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제267강(창45:27-28)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년 4월 17일(목)
야곱이 그 수레를 보고서 비로서 기운이 소생하고 요셉이 살아 있으며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음을 믿게 되다(창45:27).
요셉의 형제들이 아버지 야곱에게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던 요셉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창45:26a). 더구나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다는 소식까지 전합니다(창45:26b). 그러나 아버지 야곱은 그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반응이 “어리둥절하더니”(창45:26c)라고 표현이 되고 있습니다. 사실 그럴 만도 합니다. 그 동안22년 동안이나 야곱은 아들 요셉이 짐승에게 물려서 죽은 줄로만 알고서 지내왔습니다(창37:33, 42:38). 그런데 갑자기 죽은 줄 알고 있었던 아들이 살아 있다고 자식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지금 세상 모든 사람들의 목숨 줄을 한 손에 움켜쥐고 있는 애굽의 총리가 요셉이라고 하니 어떻게 그러한 사실을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창41:55-57) 그것이야말로 경천동지(驚天動地, 하늘이 놀라고 땅이 움직이는 것)할 사건입니다. 야곱 자신이 믿고 있던 사실이 전부 뒤집어지고 있으니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와 똑 같은 사건이 신약시대에 발생을 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무덤 속에 들어가 있던 나사렛 예수가 부활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입니다. 안식일 다음날 첫 새벽에 그 무덤을 방문했던 막달라 마리아와 갈릴리 여인들을 통하여 그 소식이 사도들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소식을 듣고서 어리둥절할 뿐입니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막16:1-11). 그러나 그 소식은 제자들을 통하여 은밀하게 예루살렘과 유대 땅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부활한 예수님을 직접 자신들의 눈으로 보지 못했던 유대인들은 끝까지 그 사실을 믿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바리새인들의 큰 스승인 가말리엘의 제자인 젊은 랍비 사울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훗날 예수님의 부활의 사건을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사도로서 맹활약을 하게 됩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여 사울이 사도 바울로 바뀌게 되는 것일까요? 그는 어떻게 하여 나사렛 예수의 부활을 믿게 되는 것일까요?
본문에서는 야곱이 자기를 태우려고 요셉이 애굽에서 보내온 수레를 보고서 비로서 그 사실을 믿게 되며 기운을 회복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창45:27). 그렇다면 그 믿지 못할 이야기를 믿게 만들어 주고 있는 물증은 그 수레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보통 수레가 아닙니다. 애굽의 황제인 바로만이 사용하거나 제공할 수 있는 소위 ‘버금수레’입니다. 그 수레에 타게 되면 백성들은 그 수레만을 보고서 마치 애굽의 황제인 바로의 행차를 만난 것처럼 경의를 표시해야만 합니다(창41:43). 그 버금수레를 일찍이 바로가 히브리인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전격적으로 발탁하면서 제공한 적이 있습니다. 애굽 제국의 절대권력자인 바로의 권위를 상징하고 있는 그 수레가 지금 야곱의 눈앞에 있습니다(창45:27). 그것을 보고서 야곱이 비로서 모든 사실을 수긍하게 됩니다. 그래서 기운을 차리고 있습니다.
바로만이 사용하면서 그가 특별히 신임하는 자에게 잠시 제공할 수 있는 버금수레와 비슷한 수레가 유대인들의 역사서에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열왕기하 제2장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선지자 엘리야가 제자 엘리사가 보고 있는 가운데 요단 강가에서 승천을 하고 있습니다. 회오리바람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불말이 이끄는 불수레를 타고서 하늘로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엘리사는 갑절의 영감을 얻게 됩니다”(왕하2:7-15). 선지자에게는 승천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불수레를 보내어주신다는 사실을 엘리사가 눈으로 보고서 믿게 됩니다. 그 순간부터 엘리사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평생을 살게 된다면 자신에게도 승천의 미래가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장차 천국으로 올라가서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을 누리게 되는 미래가 보장이 되어 있는데 이 세상에서 그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엘리사는 용기백배하여 영적인 암흑시대 아합 왕의 시대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강력하게 증거하게 됩니다.
같은 맥락에서 사람의 영을 소생시키는 수레와 같은 것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영적인 경험(spiritual experience)”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사울이 사도 바울로 바뀌는 역사 가운데 그 내용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AD 35년경 바리새인 사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됩니다. 백주 대낮에 갑자기 하늘에서 태양보다 더 강력한 빛이 그에게 나타난 것입니다(행9:3). 그는 눈이 멀어버리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것임을 알게 됩니다(행9:8, 22:11). 그리고 영적인 눈으로 그 영광 가운데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사람의 음성과 주님의 형상으로 감지하게 됩니다(행9:4, 22, 7-8). 그는 400년의 랍비의 역사 가운데 최초로 하나님을 만나고 선지자가 될 수 있는 영광이 그에게 찾아왔음을 직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음성의 내용이 영 이상합니다; 한 마디로, “만군의 여호와”(사6:3)라는 정체성이 아니라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9:5)는 것입니다. 하도 이상하여 직접 그 정체를 물었지만 그 대답은 동일했습니다. 그때부터 사울의 고민은 시작이 되었습니다. 수년간 그 사건의 의미를 히브리 바이블에 비추어서 연구를 한 결과(갈1:15-2:1) 사울은 하나의 결론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무덤 속에서 부활하여 승천하였으며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고 사울 자신에게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과 뜻을 쫓아서 인생을 살아가게 되면 자신에게도 부활과 승천 그리고 하나님 자녀로서의 영광이 찾아 온다는 것입니다”(고전15:20-24, 빌3:7-14).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창45:28)는 야곱의 말의 의미
노인 야곱의 새로운 삶의 목표와 간절한 소망이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창45:28)는 그의 말 속에 그대로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기운이 소생한 야곱의 그 각오는 그리스도인의 소망과 세상살이의 목표와 무척 닮아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요셉을 다시 만나는 것은 부활의 주님을 다시 만나는 성도들의 인생의 최종목표와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만나러 간다는 삶의 자세 그것이 마치 믿는 자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실천하며 살아감으로써 하나님 아버지를 만날 준비를 한다는 삶의 자세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요17:15-20).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명심해야만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살이에 있어서 성도들은 그 각오가 매우 단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장차 하늘나라에서 성도들이 그리스도로부터 외면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수많은 유혹과 시험을 물리치면서 반드시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살아가야만 하기 때문입니다(마7:21, 25:42-46). 한 마디로,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야곱의 말처럼 “(반드시) 그를 보리라”(창45:28)는 각오로 달려가야만 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사도 바울 역시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3:12)고 강조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그것이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성도의 삶입니다(빌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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