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제8강(요1:19-23)
작성자; 손진길 목사(로토루아순복음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년 4월12일(금)
세례 요한은 아니라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그렇다고 말씀하시다
진리는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동일할 때 그것이 진리입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증거하시는 말씀이 예수님의 말씀과 동일할 때 그것이 진리가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충만은 말씀충만과 더불어 하나님의 능력이 충만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모르고 있을지라도 성령의 세례를 받고 성령충만까지 경험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행하며 성령의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영적인 양식인 말씀을 먹어야만 성령의 충만이 지속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장기적으로는 말씀이 충만해질 때 비로소 하나님의 능력이 정상적으로 나타나고 사람들을 올바로 하나님께 인도할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고 성령이 충만해지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배우고자 하는 열망이 생깁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자신의 인생을 살고 싶어집니다. 비록 세상이 인정해주지 아니한다고 하더라도 그 좁은 길로 한평생 달려가게 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 하시고 자신을 인정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자, 세례 요한의 모습을 본문이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가 한 가지 예언을 남기고 있습니다; “야훼 하나님의 날이 이르기 전에 엘리야 선지자가 다시 이 세상에 온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메시아의 오심을 예비하기 위함입니다”(말4:5-6절 요약). 그리고 나서 40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온 유대 땅에 선지자의 그림자조차 보이지를 아니했습니다. 그럴수록 유다의 백성들은 더욱 메시아가 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그 이유는 이방나라 강대국의 지배가 계속 되었기 때문입니다. 짧은 기간 BC 142년부터 BC 63년까지 80년에 불과한 레위인 제사장 가문 하스모니안 왕조의 통치기간을 제외하고 나면 유다 백성들은 페르샤, 헬라, 로마의 지배를 계속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긴 세월 동안 다윗의 후손 가운데 다윗 왕과 같은 메시아가 나타나서 자신들의 조국 유다의 나라를 되찾아주기를 소원했습니다. 그 메시아의 나라는 옛날 다윗 왕 시대의 이스라엘 제국처럼 온 중근동 땅을 호령하는 패권국의 모습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메시아’라는 히브리 말을 신약성경에서는 헬라어로 ‘그리스도’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와 같은 시절에 요단 강가에 선지자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세례 요한의 등장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유대인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고자 히브리 성경에 밝은 제사장들과 랍비들을 그곳으로 파견하고 있습니다(요1:19a). 그들의 임무는 세례 요한의 정체를 파악하여 그들 유대교의 최고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에 보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세례 요한과의 대화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메시아인지 아닌지를 제일 먼저 묻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네가 누구냐(그리스도냐)?”(요1:19b),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요1:20)입니다. 둘째, 이제는 다시 오는 엘리야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그러면) 네가 엘리야냐?”(요1:21a), “나는 아니다”(요1:21b). 셋째, 마지막으로 말라기와 같은 구약상의 선지자인지를 파악하고 있습니다. “네가 그 선지자냐?”(요1:21c), “아니다”(요1:21d). 한 마디로, 세례 요한은 자신이 메시아도 아니고 다시 오는 엘리야도 아니고, 나아가서 구약에서의 선지자와 같은 신분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묻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고 하느냐?”(요1:22),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입니다”(요1:23, 사40:3). 그의 대답 안에 함축되어 있는 깊은 의미를 파헤쳐보자면, 그것은 나는 너희 유대인들이 말하고 있는 그와 같은 신분의 사람으로 너희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어하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 땅에 보내신 그 사명만을 감당하고 싶어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사명은 이 세상을 구원하고자 오시는 독생자를 백성들에게 소개하고 백성들이 믿음으로 그 분을 영접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요1:6-8, 3:16, 5:24). 그렇게 자신의 사명을 묵묵히 신실하게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인정하심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훗날 세례 요한의 정체에 대하여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세례 요한) 이 사람이니라.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마11:14-15).
세례 요한이 행한 그 일이 바로 다시 오는 엘리야의 사명과 동일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평가 그대로 세례 요한은 말라기 선지자가 예언하고 있는 다시 오는 엘리야의 역할을 훌륭하게 성취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그는 그가 수행한 직무에 합당한 대우를 받고 있을 것입니다(마11:11). 그것이 진정한 세례 요한의 신분이며 정체성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다음과 같은 알쏭달쏭한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가 가능합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다”(마10:40-41). 무엇보다도 영접하는 그 일이 우선입니다. 영접한다는 것은 ‘맞아 들이고 대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예언의 말씀을 나의 사명으로 인식하고서 그 사명의 완수에 전력투구를 한다면 그 사명에 합당하는 대우를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 분이 위탁하는 어린 생명을 말씀으로 양육하고 소외 받고 있는 이웃의 생명을 살리고 돌본다면 그러한 성도에게는 천국에서 그 수행한 직무에 합당한 신분과 상급이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신분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그 역할이 중요한 것입니다. 나같이 부족한 사람을 선지자로 삼아 주심에 감사할 뿐입니다. 그래서 감히 선지자라고 자처하면서 사람들 앞에서 권세를 부릴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 이름에 맞는 역할을 감당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우리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가 자신의 신분과 직급을 세상적으로 내세우기 이전에 먼저 그러한 신분과 직급에 합당한 사명부터 잘 감당함으로써 그렇게 인정을 받게 되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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