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제275강(창47:11-12)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년 4월 26일(토)
바로의 명령과 요셉의 조치와의 차이(창47:6, 11)
애굽의 황제인 바로는 이민족인 총리 요셉의 친족들에게 영주권을 주고 있습니다(창47:6a). 그러나 요셉은 아예 고센 땅 일대의 좋은 목초지와 거주지를 사서 친족들에게 소유권을 넘겨주고 있습니다(창47:11). 그것이 바로와 요셉의 차이입니다. 일반적으로, 애굽의 황제가 개인간의 매매행위까지 규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실무적인 사항은 총리인 요셉이 전결로 처리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지만 거주권에 해당하는 바로의 명령을 확대 해석하여 아예 형제들이 땅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해주는 요셉의 조치는 적절하면서도 과감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바로의 윤허는 사실 굉장히 예외적인 것입니다. 총리인 사브낫바네아의 친족들이기에 그가 엄청난 특혜를 준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특혜가 네 가지나 됩니다; 첫째, 이민족인 요셉의 친족들에게 영주권을 주고 있습니다. 둘째, 바로는 요셉의 형들의 청원을 받아 들여서 그들이 고센 땅에서 목축업을 영위할 수 있도록 허용을 했습니다(창47:4, 6b). 셋째, 바로 자신의 가축까지 관리할 수 있는 권한도 부여하고 있습니다(창47:6c). 넷째, 고맙게도 바로는 그들을 고센 땅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조치를 해주라고 요셉에게 지시를 합니다(창47:5-6). 그러자 마치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이 요셉은 즉시 시행에 들어갑니다(창47:11).
요셉은 황제의 명령을 폭넓게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영주권을 받았지만 남의 땅에서 목축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넓은 목초지를 아버지와 형제들의 소유로 만들어주어야만 합니다. 즉시 요셉은 그 작업에 들어갑니다. 그와 같은 실무적인 것까지 바로가 챙겨준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직접 친족들의 재산과 자신의 재산을 기울여서 고센 지역에서 용도에 맞는 넓은 땅을 구입한 것입니다(창47:11).
이스라엘의 가족을 봉양하는 애굽의 총리 요셉(창47:12)
연이은 흉년이 애굽 제국과 주변국에 찾아오고 있습니다(창41:57). 먹을 양식이 떨어지면 살 길을 찾아서 유민(流民, 떠돌이 백성)들이 천하를 떠돌게 됩니다. 주변국의 유민들이 먹을 것이 있는 애굽 제국으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돈이 있는 자는 양식을 사기 위하여 몰려듭니다. 그러나 돈이 떨어진 자들은 무작정 양식이 보관되어 있는 애굽으로 들어옵니다. 그러면 애굽의 군대가 그들을 몰아내어야만 합니다. 당시의 상황이 그러합니다. 그러한 소용돌이 가운데에서 요셉 때문에 그의 친족들이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창47:5-6, 11-12).
그것은 마치 노아의 하나님 신앙 때문에 그의 아내와 자식들 부부가 모두 방주구원을 받게 되는 것과 흡사합니다(창6:9, 17-18). 그리고 그 모습은 또 출애굽을 하고서 광야로 나온 200만명 이상의 이스라엘 자손들이 훗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먹을 것이 없는 광야에서 그 많은 백성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서 살아남은 것입니다(출16:3-5). 여기 본문에서는 요셉이 애굽의 곡식을 고센 땅으로 보내어서 아버지와 형제들 그리고 그 자손들을 봉양하고 있습니다(창47:12).
요셉은 친족들에게 땅도 사주고 먹을 것도 제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그 정도에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신앙교육이 병행되어야만 합니다. 육체적으로 살아남는 것도 중요하지만 영적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획득할 수 있는 하나님 신앙을 가지도록 자녀들을 양육해야만 합니다”. 요셉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그 일을 하나님의 사람인 야곱이 행하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은 애굽의 고센 땅에서 고귀한 총리의 부친으로 인생을 마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신앙심을 자녀들에게 물려주고자 합니다(창47:28-31, 49:29-33). 아울러 요셉이 애굽에서 낳은 두 아들도 이스라엘 자손에 요셉의 두 지파로서 아예 편입을 시키고자 합니다(창48:5, 22). 애굽 땅에서 번창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의 땅으로 훗날 돌아가서 그곳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 훨씬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자 하는 것입니다(창15:13-16, 46:4). 그것이 올바른 양육이기에 그 이야기가 앞으로 창세기 끝까지 전개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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