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2년 손진길 목사 설교문

사도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 초대교회의 4종류의 적과 그 처방(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1. 11. 15:19

제목; “사도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 초대교회의 4종류의 적과 그 처방”(2:20-3:4)

설교일; 주후 2022116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111일 화요일 작성)

 

사도 바울이 로마에서 옥중생활을 하면서 주후 60년대초에 작성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는 4편의 옥중서신의 이름이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그리고 빌레몬서입니다.  빌레몬은 골로새교회의 지도자 이름이기 때문에 바울의 옥중서신의 수신교회는 사실상 3군데입니다;

 

그 가운데 2개 교회 곧 소아시아 서남부의 항구도시 에베소의 교회와 유럽의 첫 관문인 마케도니아 지방의  로마식 도시 빌립보의 교회는 사도 바울이 직접 선교하여 개척한 교회입니다(19:1-10, 16:12-15). 그런데 골로새교회는 그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의 두란노서원에서 2년간 그리스도의 복음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있을 때에 그에게서 말씀을 배운 에바브라가 개척한 교회가 골로새교회라고 알려지고 있습니다(4:12, 19:9-10). 따라서 바울은 제자격인 에바브라를 통하여 골로새교회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 및 빌립보교회의 성도들과는 개인적으로 친하지만 골로새교회의 성도들과는 별다른 친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골로새교회의 성도 및 지도자 빌레몬에게 보내고 있는 바울의 서신이 친절하면서도 사실은 굉장히 조심스러운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을 만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영접함으로써 거듭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자가 도망자 출신 노예인 오네시모인데 그가 본래 빌레몬의 종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노예 오네시모를 부디 용서하고 그에게 자유를 달라고 골로새교회의 지도자인 빌레몬에게 얼마나 공손하게 부탁하고 있는지 모릅니다(1:14, 20);

 

 개인적인 친분이 전혀 없기에 바울의 태도가 그토록 정중하며 더더구나 조심스럽다고 하겠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골로새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내면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설명을 전반적으로 쉽고도 체계적으로 전해주고자 참으로 열심입니다. 그 이유는 바울에게서 직접 복음에 대한 설명을 듣지 못한 자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사도 바울이 초대교회 시절 전체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교회의 적들을 골로새서에서 참으로 알기 쉽게 4종류로 분류하여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 영적인 정체를 밝히면서 그에 대한 대책까지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 점을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리 서론삼아 말씀을 드리자면, 본문 골로새서 제2장 제23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내용을 참조하면 교회의 대적들의 이름이 천사숭배자, 율법주의자, 금욕주의자, 그리고 원시적인 영지주의자 등입니다. 그 특징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천사숭배자에 관한 성경의 기록이 처음 나타나고 있는 대목은 창세기 제19장입니다. 소돔성 안으로 두 천사가 사람의 모습으로 들어올 때에 거주민 롯이 얼마나 깍듯하게 영접하고 있는지 모릅니다(19:1-3);

그것은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두 천사와 함께 현신하고 계시기에 더불어 영접한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18:1-10, 22-33). 아브라함은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사자인 천사를 영적으로 분별하고 있지만 롯은 그러하지가 못한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창조주 하나님과 그 사자인 천사는 그 신분과 역할이 다르다고 하는 차이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구별이 가능할 때에 천사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을 정확하게 경배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신앙과 구별되고 있는 것이 우상숭배인데 그 특징은 영적인 매개자에 불과한 무당을 신적인 능력의 소유자로 믿거나 그를 통하여 우상에게 경배하고 자신의 이익을 손쉽게 도모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전해주는 사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천사를 마치 여호와인 것처럼 대신 숭배하게 되는 천사숭배사상이 예나 지금이나 교회의 문제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그 범주에 들어가는 잘못된 신앙태도가 크게 보아 다음 3가지입니다;

첫째, 천사가 자신에게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성경말씀과 대조하지 아니하고 함부로 전파하는 것입니다. 직통계시의 문제점과 직결되고 있는 잘못된 영성생활입니다.

둘째,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고 있는 사탄과 악한 영들의 속삭임을 마치 그리스도의 복음인 것처럼 잘못 받아들이고 있습니다(고후11:13-15);

 

 더구나 귀신과 대화하여 얻은 지식을 가지고 성경말씀을 함부로 풀이하는 것은 이단적인 것입니다.

셋째, 성령님께서는 성부 하나님의 뜻과 성자 그리스도의 실천이 동일하다는 성경말씀의 진리성을 입증하고 계십니다(14:16-17, 16:13-16). 그런데 그와 같은 진리의 성령님의 역할을 무시한 채 자신이 얻은 레마의 말씀 또는 영적인 깨달음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어긋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만이 진리라고 강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영성생활을 강조하고 있는 자들이 넓은 의미에서 천사숭배사상에 빠져 있는 자들입니다.

둘째로, 일명 유대주의자라고도 불리고 있는 율법주의자들이 초대교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본래 유대교인이다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영접하여 기독교인이 된 자들입니다. 그 가운데 일부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것만으로는 완전한 구원을 얻을 수가 없고 성도가 된 다음에는 율법생활을 온전히 하여야 완전한 구원을 얻을 수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 보혈의 능력을 제멋대로 제한하고 있는 유대교식의 사고방식입니다;

 

 그와 같은 초대교회의 문제를 선교현장에서 해결하고자 예루살렘총회가 열렸지만 그 의결사항이 제대로 지켜지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15:22-29, 2:4, 21).

셋째로, 금욕주의에는 장단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새언약시대의 문을 열기 위하여 40일 동안 금식하신 다음에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시고 비로소 대중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외치기 시작하십니다(4:1-11, 17). 그와 같은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금욕주의는 분명히 신앙훈련의 하나로서 나름대로 장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와 달리 오로지 금욕이나 고행을 통해서만 진리를 깨닫게 된다고 강변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역사적으로 유대인 사회에서는 소위 분리주의자라고 불리고 있는 엣세네파가 있습니다. 그들은 오지나 섬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혼자서 연구하거나 엄청난 금욕생활과 고행을 통하여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영성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그 일맥에서 세례 요한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3:4);

 

 그렇지만 그것이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도움이 되기 보다는 방해가 되기 쉽습니다.

비근한 예로 수도원운동이 있습니다. 초기의 수도원은 금욕주의를 실천하기 위하여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곳에 설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교회의 성도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차단한 것입니다. 따라서 나중에 도시 가운데로 수도원이 들어오면서 오로지 그 담장만 높이 쌓은 것입니다.

넷째로, 초대교회에 있어서 유대주의적인 율법사상과 더불어 헬라 철학의 기반이 되고 있는 원시적인 영지주의가 그리스도인들의 복음생활을 해치는 양대 산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유대주의에 물들어 있는 교회구성원들이 율법을 온전히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 은혜를 온전히 믿고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칭의의 은혜를 받고 있는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옥상옥의 부담을 지우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영원한 대속의 은혜를 멸시하고 있는 사상이므로 쉽게 그 처방을 마련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원시적인 영지주의는 그와 다릅니다. 무엇보다도 그 이론적 근거가 둘입니다;

하나는, 인위적인 이분법입니다. 그것은 보이지 아니하는 영적인 실체의 세계와 보이는 육적인 허구의 세계로 양분하는 사고방식입니다. 진리는 영적인 세계에 존재하므로 그것을 얻는 것이 철학적인 지식 그노시스(Gnosis)입니다. 영적인 지식 곧 영지(靈智)를 깨닫게 되면 철학왕이 되어 이 세상을 구원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인간의 육체라고 하는 것은 영혼구원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세상을 살면서 쾌락과 향락을 누리고 욕심을 마음껏 추구하지만 그것은 육신적인 죄악에 불과하므로 이 세상을 떠날 때 벗어버리면 그만이라고 주장합니다. 과연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러한 내용일까요?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사도 바울이 역설하고 있습니다. 거듭난 성도들은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세상에 전하며 경건한 삶의 모범을 보여야 하기 때문입니다(1:24).

요컨대, 헬라철학적인 영지주의가 초대교회시대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데 있어서 훌륭한 도구로 쓰임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영지주의적인 이분법이 종국적으로 육신적인 쾌락주의로 발전하고 육체적인 죄악에 대하여 면죄부를 주게 되자 교회내에서 큰 해악을 끼치고 마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전지식을 가지고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 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묵상을 통하여 얻은 말씀의 교훈을 더불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20. (a)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b)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c)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21.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22. 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 23.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겸손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2:20-23);

(1)  사도 바울은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2:22b)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신 후 3일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교훈과 생애를 따르는 것이 성도들의 믿음생활의 비결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2:20b).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희생하여 대속의 제사를 드리고 또한 3일 후 무덤에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에게 한가지 가르침을 주고 계십니다. 그것이 바로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정확하게 알고서 그리스도처럼 실천한 자는 영생의 구원을 얻겠지만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율법과 규례 또는 종교적인 교리를 절대시하면서 살아간 자들은  영생의 부활에 참여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2:20c). 그와 같은 맥락에서 그리스도가 무덤속에 파묻어버린 그것이 세상의 초등학문이며 장로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규례입니다(2:20a).

(2)  사람이 만든 교훈과 규례 나아가서 율법과 종교적인 교리는 효력이 일시적입니다(2:22a). 왜냐하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대속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칭의의 은혜를 받아 거듭난 삶 거룩한 성도로 남은 평생을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은 영적으로 썩어지는 세상의 규례에 너무 억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유대주의적인 율법사상을 구원의 조건으로 강조하고 있는 자들과는 아예 거리를 확실하게 두고서 살아가는 것이 옳다고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2:21).  

(3)  그렇다면 세상사람들이 만든 규례와 사상 그리고 종교적인 교리들 가운데 초대교회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들이 대표적으로 어떠한 것일까요? 사도 바울이 자신의 옥중서신을 받아 보게 되는 골로새교회의 성도들을 위하여 친절하게도 전형적인 4종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2:23). 그것들을 나름대로 풀이하여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1)    첫째가, “자의적 숭배입니다. 그것은 자의적으로 영적인 레마의 말씀 또는 성령님의 지시라고 단정하여 무조건 그대로 주장하며 전파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영적인 메시지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창조주 여호와의 정확한 뜻인지 아니면 악한 영들의 속임수인지를 분별하는 작업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만약 그 과정이 생략되게 되면 교회생활에서 큰 혼란을 초래하게 됩니다. 따라서 흔히 영성신학을 다룰 때에 그 초석을 이루고 있는 여러가지 조각들을 먼저 공부하게 됩니다. 최소한 기독교의 영성(spirituality)으로 여김을 받게 되자면 자신이 취득한 영적인 지식을 성경말씀과 신학 그리고 교회의 역사 및 전통에 먼저 비추어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와 같은 분별력을 갖추지 못한 천사숭배사상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모두(冒頭)에서 벌써 말씀을 드렸으니 참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2)    둘째가,자의적 겸손입니다. 겉으로 보면 참으로 겸손한 신앙생활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자발적으로 율법생활에 최선을 다하며 모범적인 종교생활을 스스로 영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율법생활이 타의 모범이 된다고 하여 그것을 영생구원의 기준으로 말해서는 안됩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사람이 만든 전통적인 규례와 율법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의 온전한 뜻을 왜곡하지 말라고 강조하셨기 때문입니다(7:5-9). 자세한 내용은 역시 모두의 설명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3)    셋째가, 몸을 괴롭게 하는 지혜입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금욕주의 또는 고행주의를 참으로 알기 쉽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지혜를 발휘하여 수준 높은  영성생활을 유지하면서 득도의 기쁨을 얻을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한 것이 소위 금욕생활 또는 고행입니다. 그것은 자력적인 구원을 희구하고 있는 종교에서 자주 엿볼 수 있습니다. 물론 유대교에 있어서도 엣세네파가 그러하였으며 그 방법이 초대교회에서도 그대로 도입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금욕과 고행 대신에 그리스도의 제자로 경건하게 살아가는 전도자의 삶을 그의 로마서 제12장 첫머리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12:1-2). 한마디로, 금욕생활과 고행이 목적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같은 대속의 삶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인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복음을 온세상에 전파하고 스스로 실천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지나친 금욕주의(Asceticism)의 폐해에 대해서는 모두의 설명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4)    넷째가,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헬라 철학자들이 심취하고 있는 원시적인 영지주의가 보이지 아니하는 영적인 세계와 보이는 육적인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이해하고 영적인 구원론을 설명하는데 있어서는 훌륭한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육신이 아무 소용이 없으므로 육체적으로 욕심과 쾌락을 추구하며 살아가지만 마지막 순간에 회개만 하면 천국으로 직행할 수가 있다는 무서운 쾌락주의와 탐욕주의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에 따라 초대교회에 큰 해독을 끼치고 있습니다. 예컨대, 초대 예루살렘교회 7집사의 막내인 니골라가 육체적인 쾌락의 향유가 영혼의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교회내에 소위 니골라당이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2:6);

 

 그 영향으로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도 제멋대로 욕심껏 살다가 죽기 전에 궁중목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애초에 성화의 과정이 없으며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살아간 흔적을 남아 있는 이 세상에서의 삶에서 전혀 발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역시 모두의 설명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3:1-2);

(1)  초대교회의 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율법주의, 천사숭배사상, 금욕주의, 그리고 원시적인 영지주의의 공통적인 정체성이 무엇일까요? 그 점을 알면 처방을 마련하기가 더욱 수월할 것입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사도 바울은 그 첫번째 공통점이 그들은 땅의 것을 지나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3:2b). 생각해보면, 율법주의는 영적인 하나님의 은밀한 눈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사람의 눈을 의식하는 외식적인 신앙생활을 말하고 있습니다. 천사숭배사상은 무당의 말을 성령님의 음성으로 오인하는 것입니다. 금욕주의는 의식적으로 육체를 괴롭힘으로써 영적인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고자 하는 인위적인 방법론입니다. 영지주의는 사람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지식을 깨달을 수가 있다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육신적인 삶이 아무리 쾌락적이고 탐욕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영적인 구원과는 무관하다고 하는 면죄부를 발행하고 있습니다.

(2)  그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칭의를 받은 성도들이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복음을 온세상에 전하면서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야만 하는 책무를 완전히 배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이미 칭의를 받았으며 이제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주님을 모시고 영성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울이 주장하고 있는 내용 그대로 영생의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그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성도의 삶이며 위의 것을 추구하는 신앙생활입니다(3:1-2a, 3:10-16);

 

 그것으로 이 땅의 것을 절대시하고 있는 그들 이단적인 가르침을 이길 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셋째로,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3:3-4); 사도 바울이 초대교회의 적들을 확실하게 이길 수 있는 비결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자신이 죄인임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남은 인생을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겠다고 결단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따라서 그 생명이 벌써 창조주 하나님의 손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떠한 종교적 교리나 인간이 만든 사상과 사조가 그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8:37-39).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믿고 거룩한 성도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그 자리에 함께 설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3:3-4의역).

결론적으로, 초대교회의 성도들을 괴롭힌 세상적인 율법생활, 쾌락주의, 금욕 및 고행, 그리고 천사숭배사상이 21세기 오늘날에도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21세기 과학만능사조가 절정에 달하고 있으며 황금만능사상이 인간의 생명을 경시하는 사조로 만연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거룩한 영성생활을 영위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세속을 떠나 외딴곳에서 마치 자연인 수도승처럼 금욕과 고행을 하거나 아니면 성경상에 족보가 없는 이상한 영성생활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시대이므로 그 어느때보다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사도 바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쪼록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온전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