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창세기 강해 제272강(창46:31-34)(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2. 6. 20:45

창세기 강해 제272(46:31-34)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425()

 

좋은 목축지 고센 땅을 얻기 위한 요셉의 책략(46:31-34)

 

본문은 애굽의 실세 총리인 사브낫바네아 요셉이 그의 아버지와 형제들에게 애굽 제국의 동북면 변방 땅 고센을 바로로부터 얻어주기 위하여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애굽의 황제인 바로는 이미 엄청난 권한을 총리인 사브낫바네아에게 위임을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연이은 흉년으로 굶주리고 있는 천하의 모든 백성들에게 양식을 팔 수 있는 대권까지 총리인 요셉에게 위임을 하고 있는 상태입니다(41:55).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그 변방의 땅 고센 지방을 얻기 위하여 치밀하게 책략을 꾸미고 있습니다. 왜 요셉이 그와 같이 신중하게 행동할 수밖에 없을까요? 더구나 고센 땅은 농사를 중시하고 있는 애굽사람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리 중요한 땅이 아닙니다. 그들은 목축을 가증스러운 일, 곧 천한 일로 보고 있기 때문에 목축지인 고센 땅을 중시할 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이 너무나 신중을 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고대사회의 계급구조와 상하관계를 근본적으로 들여다보아야만 합니다. 어째서 상위의 계급이 하위의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의 목숨 줄을 쥐고 있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고대사회는 서열이 엄격한 계급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계급사회의 특징은 피라미드 구조입니다. 그것은 지배계급의 수가 적고 피지배계급의 수가 많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삼각형의 지배구조가 존속할 수 있다는 것은 다수인 하층계급의 반란과 혁명을 효과적으로 잠재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방법이 무엇일까요? 기본적으로, 위의 계급이 모든 재화와 권력을 소유하고서 아래 계급의 목숨 줄을 쥐고 있도록 제도화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윗전은 영원히 주인으로 행세하고 있습니다. 아래 계급은 윗전에 목숨 줄을 맡기고 있으므로 영원한 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천하의 대권을 쥐고 있는 애굽의 총리 사브낫바네아라고 하더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막강한 총리의 권한이라고 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황제인 바로가 위임을 하고 있는 권한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전히 요셉은 바로의 종입니다. 총리는 자신의 목숨 줄을 상전인 바로에게 맡기고 있는 아래계급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22년 만에 만난 형제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면서 그가 지니고 있는 엄청난 지위와 권력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내용도 달리 이해를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요셉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바로의 종이며 제2인자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서 말하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45:8). 동일한 맥락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얻고 계시는 다음과 같은 막강한 지위와 권세도 이해가 가능합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28:18). 그리스도 예수도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그 권한을 위임을 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제 마음대로 권세를 휘두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 권세는 훗날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서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도록 하는데 합목적적으로 사용하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 점을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전15:24).

상기와 같은 사실을 확실하게 이해하고서 본문을 다시 보게 되면 왜 요셉이 그와 같은 신중한 책략을 꾸며서 바로를 상대하고 있는지를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아버지와 형제들과 그 자손들이 자신처럼 종으로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천하의 주인인 바로의 권력으로부터 좀 더 멀리 떨어져서 자유스럽게 살 수 있기를 간절하게 소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의 구체적인 책략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요셉은 먼저 바로에게 보고를 드려야만 합니다. 황제인 바로가 배려를 해주셔서 아버지와 형제들이 무사히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입국을 했다는 사실을 보고하는 것입니다(46:31). 요셉은 그 자리를 빌려서 자연스럽게 부모형제들이 많은 가축을 몰고 왔으므로 부득이 목축이 가능한 변방 고센 땅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합니다(46:32). 그 이유는 그들의 직업이 목축업이므로 그곳에서 살 수 있도록 조치를 해주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생각을 사전에 바로에게 집어넣어 주고자 하는 치밀한 의도입니다(45:10, 18, 47:4).

둘째로, 요셉은 형제들과 말을 맞추고 있습니다. 가까운 시일 내에 형제들을 데리고 가서 다시 바로를 배알할 예정입니다. 그때 틀림없이 바로가 형제들에게 생업이 무엇인지를 물을 것입니다. 그러면 때를 놓치지 아니하고서 다음과 같이 고센 땅을 얻을 수 있도록 말씀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들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살게 되리이다”(46:34). 요셉이 상당히 신경을 써서 말을 만들고 형제들에게 미리 연습을 시키고 있는 내용으로 보입니다. 그 내용이 간결하면서도 참으로 논리가 정연하고 호소력이 있어 보입니다. 요컨대, 그 말을 듣게 되면 바로가 고센 땅을 목축지로 내어줄 수 밖에 없을 것만 같습니다.  

여기서 애굽 사람들이 목축을 가증히 여긴다고 하는 말은 그들이 이미 정착식 농업을 경영하고 있다는 뜻입니다(46:34). 고대사회 그것도 약 4,000년 전의 사회에서 정착식 농업이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은 특기할 만한 사실입니다. 한 마디로, 나일 강의 유역이 엄청나게 기름지고 농사가 잘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좋은 땅은 전부 애굽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는 결코 이주민을 받아들이지 아니할 것입니다. 따라서 애굽으로 이주를 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집안으로서는 변방 목축지 고센 땅을 얻는 것이 현실적으로 타당합니다.

참고로, 정착식 농업이 이루어지면 다음과 같은 변화가 있게 됩니다; 첫째,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많은 인력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는 지역이 됩니다. 둘째, 기름진 곡창지대는 모두가 탐내는 땅입니다. 그 결과 힘이 센 족속들이 그 땅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셋째, 목축업보다는 정착식 농업이 훨씬 생산성이 높습니다. 그러므로 목축지역보다는 정착식 농업지역에서 인구가 더 빨리 증가하게 됩니다. 넷째, 좋은 땅은 정복전쟁을 통해서만 획득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주를 하는 경우에는 결코 얻을 수가 없는 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