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10강(요1:23-28)(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2. 21. 15:47

요한복음 강해 10(1:23-28)

작성자; 손진길 목사(로토루아순복음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 4 13()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1:23)

 

이사야 선지자는 그의 선지서에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있을 것임을 백성들에게 예언하고 있습니다(40:3). 그의 예언은 장차 제사장나라가 망하고 선민들이 이방나라에서 고난의 세월을 보내고 있을 미래지사에 대한 것입니다. 옛날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고난을 당하고 있던 때가 다시 역사적으로 반복이 되고 있습니다(1:9-10). 그래서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 그들을 구원해달라고 히스기야 왕의 때처럼 다시 매어 달리고 있습니다(37:4-7). 결과 출애굽의 은혜가 다시 있을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장차 메시아가 땅에 와서 이루실 출애굽은 옛날 모세의 것과 다르다고 이사야가 말하고 있습니다; 마디로, 모세 때처럼 이방나라 애굽에 재앙을 내리고 이스라엘의 자손만을 출애굽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메시아는 이스라엘 자손뿐만 아니라 애굽인의 후손들도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북쪽의 제사장나라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킨 있는 원수의 나라 앗수르의 사람들도 구원하실 것입니다(19:21-15). 요컨대, 만민을 구원하시는 메시아의 복음이 전세계 모든 민족에게 퍼져나갈 것입니다. 복음의 길이 바로 주님이 가시는 대로입니다. 길을 미리 준비하라고 외치는 자의 소리가 광야에서 있을 것임을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시대를 예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막에 길을 내는 것과 같습니다(1:23, 40:3).

그리고 복음의 일꾼들은 광야에 모여들어서 신앙훈련을 받게 것입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를 듣고서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광야로 모여드는 것입니다. 신앙훈련의 장소 광야로 떠나오기 위해서는 자신의 가업과 집안의 일을 일정기간 내려놓아야만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열두 제자가 그러했습니다(4:22).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나자 500명의 성도들이 모여서 성령의 강림을 기다리면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고전15:6). 그러나 열흘 오순절 성령강림 때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120 정도의 성도들만이 남아 있었습니다(1:15, 2:1-4). 그들에게 성령이 강림하여 내주, 역사하시기를 시작했으며 그들로부터 초대교회가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2:41-47).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집안일을 제쳐두고 끝까지 헌신하는 자는 항상 소수입니다. 그들은 광야로 나아오는 영성을 가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오늘 날도 그들로부터 사막에 길을 내는 시대가 전개될 것입니다.

1970년대말 서울 서초동에서 사랑의교회 시작하셨던 옥한흠 목사님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역할에만 충실했던 세례 요한의 청지기 정신을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본받아야만 한다고 강조하신 바가 있습니다. 옳습니다. 종이 영광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자신은 사명만을 완수하고 공기의 흐름을 따라 사라지는 소리가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열매와 영광은 성도들 인생의 주인이신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하심과 성도들의 노력으로 확장이 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훗날 재림하시는 그리스도가 아버지 하나님께 봉헌할 것입니다(고전15:24). 때에는 예루살렘의 성에 사도들의 열두 주춧돌이 놓이게 되고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 책에 적혀있는 성도들이 부활, 승천하여 문으로 영광스럽게도 당당하게 천국에 입장할 것입니다(21:14, 26-27).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사람이 섰으니(1:26)

 

세례 요한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함께 서있다는 것입니다(1:26). 분이 여기서는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른 의미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대신하여 우리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우리들 가운데 세워두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를 전하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누구든지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작은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18:5-6).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이 거지 나사로와 부자와의 이야기 하시고 있습니다(16:19-31). 지체장애자이며 거지인 나사로는 부자의 대문 바깥에서 겨우 동냥으로 목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평생 동안 나사로를 거들떠보지도 아니했습니다. 그들 사람이 죽어서 나사로는 천국으로, 부자는 지옥불로 들어갔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부자를 회개시키기 위하여 땅에서 고난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매일 전해주고 있었습니다. 공로로 그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천국생활을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지를 무시하고 자신의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어린 자요 작은 자였던 나사로를 사람대접해주지 아니했던 부자는 지옥불에 던져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들 주변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누가 예수님이 보낸 사람인지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1:27)

 

 16세기 일본에서는 주인의 신발을 따뜻하게 보관하고 신발의 끈을 묶거나 풀어주는 종이 존재를 했습니다. 한때 춘추전국시대의 일본을 통일했던 영웅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본래 그러한 신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얼마나 주인인 오다 노부나가 지극정성으로 섬겼는지 주인의 신발을 자신의 품에 넣고 다녔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체온으로 따뜻하게 데워진 신발을 주인의 발에 신겨드렸습니다. 그러한 신분사회가 예수님 당시 유대사회에서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가장 낮은 종에 대한 묘사로서 세례 요한이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한다 말하고 있습니다(1:27). 세례 요한의 묘사보다 정확한 표현을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 다음과 같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18:27). 생각해보면, 우주를 창조하시고 지금도 운행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시키고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인간의 존재는 티끌이나 재와 같다고 말할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이 주인의 신발끈을 매는 종보다 조금 못한 자로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있는 것은 사실 굉장히 높은 신분을 가지고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랑의 주님과 너무 친하다가 보니까 잠깐 동안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서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는 창조주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자신은 한갓 미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재빨리 인식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과 같이 그래도 종으로라도 삼아주신 은혜가 얼마나 것인지를 새삼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율법을 지킬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