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2년 손진길 목사 설교문

시편 제63편에 나타난 샤하르와 다바크의 의미(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1. 19. 02:23

제목; “시편 제63편에 나타난 샤하르와 다바크의 의미”(63:1-11)

설교일; 주후 2022123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119일 수요일 작성)

 

이새의 막내아들인 다윗은 청소년 시절에 벌써 전장에 나가서 블레셋의 거인 용사 골리앗을 물매와 돌로 쓰러뜨리는 전공을 세우고 있습니다(삼상17:49-51). 그것을 보고서 교활한 사울왕은 그를 장수로 삼아 전투에 선봉장으로 내세우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은밀하게 젊은 장수 다윗을 돕고 계시기에 그는 전장에 나가서 언제나 연전연승을 하고 있습니다(삼상18:5).

이스라엘 여인들이 국왕의 면전에서 초대왕 사울을 칭송하는 것보다 개선하는 젊은 장수 다윗을 더 크게 칭찬하는 소리가 그만 전국의 모든 성읍에 넘쳐나게 됩니다. 그것을 보고서 사울 왕이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그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6. 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읍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7.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8.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9. 그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삼상18:6-9).

그에 따라 시기심으로 말미암아 악령에 사로잡힌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두 차례나 창을 던지게 되지만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그때마다 다윗이 피하게 됩니다(삼상18:11, 19:10);

 

 그러나 청년장군 다윗은 그로 인하여 정치적으로 사울 왕의 군대에 쫓기는 도망자 신세가 되고 맙니다(삼상19:12).

약관의 나이에 도망자가 된 장군 다윗은 광야에서 도망자로, 이방인의 땅에서는 망명객으로 힘들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곤궁한 형편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마치 모리아산의 아브라함의 경우와 같이 젊은 다윗의 여호와신앙을 시험하고 계십니다(22:1-18).

구체적으로, 사울 왕의 목을 살그머니 취할 수 있는 기회를 두번이나 다윗에게 제공한 것입니다(삼상24:3-4, 26:5-8). 그러나 다윗은 세상적으로 왕국을 쉽게 얻을 수 있는 그러한 유혹을 물리치고 사울 왕의 목숨을 두번이나 살려주고 있습니다(삼상24:5-7, 26:9-11);

오로지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신실한 종의 법도를 지키고 있는 다윗에게 큰 상급을 여호와께서 주십니다. 그 결과 도망자의 삶 10년이 지났을 때에 사울 왕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전사하고(삼상31:4-5) 다윗은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가 헤브론에서 유다의 왕이 되고 있습니다(삼하2:4).

그리고 7년반이 지난 후에 전체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있습니다(삼하5:3-5). 그런데 다윗이 유다의 왕 또는 전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에 그가 지은 시가를 그가 광야에서 도망자 생활을 하고 있던 그 고달픈 시절에 지은 시가와 비교하게 되면 한가지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고생하던 그 시절 다윗의 여호와신앙이 더 절실했으며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그가 한걸음 씩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다윗의 신앙고백이 그가 광야생활을 할 때에 지은 것이라고 알려지고 있는 시편 제63편에 두드러지게 들어 있습니다;

특히 성도들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반드시 기억해야만 하는 두가지 신앙인의 자세가 다음과 같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1절에서 다윗이 간절히 주를 찾으며 그의 영혼이 주를 갈망하고 육신이 주를 앙모하기에 여념이 없다고 밝히고 있는데 그것이 히브리어 샤하르의 뜻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이 가진 바 소유를 다 팔아서 큰 밭을 사고 그 안에 감추어 있는 천국의 보화를 찾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13:44).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올바로 깨닫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희생과 진리추구의 삶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또 하나는,  8절에서 다윗이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곳 전반부에서 히브리어 다바크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가 진리를 깨달었다고 하더라도 남은 인생길 가운데 반드시 주님을 가까이 따라가는 거룩한 제자로서의 삶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요컨대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복음의 비밀을 깨닫는 것이 절반이고 그 나머지 절반은 거듭난 삶 가운데 반드시 그리스도의 제자로 발걸음을 나란히 하여 함께 살아간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두 마리의 소가 하나의 겨리가 되어 함께 밭을 갈고 있는 것과 같은 신앙생활의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왕상19:19, 11:28-30);

그와 같은 의미가 예수님의 다음 말씀 가운데 생생하게 들어 있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7:21).

이상과 같은 히브리어 샤하르다바크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이제부터 다윗의 시가인 본문 시편 제63편의 말씀을 한 구절 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얻은 주요 메시지를 구절의 풀이과정에서 함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1.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2.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3.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63:1-3);

(1)  1.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63:1); 물고기는 물이 없으면 죽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육체의 7할 가까이 물로 이루어져 있는 사람은 생수를 마시지 못하게 되면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여기서 육신적인 생수는 이 세상에서 얻어 마실 수 있는 물에 불과하지만(4:10-13) 영혼의 생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말씀이며 동시에 주님의 십자가 대속의 희생과 부활 그리고 진리의 성령님의 임재와 동행으로 말미암아 성도가 자신의 삶 가운데 얻게 되는 놀라운 영적인 생명력입니다(4:14-24, 14:16-20, 16:13-14). 그러므로 사람의 육체는 생수를 찾아 헤매고 있으며 그 영혼은 주님이 주시는 생명수를 열심히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63:1). 특히 광야생활 가운데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나 곤궁한 다윗이 그와 같은 이중적인 갈구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히브리어로 살펴보면, ‘새벽(샤하르)찾다라는 의미로 אֲֽשַׁחֲ֫רֶ֥ךָּ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어로 표현하자면 craving for’에 해당할 것입니다;

 

(2)  이 세상이 주고 있는 생수와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실 수 있는 영적인 생명수 가운데 젊은 다윗이 더 갈급하게 구하고 있는 것이 후자입니다. 일찍이 자신을 이스라엘 왕국의 국왕이 될 것이라고 대사사 사무엘을 통하여 기름을 부어 주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삼상16:1, 13). 그런데 다윗 자신이 처하고 있는 형편은 그와 정반대입니다. 도리어 초대 국왕인 사울의 미움을 받아 쫓기는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있습니다. 마시는 물이야 광야에서 샘물을 발견하여 마시면 되겠지만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져서 다윗 자신의 곤궁한 삶이 끝나고 풍성한 여호와의 상급을 맛보게 되는 것은 참으로 지루하고도 힘든 과정의 연속입니다.

(3)  다윗은 자신의 인생 가운데 여호와의 약속이 실현되는 그때를 꼭 보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단지 이스라엘의 국왕이 되는 약속의 성취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12지파의 왕이 되고 영토를 무지하게 넓히고 있는 다윗왕이지만 그는 예루살렘에서 그만 간음죄와 살인죄를 범한 죄인이 되고 맙니다(삼하11:4, 15-17). 그러므로 진정 다윗에게 필요한 영적인 생명수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빛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는 그 은혜를 말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에 대한 갈망을 다윗이 특히 본문에서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63:1b)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4)  2.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63:2); 영혼의 갈급함을 채울 수 있는 곳이 어디일까요? 다윗이 그 정답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이 땅에서는 유일하게 여호와께서 임재하여 계시는 성소입니다. 모세의 경우에는 처음에 그 성소가 불타는 가시나무가 있는 호렙산 중턱이었습니다(3:1-15). 그 다음에는 시내산에 강림하시는 여호와의 영광이 빛나고 있는 그 산의 정상이었습니다(19:18). 그 다음에는 어디였을까요? 백성들과 함께 거처하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들라고 지시하신 바로 그 성막이었습니다(25:8-9, 21-22). 그러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십계명을 어기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출애굽의 신 여호와라고 잘못 섬겼기에 모세가 지은 회막에 여호와께서 임재하고 계십니다(33:5-11).

(5)  그렇지만 시내광야에서 여호와의 명령을 받은 모세의 지시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을 완성하게 되자 그들의 이동식 성막이 머무르게 되는 그 장소가 바로 여호와께서 임재하시는 회막이 되고 있습니다(40:1-2, 34-35).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광야를 출발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진행할 때에는 성막을 해체하여 옮기는 과정에 있어서 제사장들이 옮기고 있는 지성소의 성물 언약궤가 바로 여호와의 권능이 역사하고 있는 장소를 말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그 언약궤를 다윗왕이 성막을 지어 보관하게 됩니다. 그후 그의 아들인 솔로몬왕이 예루살렘성전을 지어 그 안에 언약궤를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랑하고 있는 여호와의 임재의 장소 예루살렘성전이 훗날 파괴가 되고 사라지게 됩니다(왕하25:9, 24:1-2). 그 다음에는 우리 성도들이 영생의 생명수를 얻기 위하여 어디에 있는 성소를 찾아가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 대답을 제3절에서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6)  3.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63:3); 성소에 머물고 계시는 여호와의 영광을 영적으로 바라보고 있던 광야의 청년장군 다윗의 시선이 갑자기 하늘보좌로 향하고 있으며 그곳에 계시는 주의 영광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여기서 주의 인자하심(자신의) 생명보다 낫다”(63:3a)고 자신의 입술로 찬양하고 있는데(63:3b) 그 구체적인 의미가 무엇일까요? 주의 인자하심이 히브리어로는 헤세드’(חֶ֫סֶד)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죄를 범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독생자를 완전한 여자의 아들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십니다(3:15, 1:18). 그 아들 나사렛 예수가 공생애를 살아가면서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위한 복음으로 풀이하여 백성들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7)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성육신하신 구세주 그리스도이심을 자신의 삶과 죽음으로 증거하십니다(3:16). 따라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3일후에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지상명령과 더불어 제자들이 받을 상급에 대하여 미리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하나님의 복음을 온 세상 만민에게 전파하며 믿는 자 가운데 주님의 제자를 양육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끝까지 진리의 성령님과 동행하는 거듭난 인생을 함께 살아가게 되면 성도들이 영생의 구원을 얻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28:18-20, 2:19-22, 24:44-49, 22:28-30, 1:8-11). 그와 같은 의미가 예수님께서 수가성의 여인에게 들려주시는 말씀 가운데 벌써 들어 있습니다;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4:21-24). 따라서 예루살렘의 성소가 아니라 이제는 주님의 제자들이 하늘보좌를 바라보고서 그 옛날 다윗처럼 아버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63:3b).

둘째로,4.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로다. 5.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6.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7.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63:4-7); 한마디로, 다윗이 소승적인 자신의 영혼구원의 행복과 기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점이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기술되고 있습니다;

(1)  두 손을 들고서 평생동안 주의 이름을 찬양한다는 것입니다. 그 찬양의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63:4).

(2)  첫째 이유가 다윗의 영혼이 영적으로 만족할 수 있도록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흡족한 말씀의 은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63:5). 따라서 다윗은 매일 침상에서 눈을 뜨자마자 간밤의 안식 가운데 창조주 여호와로부터 받은 예언의 말씀을 기쁜 마음으로 읊조리고 있습니다(63:6).

(3)  둘째 이유가 하나님이 주신 예언의 말씀 그대로 다윗 자신의 인생 가운데 주의 도우심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63:7a). 그것을 바라보면서 다윗은 광야생활 가운데에서도 주의 보호하심에 대하여 찬양을 올려 드리고 있습니다(63:7b).

셋째로,8.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9.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그들은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10. 칼의 세력에 넘겨져 승냥이의 먹이가 되리이다. 11. 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 주께 맹세한 자마다 자랑할 것이나,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히리로다”(63:8-11); 신앙생활이란 소승적인 하나님 찬양으로 끝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의미를 깨닫고 마음속에 영적인 기쁨이 샘솟고 있다고 한다면 그 다음에는 진리의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주님의 지상명령을 실천하는 삶이 반드시 뒤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을 구원하는 대승적인 복음의 능력이 성도의 삶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다윗이 제8-11절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1)  8.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63:8); 다윗은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의 뜻을 깨닫고 새벽에 기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음날 하나님의 예언이 실현되는 현장을 보게 되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새벽마다 다윗이 간밤에 여호와께서 주신 말씀을 기뻐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그 점을 앞부분에서 벌써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제8절부터 다윗은 다른 내용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그것은 소승적인 말씀에 대한 깨달음에 만족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을 실천하기 위하여 다윗이 자신의 인생을 바쳐서 세상에 나서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다윗은 영적으로 매일 주를 가까이 따르고자 열심이라는 것입니다(63:8a). 주님을 결코 멀찍이 따라다니고 싶지 않습니다(14:50-52, 23:49). 그 뒤를 바짝 달라붙어서 따라가거나 아니면 아예 발걸음을 같이하여 주님이 가시는 그곳에 어디든지 함께 가려고 합니다. 그 모습을 히브리어로는 다바크’(דָּבְקָ֣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영어로 표현하자면 walking with Jesus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와 같은 의미를 담아서 제자의 길을 다음과 같이 복음서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16:24).

2)    둘째, 그와 같이 살아가는 성도들을 주님께서는 참으로 기뻐하십니다. 따라서 그 강한 손으로 그를 붙드시고 모든 적으로부터 보호하여 주시는 것입니다(63:8b). 그 점은 일찍이 아브라함이 이방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여호와의 선지자로 살아갈 때에 작동하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에서부터 벌써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12:1-3).

(2)  9.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그들은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10. 칼의 세력에 넘겨져 승냥이의 먹이가 되리이다”(63:9-10); 다윗을 해치려고 하는 적들은 비단 사울 왕 만이 아닙니다. 광야생활과 더불어 다윗이 망명생활을 할 때에 수많은 적들이 그의 목숨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때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 적들을 대신 물리쳐 주시고(63:10, 이이제이의 수법으로 적들을 쳐부수어 여우과에 속하는 승냥이의 먹이가 되도록 하셨다) 그들을 없애 버려 주신 것입니다(63:9). 어째서 그와 같은 강력한 보호하심이 나타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다윗이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을 묵상하며 기뻐할 뿐만 아니라 깨달은 말씀을 자신의 인생 가운데 실천하고자 열심이기 때문입니다.

(3)  11. 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 주께 맹세한 자마다 자랑할 것이나,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히리로다”(63:11);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기를 맹세한 성도는 그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마치 광야생활 가운데 고생하던 다윗장군이 훗날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과 같은 하나님의 상급을 받고 자신의 인생을 즐거워할 수가 있게 됩니다(63:11a). 그 반대의 경우도 하나님의 역사가 분명합니다. 맹세 따로, 행동 따로 그렇게 위선적인 행동을 하게 되면 비록 성도라고 하는 무늬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주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점을 예수님께서는 진작에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7:21).

결론적으로, 말 따로 행동 따로 하는 신앙생활은 이중적이며 위선적인 것입니다. 그와 같은 외식행위를 하나님께서는 싫어하십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외식에 대하여 크게 꾸중하신 것입니다(23:1-36).

그와 마찬가지로 본문에서 다윗은 소승적으로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을 기뻐하며 그 예언이 자신의 인생 가운데 실현이 되는 것을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두 손을 들고 여호와의 은혜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절반의 신앙생활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말씀을 깨닫는데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바짝 붙어서 살아가기를 참으로 좋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성도들이 주님을 멀찍이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바짝 붙어서 그리스도의 공생애의 모습을 보고 배워서 그대로 실천하는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의미를 알기 쉽게 흔히 주님과 동행하는 제자의 삶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에는 그 뜻을 그리스도 안에서또는 성령님 안에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8:1-2, 9:1-2, 15:16, 고전6:11). 그것은 바울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고 있는 아브라함의 믿음생활의 한대목을 묵상해보면 그 뜻이 하나님 앞에서(in the presence of God) 의사결정을 하고 행동하는 것’(17:1)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의 자손인 요셉이 여호와 앞에서의 신앙생활을 애굽에서 영위하여 하나님의 형통의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39:1-2). 그 대목을 알기 쉽게 말하고 있는 대목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39:9). 아무리 은밀한 곳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영적인 눈이 여호와의 신앙인 요셉의 행동을 감찰하고 계십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서 자신의 처신을 똑바로 하고 있는 요셉입니다. 그것이 훗날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 세움을 받게 되는 비결이며 또한 많은 족속을 구원하는데 요셉의 인생이 유익하게 사용되어지는 이유인 것입니다.

아무쪼록 그와 같은 깨달음과 실천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주님으로부터 성령님을 통하여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