(45:2a). 그 방성대곡이 얼마나 컸던지 이웃에 자리잡고 있는 황궁에서도 바로가 요셉의 울음소리를 듣게 됩니다(45:2b). 은밀하게 그 방성대곡의 원인을 파악한 바로가 훗날 애굽으로 이주하게 된 야곱일행에게 얼마나 큰 호의를 베풀어 주고 있는지 모릅니다(45:16-20, 47:11).  

(2)  3.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45:3-4); 사람은 상상을 초월하는 일을 당하게 되면 제정신을 잃어버리고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애굽의 총리가 자신의 정체를 22년전에 이복형들이 상단에 노예로 팔아버린 동생 요셉이라고 자신의 정체를 밝혔지만 그 순간 그들은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45:3-4).

(3)  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45:5);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나게 된다는 한국의 속담이 있습니다. 지금 요셉의 형들이 처하고 있는 형편이 바로 그것입니다;

1)     그들은 이제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는 동생 요셉으로부터 보복을 당할 차례입니다. 그래서 아무 말도 못하고 속으로는 사시나무 떨듯이 공포에 질려 있는 상태입니다. 그 모습을 측은하게 바라보면서 요셉이 그들을 위로하는 말 가운데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섭리가 숨어 있습니다;

2)    세상적으로 전혀 이해할 수가 없는 자신의 억울한 인생살이 가운데 광야생활을 통하여 철부지를 성숙한 여호와신앙인으로 만드는 하나님의 역사섭리가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45:5a). 요셉이 일찍이 경험했던 종살이와 옥살이와 같은 억울한 시련의 과정을 믿음으로 통과하게 되면 훗날 하나님의 용사는 반드시 많은 생명을 구원하는 복음적인 일에 쓰임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45:5b);

 

결론적으로, 유다가 애굽의 총리에게 진술하고 있는 내용 가운데 소자의 생명과 아버지의 생명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놀라운 복음적인 진리가 숨어 있습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훗날 소자를 돌보고 그 생명을 살린 자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의인으로 여김을 받아 영생에 들어가는 되는 상급을 누리게 된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25:40).

그와 같은 복음의 진리는 듣는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애굽의 총리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면서 원한 깊은 이복형들을 용서하는 놀라운 형제상봉의 기회가 주어지고 있습니다(45:1-4). 22년만에 만난 이복형들에게 요셉은 지나간 자신의 억울한 노예생활과 옥살이가 결국은 자신을 애굽의 총리로 삼아 많은 생명을 구하게 하시려는 아버지 하나님의 역사의 섭리이며 훈련과정이라고 하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45:5).

그러한 요셉의 깨달음은 인생을 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뜻이 성숙한 신앙인을 만들어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는 것임을 밝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요셉의 진술이 한번 더 강조가 되면서 성경의 서론이며 입문서라고 말할 수 있는 창세기의 기록이 끝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50:20).

아무쪼록 본문의 성경말씀을 자주 묵상하시면서 만민구원의 복음사역을 위하여 자신의 인생 가운데 어떠한 고난이 있는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